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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30  통권 140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2102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타이베이 맥카이(마지에) 기념병원을 설립한 퍼거슨 선교사

퍼거슨 선교사 (Dr. George V. Ferguson, 宋雅各)는 타이완 북부 의료역사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이다. 1901년 타이완 북부 최초의 선교사 맥카이 목사(George Leslie Mackay, 1844-1901, 馬偕)가 소천하면서 지에이관(偕館醫)을 계속 운영할 수가 없어 폐관하였다. 1905년 제2회 타이완 북부장로회 노회에서 지에이관 재개의 필요성을 실감하여, 캐나다 선교본부에 의료선교사를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캐나다 선교본부에서는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1905년 퍼거슨 선교사를 파견하여, 그해 11월 3일 단쉐이에 도착하였다. 퍼거슨 선교사는 의사이며 목사여서 이 역할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임지인 단쉐이에 부임하여 5년 동안 문을 닫았던 지에이관을 재개하여,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의료중심을 단쉐이에서 타이베이로 옮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타이완 북부 지역의 복음 사역이 계속 발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지에이관의 재개 
퍼거슨 목사부부가 단쉐이에 부임하자마자 먼저 대만어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하였다. 대만어는 푸젠성(福建省) 남부 지역의 방언으로 학계에서는 이를 민난어(萄南語)라고 칭한다. 중국에서는 푸젠성을 민(萄)이라고 부른다. 민난어는 중국의 표준어인 만다린과 전혀 다른 외국어와 같아 특별히 배우지 않으면 대화할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어는 4성으로 되어 있지만, 민난어는 8성으로 되어 있어 이를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이완 사람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 두 언어권에 생활하여서 중국어와 대만어를 모두 유창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1949년 쟝제스(蔣介石) 총통과 함께 타이완으로 피난 온 중국 사람들을 외성인(外省)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들은 타이완에서 생활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대만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이니, 이 두 언어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알 것 같다. 단쉐이 주민들은 새로 부임한 선교사가 목사이며 의사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모두 병이 난 것처럼 치료를 간구하며 퍼거슨 목사의 집으로 찾아올 정도였다. 퍼거슨 목사는 원래 언어를 먼저 배운 다음 선교 사역을 착수하려고 했지만, 워낙 많은 환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목격하고 할 수 없이 거주하는 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윌리암 가울드 목사(Rev. William Gauld, 1861-1923, 吳威廉)의 사모와 커웨이쓰(柯維思) 등의 통역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대만어의 기초가 조금씩 향상되자, 그 이듬해인 1906년에 지에이관을 재개하였다. 당시에는 병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퍼거슨 목사의 의술이 뛰어나고, 친절히 환자들을 돌보았기에 그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먼 지역에서조차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 단쉐이는 타이완 북부 지역의 중요한 의료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매일 100여 명의 환자들을 치료하며, 의료선교 사역에 최선을 다하였다. 일본식민지 정부도 퍼거슨 선교사의 의학지식과 의료기술을 중시하여, 지에이관의 재개와 운영에 많은 협조와 도움을 제공해 지에이관의 역할이 점점 중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단쉐이는 과거와 같이 번화한 항구도시의 모습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맥카이 기념병원의 창건 
타이완 북부 지역의 개척자인 맥카이 목사가 타이완에 부임하였을 때 단쉐이는 중국과 서구 열강 간에 맺은 베이징조약(北京條約)에 의해 개방된 항구 중의 하나였다. 외국인들은 조약에 체결된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고, 또 토지와 건물들을 자유롭게 임대하고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95년 중국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여 마관조약을 맺고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하게 되었다. 이로써 타이완은 일본 최초의 해외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이 동아시아로 발전하는 중요한 전초기지로 변모하였다. 이처럼 일본 정부가 타이완을 점령하면서 조약상의 협의내용이 상실되면서 단쉐이의 특권이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더욱이 단쉐이항구 자체가 수심이 낮고 모래가 누적되어 예전과 같은 번영된 항구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수도를 타이난(臺南)에서 타이베이로 옮기고, 타이베이를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타이베이는 정치, 경제, 문화 등은 물론 모든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자들이 단쉐이까지 왕래하는데 교통의 불편함이 가증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퍼거슨 목사는 지에이관이 시대에 뒤떨어져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시대와 일본식민지 시대에 적합한 기독교병원의 설립을 생각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평소에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더욱 절실히 그 필요성을 느꼈다. 그 좋은 예를 들면, 어느 날 먼 지역에서 가슴에 혹이 생긴 한 부녀가 퍼거슨 목사를 찾아 왔는데 그는 혹 제거수술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 환자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진료를 마치고 가울드 목사 사모와 함께 그 환자의 집을 방문하여 수술경과를 살펴보았다. 뜻밖에도 그 환자의 환부가 크게 확대되어 있었고, 환자는 심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 환자는 집에 돌아와 그 수술 부위가 아물기도 전에 쉬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하느라 수술부위가 터져 상처가 덧난 것이었다. 퍼거슨 목사는 그 자리에서 상처를 씻어주고 재수술을 해주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그 부인은 퍼거슨 목사의 친절한 치료에 감동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퍼거슨 목사는 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입원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면, 이러한 수술환자는 수술 후 완쾌될 때까지 병원에 계속 머물면서 치료를 받으면 이와 같은 고통을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병원 신축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였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퍼거슨 목사는 어느 날 단쉐이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부자를 치료해주었다. 그는 부자였지만 퍼거슨 목사가 그를 치료하러 갔을 때는 돼지우리에 누워서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부자는 원인 모를 병으로 몸에 두 곳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고 계속 확대되어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부자는 그동안 12명의 한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돼지우리에 누워있으면 행운이 오고, 또 병도 낫는다고 하여 그는 더러운 돼지우리에 누워서 그의 병을 치료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퍼거슨 목사는 가까스로 그를 설득하여 3주 동안 치료하여 마침내 병이 완쾌되었고, 그와 그의 가족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퍼거슨 목사는 이러한 환자들을 직접 치료해주면서 병원시설의 확충이 필요한 것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1911년 북부선교사 회의에서 선교중심을 단쉐이에서 수도인 타이베이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북부 지역 책임자인 가울드 목사와 상의하여 타이베이 슈앙롄(雙連)에 넓은 대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새로운 병원과 신학교 그리고 선교사들의 숙소 등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캐나다 모(母) 교회에 그에 필요한 의료 요원들을 더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캐나다 모 교회에서는 그 계획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건설비용으로 25,000달러를 지원하고, 1911년 가을에 간호사 엘리엇(Miss Isabel Elliot, 烈姑)을 파견하고 그 이듬해에는 그레이(Dr. A. A. Gray, 倪阿倫)의사부부를 파견하여 의료 사역에 협조하도록 하였다. 건축 과정에서 가울드 목사가 친히 설계와 건축을 감독하고 지휘하였다. 가울드 목사는 정식 건축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목수인 부친을 도우면서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였을 뿐 아니라, 천부적으로 건축에 대한 흥미와 섬세한 미관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타이완에서 31년 동안 선교하면서, 북부 지역에 아름다운 서구식 건물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타이베이 맥카이 기념병원(1912) 이외에도, 타이베이신학교(1918)와 4동의 선교사숙소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단쉐이중학교(淡江中學校) 내의 단쉐이여학교(淡水女學校)의 학교건물 뿐이고, 대부분 도시계획 등으로 거의 철거되거나 개축되었다. 그의 건축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어서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일본인들과 영국인들이 중요한 건물을 건축할 때는 그에게 자문을 부탁했다. 특히 철도국 건물도 그의 걸출한 작품 중의 하나였다. 

1912년 마침내 새로운 병원이 완성되었다. 그 이름을‘맥카이 기념병원’(Mackay Memorial Hospital, 馬偕紀念醫院)으로 명명하여, 북부 최초의 선교사 맥카이 목사를 기념하고자 했다. 1912년 12월 26일 동양에서 가장 좋은 기독교병원이라고 칭하는 맥카이 기념병원의 개원식이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일본 정부도 이 병원의 건립을 매우 중요시하여 민정장관이 직접 많은 관리들을 인솔하여 참석하였다. 그 밖에도 영국과 미국영사 그리고 많은 유명인사들과 수많은 교인들의 참석으로 개원식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의 민정장관은 맥카이 기념병원의 설립은 매우 의미 있는 사회복지 활동이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이 병원을 통해 타이완 사회복지에 많은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고 치사하였다. 타이완 장로교회는 그 이튿날 똑 같은 장소에서 타이완북부교회 설립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때마침 북부교회 40주년을 맞아서 맥카이 기념병원이 설립되어 타이완 북부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개원식에 참석한 한 캐나다 사람은“이 병원은 자기가 동방 사회에서 본 의원 중에 가장 좋은 병원이다.”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퍼거슨 목사는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여 열심히 일하다가, 그 다음해에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돌아가 휴가를 보내고, 그레이 의사가 대리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의료활동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1913년의 보고서에는 의원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의사 한명, 외국인간호원 한명, 현지 보조의사 두 명, 약사 세 명, 세균병리사 한명, 보조조제사 한명과 병원에 상주하는 전도사 한명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개원 이래 처음 9개월 동안 입원환자가 467명, 첫 외래환자가 4,600명, 외래환자가 25,670명, 그리고 전체 치료환자가 30,270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간호부의 성립 
1911년 가을에 간호사 엘리엇이 타이완 북부 지역에 파견되어 왔다. 1913년 퍼거슨 목사는 그를 그 병원 간호장으로 임명하여 의료진을 강화하였다. 엘리엇의 지도아래‘간호부’가 성립되면서, 의원의 의료 활동이 상당히 향상되었다. 간호부에서는 환자들을 돌볼 뿐 아니라, 간호사들을 가르치고 양성하였다. 1916년 보고서에 의하면, 엘리엇이 간호장이 되면서 단쉐이 여자고등학교 출신 중에 7-12명을 간호사로 훈련시켰다. 타이완 북부의 초기 간호사들은 대부분이 간호부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란(宜蘭) 분원(分院)의 설립 
퍼거슨 목사가 안식년을 마치고 임지로 돌아와 병원업무를 주도한 후에, 병원 업무가 계속전하여서, 이제는 타이베이 이외의 벽촌과 산간 지역의 의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레이 의사는 산간벽지의 의료활동에 많은 부담을 갖고 열심히 봉사하였는데, 특별히 타이완 동부 지역인 이란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그곳에 분원을 세우고,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당시에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병이 나도 특별히 치료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이 지역에 분원을 세우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사회복지 활동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너무 무리하여 1919년 본국으로 돌아가 휴양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란 분원은 개원한지 얼마 안 되어 문을 닫아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폐관 
안식년을 마치고 임지로 돌아온 퍼거슨 목사는 5년간 열심히 봉사하여, 의료활동이 매우 활발히 진행되었다. 1916년의 보고에 의하면 간호사 엘리엇은 단쉐이 여자학교 졸업생 10여 명을 훈련시켜 간호사로 활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전 세계는 4년 동안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생활에 많은 영향을 받아야 했다. 선교활동도 예외는 아니어서 의료 활동에 필요한 약품과 선교비 등의 부족으로 부득이 1918년 6월에 병원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퍼거슨 목사는 14년 동안 타이완 북부에서 의료활동에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역시 건강상의 이유로 캐나다로 귀국해야 했다. 캐나다선교회에서는 간호사 루스컴베(Miss Margaret E. Luscombe, 呂馬烈)와 덴홈 의사(Dr. K.A. Denholm, 連虔益)를 파견하여 의료활동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병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다. 또 선교사들은 타이완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부득이 병원 문을 닫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당시 타이완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자주 격어야 할 난제들이었다. 

맥카이 기념병원의 재개 
1923년 다행히 타이완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라 일컫는 테일러 의사(Dr. G. Gushue taylor, 戴仁壽)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병원을 재개하여 병원은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테일러 의사는 전에 타이완 남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어서 타이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부임하자마자 병원 운영에 전신을 기울여 병원이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특히 이듬해에 윌리암 가울드 목사의 장녀 그레타(Gretta Gauld, 阿玉)가 맥카이 기념병원에 부임하였다. 그는 전에 타이완 남부 지역에서 다년간 간호사로 활동하여 풍부한 경험이 있어서 맥카이 기념병원의 운영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 같은 해 가울드 목사의 셋째 딸 플로라 가울드(Flora Gauld, 花蜜)도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사 요한(J. L. Little)과 결혼하여 맥카이 기념병원에 부부가 함께 봉사하여 맥카이 기념병원이 활발히 재출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그해 가을 캐나다장로회에서 의사 겸 선교사인 도날드 불랙을 파견하여 맥카이 기념병원의 의료진을 강화하여 맥카이 기념병원은 지금까지 타이완 북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병원으로 성장하였다. 

퍼거슨 목사의 의료선교 
퍼거슨 목사는 14년 동안 타이완에서 목사로 의사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캐나다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귀국 후 캐나다의 한 종합병원에서 외과주임으로 활동하다가, 노년에 개인병원을 개설하여 계속 의료활동에 봉사하다가 1965년 2월 23일, 88세로 토론토에서 소천하였다. 

퍼거슨 목사는 선교사이며 의사인 이중 신분으로 타이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을 뿐 아니라, 환자들을 성심성의를 다해 치료해주어 환자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위로를 주었다. 퍼거슨 목사가 귀국한 후에도 많은 환자들이 그를 찾으며 감사를 표하였다. 천텐(陳添)이라고 하는 노인은 병원에 올 때마다, 자기를 치료해주고, 성경과 찬송을 가르쳐준 퍼거슨 목사를 찾으며, 그의 안부를 물으며 아쉬워했다.


강인규 | 대만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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