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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2  통권 139호  필자 : 김성곤  |  조회 : 3418   프린트   이메일 
[한시 강좌]
한시의 그늘

<淸明> <청명> 唐, 杜牧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이라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路上行人欲斷魂. 길 가는 나그네 외로워 마음 자지러진다.
借問酒家何處有, 주막집 있는 곳 어디쯤이냐 물으니,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은 저만치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

봄비에 젖어 먼 길을 걸어온 지친 나그네에게 필요한 것은‘술집’이다. 그리고 그 술집은‘살구꽃이 핀 마을’에 있다. 살구꽃 화사한 꽃그늘 아래에 나그네는 지친 몸과 맘을 내려놓는다. 하루 이틀 푹 쉬고 나면 다리에 다시 힘이 오를 것이고 가야할 먼 길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분주하고 복잡한 시절을 살아 피곤과 스트레스에 지친 우리에게도‘술집’이 필요하다. 살구꽃이 화사하게 핀 마을 어귀에서 주기를 휘날리고 있는 술집이라는 휴식의 공간이 말이다. 술을 먹자고 권하는 게 아니다. 좀 쉬어가자는 얘기다. 아무리 일정이 촉박하고, 갈 길이 멀다고 해도 아주 눌러앉는 것도 아니고 살구꽃 아래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니 무엇 어려울 것이 있겠냐는 말이다. 

다양한 휴식의 공간 중의 한 곳으로 한시를 제안한다. 혹여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와서 이 한시의 그늘에서 쉼을 얻기를 바란다. 특히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꼭 와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들에게 한시는 아주 적합한 휴식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생활은 속도 숭배와 자연 상실로 요약될 것이다. 속도를 추구하면 피곤해지기 쉽다. 과속에는 긴장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 긴장으로 인한 피로를 적당한 때에 풀어주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병이 되는 법이다. 과속으로 인한 피로를 푸는 방법은 그 속도를 줄이는 데에 있다. 그리고 속도를 줄이는 방법은 속도가 느린 공간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게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속도가 느리다. 강물이 바쁘다고 서둘러 흐르는 법이 없고 산이 급하다고 계절을 재촉하지 않는다. 태초의 속도 그대로 고요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자연 속에 머물게 되면 절로 그 전체적인 느린 속도에 우리의 호흡과 생각의 리듬이 맞춰지게 된다. 느려진 삶의 속도 속에서 우리의 심신은 휴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연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는 것이다. 자연의 터에는 욕망의 고속도로와 아파트들이 대신 들어서서 속도를 부채질 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과속에서 오는 피로를 풀 공간이 없어졌다. 가정은 어떤가? 가정은 본래 속도가 느린 곳이었다. 그래서 격한 속도에 시달린 가장이 돌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쉼터가 아니다. 교육의 무한경쟁을 위해 쉴 수 없는 아이들의 종종걸음과 그 아이들을 감독하고 채근하는 엄마의 거칠고 급한 고음으로 가정의 속도는 높아질 대로 높아졌다. 남편들은 다시 쉼터를 찾아 거리로 나가게 되는데 이 무정한 도시의 거리 어디에 쉼터가 있겠는가. 술 한 잔으로 잠시 쉼을 얻으려 하지만 그 결과는 더 피곤해질 뿐이다. 그야말로‘길가는 나그네 넋이 끊어질(路上行人欲斷魂)’지경이다. 쉬어갈‘살구꽃 핀 마을(杏花村)’은 어디에 있는가? 한시 속에는 자연이 살아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달, 별, 산, 강물, 꽃, 나무, 새들이 지천이다. 그리고 한시의 세계는 바쁠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유유자적하고, 단순 소박한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 한시의 세계로 들어 와서 자연의 향기 속에 여유로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이 잠시나마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송나라 때 유명한 화가인 곽희는 군자가 산수화를 즐기는 뜻에 대해서, 본시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늘 자연과 친해야 하는 것인데,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위하다 보면 자연과 친할 여유가 없게 되니, 이에 명산대천을 그려서 벽에 걸어두고 조석으로 감상하여 신유함으로써 자연과의 친밀함을 얻고 호연지기를 길러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게 되는데 그 뜻이 있다고 하였다. 한시를 감상하는 뜻이 이와 유사한 점이 있지 않겠는가? 예부터 훌륭한 시에는 그림이 담겨있고, 훌륭한 그림에는 시가 담겨있다고 하였다. 시가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시인 것이다. 한시 속에는 청정한 강물이 사철 흘러간다. 한시 속에는 삽상한 솔바람이 만 골짜기를 불어간다. 그 강물에 속세의 묵은 때를 씻고, 그 바람에 세속의 피곤을 날려 보내면 되는 것이다.

<山居秋暝> <가을날 저문 산에서> 唐, 王維

空山新雨後, 빈산에 비 새로 내린 뒤
天氣晩來秋. 저물녘 완연한 가을이라
明月松間照,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淸泉石上流. 맑은 샘물 돌 위로 흘러간다
竹喧歸浣女, 빨래하는 여인들 돌아가느라 대숲은 시끌하고
蓮動下漁舟. 고기잡이 배 연꽃 흔들거리며 내려간다
隨意春芳歇, 봄풀이야 제멋대로 시들어가지만
王孫自可留. 왕손이야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아라

막 비가 개인 가을날 저녁의 맑고 그윽한 경치가 그림처럼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 시가 펼쳐놓은 자연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서 쉬면된다. 구름 걷힌 하늘에 밝은 달이 이제 막 비에 씻긴 깨끗한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달빛 받아 하얗게 빛나는 돌 위로 맑은 샘물이 흘러간다. 그곳 어딘가에 자리를 정해두고 달빛으로 눈을 씻고, 솔 내음으로 코를 씻고, 맑은 샘물로 입을 씻고, 돌 위로 흐르는 물소리로 귀를 씻으면 될 것이다. 충혈된 눈이 맑아지고 비염으로 훌쩍 거리던 코가 상쾌해지고 구취 나던 입안도 개운해지고 이명으로 웅웅거리던 귀도 말짱해질 것이다. 대숲을 지나가는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3,4구의 자연 경물들을 통해 깨끗하게 씻긴 작자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요, 흔들흔들 연꽃을 지나가는 고기잡이배는 세속의 분망함 밖에서 그윽한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는 작자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연꽃으로 표현될 정도의 고귀한 즐거움이요 가치이다. 이러한 세계는 작자가 말한 대로‘머물러 있을 만한(自可留)’곳이 아닌가.

<竹里館> <죽리관에서> 唐, 王維

 

獨坐幽篁裏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
彈琴復長嘯거문고 타다가 길게 휘파람을 분다
深林人不知깊은 숲 아는 사람 없고
明月來相照밝은 달만이 찾아와 날 비춘다

이 한시의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시인을 잠시 나오라 하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그윽한 대숲에 앉아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도 불러보자. 밝은 달이 보고도 말하지 않는 깊은 정의 친구처럼 찾아올 것이다. 우리의 혼이 가는 것이다. 그 혼이 달빛 그윽한 대숲을 다녀오는 것이다. 대숲에 부서지는 밝은 달빛으로 우리의 혼이 먼저 씻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돌아온 혼이 우리 몸을 다시 만지는 것이다. 거문고의 은은한 울림과 같이 우리 몸 구석구석을 진동시킴으로써 세포 구석구석에 뭉쳐있는 피로의 알갱이들을 하나씩 풀어내는 것이다. 명상 훈련 중에 이런 게 있다. 고요히 명상하는 중에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유쾌하고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그것이 비록 먼 과거에 일어났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명상하고 있는 순간의 몸이 처음 그것이 발생했던 당시에 느꼈던 희열과 행복을 다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한시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는 것은 과거에 어떤 시인이 느꼈을 희열을 지금 내가 불러내어 내 혼과 몸이 그것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秋夜寄丘員外> <가을밤> 唐, 韋應物

 

懷君屬秋夜, 그리움 속에 찾아온 가을 밤
散步詠凉天. 서늘한 날을 거닐며 시를 읊는다
山空松子落, 빈산에 솔방울 떨어지면
幽人應未眠. 그대도 응당 잠을 못 이루겠지

도시 생활 속에서 밤이 온 가을 산에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일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위의 한시가 빚은 세계 속에서라면 가능하다. 고요한 가을밤 잎들이 다 저버린 빈산으로 가서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자. 그곳 산자락 어디메에 있을 산골 마을 외딴집이어도 좋고 한적한 절간의 요사채여도 좋다. 맘이 아득해지고 몸이 서늘해져 오지 않는가. 그리움이 가을바람처럼 불어올 것이다. 그런 맑고 서늘한 그리움이 바로 우리의 묵은 피로를 풀어주는 것이다. 뭉친 근육을 이완시켜 주는 것이다.

<秋日> <가을날> 金星坤

秋塘蓮子熟, 가을 연못에 연밥 익어가고
虛場紫?眠. 빈 마당에 고추잠자리 졸고 있다
雲落淸茶碗, 구름은 맑은 찻잔에 떨어지고
人歸路菊邊. 사람은 국화 핀 길로 돌아간다

이 시는 어느 가을날 사찰 부근의 찻집에서 지은 것이다. 마침 백련이 피고 난 후 연밥이 익어가는 연못이 있어서 차 한 잔 하는 즐거움이 컸는데 태양이 눈부시고 바람이 삽상하며 구름이 명랑하니 시심이 절로 일었다. 그래서 위 시를 지어 맑은 가을날의 서정을 담고자 했다. 이 시를 지금 인용하자니 시를 지었던 그 시절, 그 장소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떠오르니, 몸은 비록 책상 앞에 있어도 마음이 벌써 연못가 가을 햇살 눈부신 곳에 있는 듯하다. 누군가 이 시를 읽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 가을의 청명하고 삽상했던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을까? 내가 다녀온 그 공간에 함께 다녀온 듯한 느낌, 내가 마셨던 맑은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신 느낌이 들까? 차를 마신 후에 돌아오는 발길 끝에 퍼지는 국화의 삽상한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시가 성공한 것이려니와 나는 무형의 자연을 창조하여 누군가에게 피로를 회복케 할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기억할 것은 한시의 세계는 긴 여정에서의 주막과 같이 휴식의 한 지점일 뿐이다. 그것은 여행의 종착점도 아니며 여행의 목적도 아니다. 긴 여행을 위해 마련된 휴게소일 뿐이다. 그곳에 너무 오래 눌러앉아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여행의 목적을 잊게 되면 낭패가 아닌가. 휴식했으면 의당 서둘러 다시 가던 길을 가야한다. 가서 열심히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해야 한다. 살구꽃 핀 마을 주막에 들러 다리도 쉬고 마음도 달랬을 시인이 다시 길을 힘차게 떠났듯이 우리도 다시 싱싱해진 의식과 다리로 우리의 여정을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한시의 세계가 주는 휴식의 참된 의미는 바로 이곳에 있다.


김성곤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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