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5·6월호) 선교를 시작하다(1913~1917) ②(7·8월호) 선교가 무르익다(1917~1937) ③(9·10월호) 산동선교, 그 막을 일단 내리다(1937~1957)
산동선교는 1910년대에 시작되어, 1920년대에 무르익었고, 1930년대에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둔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산동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은 큰 타격이 되었다. 이 때는 비기운동(非基運動)이 교회를 괴롭히는 때이기도 했다. 1940년대에 중국은 공산화되어 교회들은 심한 제약 가운데 갇히게 되었고, 산동선교 역시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37년에 산동선교사로 부임한 방지일(方之日) 목사는 그런 여건들과 싸우면서 최선을 다했다. 어려운 가운데서 목숨을 걸고 걸은 사명의 길이었기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방지일 목사는 1937년 중국에 부임, ① 국민당 ② 일본통치 ③ 미군정 ④ 국민당 ⑤ 공산당, 5개 정권의 통치 속에서 선교를 하였다. 산동선교는 방지일 목사가 1957년에 강제추방 당함으로써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특별기획 사진으로 보는 산동선교’마지막 회에서는 산동선교의 연보를 정리하였다.
1912년 9월 1일, 제1회 예수교장로회 총회 열림. 이 총회에서 황해노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산동선교를 하기로 결의 1913년 5월, 김찬성(金燦星) 목사와 박태로(朴泰魯) 목사, 현지답사, 중국교회와 협의
1913년 9월 하순, 박태로·김영훈(金永勛)·사병순(史秉順) 목사 한국 출발, 10월 상순, 선교지인 산동의 라이양 도착
1915년 9월, 선교사들 교인 총수 40여 명, 평균 회집 30여 명, 처음으로 3인에게 세례 주었다고 총회에 보고
1916년 4월, 박태로 목사 건강문제로 귀국, 김영훈 목사와 사병순 목사 전도국의 허락 없이 환국
1917년 5월 7일, 박태로 목사, 방효원 목사와 함께 재차 중국에 갔다가 신병이 중하여 귀국하여 소천함
모이는 인원 4,50명 내지 5,60명, 세례인 28명, 학습인 35명, 집사 2명, 새로 믿기로 작정한 이 26명, 기도회 처소 6처, 학교 3처, 선교 구역은 동서가 60리, 남북이 60리, 촌락은 120처 9월 1일에 열린 제6회 장로교 총회에서 방효원(方孝元)·홍승한(洪承漢) 목사와 임시전도인 김병규(金炳奎) 조사 파송
1918년 박상순 목사 선교사로 증파됨, 5명이 세례를 받고 낙심했던 8명이 다시 돌아옴, 가을, 석수두(石水頭)에 새 교회 설립
1919년 김윤식(金允植) 의사 라이양에 병원 개원, 평양여전도회, 박상순 목사 사택을 마련해 줌
1920년 라이양에 선교기지 마련(800여 평, 복음당·선교사 사택·어학선생방·사환방·채원 등 구비), 6월, 미국북장로교회에서 설립한 장관채(張官寨)교회를 한국인 선교사들이 인계 받음
1922년 장관채교회(담임 박상순 목사), 와가(瓦家) 5칸의 예배당 신축(장로 3인, 세례교인 118인, 전체교인 123인, 예배처 2곳) 산동 선교구역이 라이양과 지모 두 구역으로 분할됨, 이대영(李大榮) 목사가 파송됨(선교비는 평북여전도회에서 담당하기로 함), 7월 25일, 홍승한 목사, 새로 건축된 지모의 사택으로 이사, 9월, 토비(土匪) 수백 명이 지모성을 공격한 사건 발생, 주민 수백 명이 홍승한 목사 사택으로 피난하였음. 그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함
1923년 1월 1일, 라이양성경학교 설립(첫 입학생 8명), 주현칙(朱賢則) 장로, 지모에 병원 개원, 제12회 총회에서 지모의 홍승한·이대영 선교사 소환 문제 거론됨
1925년 선교구역이 북구(라이양 동부와 동남부)·동구(지모 동부)·서구(라이양 서남부 평원지역)으로 3분됨
1928년 세례교인 898명, 총교인 1006명으로 집계됨, 포도단(布道團) 107개 지방 순회하며 5만여 명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복음서 400권을 팔았음. 신입교인 99명 생김
1929년 라이양성경학원 출신 류수파(劉書法)목사 안수 받음, 라이양 애린학교 8명, 지모 애도학교 2명의 졸업생 배출
1930년 김익두 목사, 중국교회 청원에 의해 라이양, 지모, 칭다오, 옌타이, 4처에서 부흥회, 160명이 결신함
1931년 여전도회, 김순호(金順好)를 산동선교사로 파송(라이양 거주), 봄, 안중호 의사, 지모에서 병원 개원, 선교사 가족들 치료에 많은 도움을 줌
1932년 5월, 교회 51처, 교인수 1,324명으로 늘어남, 라이양노회 독립
1934년 교회 61처, 교인수 1,424명
1935년 10월, 총회의 외지선교 축소 결의로 방효원 선교사 귀국
1937년 방지일 목사, 선교사로 부임(4월 14일에 선교사 증빙서 받고, 4월 28일, 평양을 출발, 5월 7일 라이양에 도착), 5월 30일, 이대영 선교사와 김순호 선교사 사택, 가구 전부를 약탈 당함, 지모 애도학교와 라이양 화동성경학교, 시국 관계로 개학하지 못함, 시국 문제로 박상순·이대영 선교사 중 1인은 칭다오에서 산동 각 교회를 지도하고, 1인은 만주선교를 협력하기로 함
1938년 방지일 목사, 칭다오에 첫 번째로 중자와(仲家窪)교회 개척
1939년 방지일 목사, 칭다오에 다섯 번째로 태평진(太平鎭)교회 포도소(布道所) 개척, 10월, 라이양 홍토안(紅土岸)에 교회 신설 30여 명 회집
1940년 교회 통계: 선교사 2인, 중국목사 2인, 장로 14인, 남집사 57인, 여전도사 3인, 남전도사 3인, 신학생 2인, 금년 수세자 116인, 세례교인 1,662인, 교회 34처
1941년 박상순 목사로부터 꾸중을 들은 지미교회 청년이 박 목사가 반일분자라고 고발하여 박 목사가 구속되었다가 퇴거당하자 총회에서 김석진 목사를 파견하여 현장 조사를 하게 함, 일본이 중국교회를 포섭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선교회 산동 지역 책임자인 야마무라 목사가 한국인교회가 대동아선교회에 소속할 것을 강요하자, 방지일 목사는 ‘우리는 중화기독교회 소속이라 안 된다’고 거부하자 야마무라 목사는 일본영사관과 헌병대에 한국선교사들이 배일운동을 하고 있다고 고발, 선교사들, 일본경찰의 가택수색과 취조 받음
1943년 4월 1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화북노회 칭다오교회 헌당식
1945년 10월, 한국인 교민들, 칭다오에 칭다오한국인학교 설립. 방지일 목사가 교장으로 취임함
1947년 공산당을 피해 도시로 피난 온 난민들을 위해 UN에서 죽창(粥廠)을 설립. 방지일 목사가 관리 책임을 맡아 매일 2,000여 명에게 배식을 하며 전도
1948년 이대영 선교사 귀국
1950년 6월 4일, 방지일 목사 소촌장(小村莊)교회 설립(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설립된 유일한 교회임), 공산정권하에서 라이양노회 비밀리에 모임
1953년 9월 17일, 장로교 총회, 방지일 목사에게 귀국하라는 통지서 보냄
1955년 8월 7일, 방지일 목사 공산치하에서 2명에게 마지막 세례식 베풂
1957년 칭다오의 기독교인들, 방지일 목사 귀국 환송예배 드림(7월 7일 중자와교회, 7월 15일 소촌장교회) 8월 19일 방지일 목사에게 홍콩으로 추방령 내림 방지일 목사, 수많은 교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23일 칭다오역 출발. 홍콩에서 한 달 체류 후 9월 18일, 선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대만과 일본을 경유 하여 23일, 부산에 도착함
정정합니다 본 특별기획 ①에서‘박태로 목사의 아들 박경구 목사는’이라고 한 것을(5;6월호 26쪽) ‘박태로 목사의 조카’로 정정합니다.
사진 설명 [사진과 설명은 번호 순서대로이며, 제일 위에 나온 사진이 1번입니다. 게시물에 사진 5개가 최대여서 마지막 사진은 못 올렸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보실 수 있습니다. ]
① 방지일 목사를 중화민국 산동성선교사로 파송한다는 증빙서 장로교 총회 전도부장 이자익(李自益) 목사 명의로 1937년 4월 14일에 발급되었다. 중국교회를 대상으로 하였기에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②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은 국부군과 팔로군(공산당)의 내전에 휩싸였다. 공산당이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사람들은 도시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다. UN 국제구제회는 죽을 배급하는 죽창(竹廠)을 설치하고 그 관리를 방지일 목사에게 의뢰했다. 죽창에서는 매일 2,000명에게 죽을 배식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방지일 목사는 죽창 사역에 대해“쉽지는 않았으나 그때 복음 역사는 크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사진은 1947년 4월 8일 죽창의 모습이다. 이 죽창은 1년 넘게 운영되었다.
③ 소촌장(小村庄) 교회 이 교회는 중국이 1949년 10월 1일에 공산화된 이후에 건립된 교회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공산당은 초기에 거주· 언론·종교의 자유를 강조했다.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책을 확립하지 못했기에 먼저‘자유’를 강조하여 인심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소촌장교회를 건축하려고 하자 교인들은 두려워하며 하기 어렵다고 했다. 방지일 목사는‘공산당이 종교의 자유를 내세우는데 왜 두려워하는가?’하면서 공사를 강행하여 몇 달 만에 완공하였다. 공산정권은 외국인 관련 교회는 다 등록하라고 하였는데, 방지일 목사는‘나는 중국적(中國籍) 목사이고 이 교회는 중국교회이다’하며 등록하지 않았다. 중국 목사들이 이 일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④ 방지일 목사 환송 기념예배 당시는 이와 같은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중국 성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다. 중국 성도들은 배급 받은 옷감으로 방 목사 가족의 옷을 만들어 몰래 담 밖에서 던지고 가고, 음식도 그렇게 하였다. 환송예배에서 한 달 생활비를 방 목사의 성경책 사이에 몰래 넣어준 교인도 있었다. 방지일 목사는“선교지에 가서 나는 그들로부터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받고 왔다”고 회고한다.
⑤ 부산에 도착한 방지일 목사 가족 딸 선혜, 아들 선주, 사모. 방지일 목사는 중국에서 낳은 3녀 선인이 생후 3개월 만인 1937년 7월 2일에 세상을 떠나 선교지에 묻는 아픔을 겪었다. 오른쪽은 취재 나온 기자. 방지일 목사는 칭다오를 떠나 홍콩에 도착하였는데 홍콩에서 마중 나오기로 한 분에게 보낸 전보가 늦게 배달되어 아무도 영접하는 이기 없었다. 인도 노무자 한 사람이 같이 나왔는데 인도 영사관에서 나와 그를 맞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 영사관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마침 장로교 총회가 열리고 있어서 총회에 가서 귀국 인사를 하고 부산 괴정동 공동묘지에 있는 선친 방효원 목사의 묘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⑥ 방지일 목사 자신의 선교수기가 담긴 ≪임마누엘≫ (1996년) 이 책에는 선교지를 떠나고 30여 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에 중국의 옛 교인들로부터 받은 편지들과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중국교인들이 겪은 고초도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은 2008년에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된 방지일 목사의 회고담 가운데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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