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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5.1  통권 137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2068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만능 교장 선생님 - 에드워드 밴드 선교사

28년간, 대만 타이난의 장로교중학교(長榮中學校)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한 에드워드 밴드 목사(Rev. Edward Band, 1886- 1971, 万榮華)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대만 교육선교에 헌신
1886년 1월 7일, 에드워드 밴드는 영국의 비컨헤드(Birkenhead)에서 태어났다. 1906년 케임브리지 여왕대학 (Queens College, Cambridge)의 수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비컨헤드중학교(Birkenhead School)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교사생활을 접고, 선교사의 꿈을 품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College)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교육선교사(Educational Missionary)의 길을 선택했다.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영국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해외선교사 지원 신청을 했다. 그 당시 26세라는 젊은 나이 때문에 해외선교부에서는 그를 해외선교사로 보내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대만의 타이난(臺南)에 교육선교사의 필요가 절실하였기에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한 해외선교부는 젊은 에드워드 밴드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에드워드의 형, 스티브 밴드(Stephen Band)는 에드워드보다 9년이나 앞서 광동(廣東) 산터우(汕頭) 서쪽에 살고 있는 커자인(客家人)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곳 교회학교는 스티브의 헌신으로 학생수가 500여 명(1905년)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1911년). 형이 선교지로부터 돌아오자 동생인 에드워드 밴드 목사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그 이듬해 선교지로 떠났다. 두 아들을 선교지로 보낼 때, 그의 아버지는 두 아들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러한 기도의 지지는 그들 형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에드워드 밴드도 그의 형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형처럼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웨스트 민스터신학교의 추천서에는“에드워드 밴드는 모든 분야에 뛰어나기에 선교현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능력까지 탁월한 젊은이”라고 추천소감을 밝혔다.

대만선교사로 부임
1912년 11월 17일, 그동안 일꾼이 없어 방치되어 있던 학교업무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되었기에 선배선교사들은 타이난에 도착한 에드워드 밴드를 기쁘게 맞이했다. 그러나 대만교사회는 그에게 교육 사역을 곧바로 맡기지 않고, 먼저 일본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도록 했다. 대만은 일본의 통치로 공식 언어인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일상 언어인 현지어도 배워야 선교활동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교육 사역이 긴박한 줄 알면서도 그를 선교현장에 투입시키지 않고, 먼저 일본에 보내 언어훈련을 시킨 것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만교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선교는 단기 사역이 아닌 장기 사역이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그는 장래 이전할 학교 부지를 돌아보고 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일들이 내 일생의 성공여부가 걸려있는 중요한 일이지만, 나는 마치 막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아서 이러한 사역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네. 고맙게도 선배선교사들의 많은 격려와 지지는 큰 힘이 되고 있다네. 이 사역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비록 내 능력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선배선교사들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걸세. 이를 위해 항상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네.”이 기도편지 속에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

대만의 유일한 전문인 교육선교사
1885년 9월 21일에 설립된 장로교중학교는 지금의 장영중학교이며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이다. 초기 교장은 에드 선교사(George Ede, 余饒理)가 역임했다. 그 뒤를 이어 캠벨(Rev. William Campbell, 1841-1921, 甘爲霖)·바클레이 목사(Rev. Thomas Barclay, 1849-1935, 巴克禮), 퍼거슨(Rev. Dliiican Ferguson, 宋忠堅), 페이런춘(費仁純), 롄더례(廉德烈) 등이 교장을 역임했다. 1912년, 제3대 교장으로 부임한 에드워드 밴드 목사는 1940년 영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28년간 이 학교에서 교장으로, 교육선교사로 섬겼다. 그는 역대 교장 중 부임기간이 가장 긴 교장으로 남았다. 에드워드 밴드 목사가 부임하기 전의 교장들은 모두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역의 중심은 교회의 성장이었다. 그러다보니 의료와 교육 사역은 교회 사역의 부수적인 사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만 사회의 발전과 선교 사역의 확장은 의료와 교육 사역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의료와 교육 사역의 전문성이 요구와 전문인 사역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밴드의 부임은 대만선교가 다양하고 전문화된 모습을 갖추고 성장할 즈음에 시기적절했다. 에드워드 밴드의 교장은 장로교중학교가 일본식민지 통치의 신사참배를 거절했다. 그래서 일본의 핍박으로 정식인가를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수는 매년 증가하였다.

에드워드 밴드의 교육이념
그는 교장으로 취임 한 후 학교재정 확보, 새로운 교사(校舍) 신축 등으로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는 교육에 투철한 사명감이 있는 우수한 교사채용을 최우선에 두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학교 운영방침을 언급한 적이 있다.“ 만약우리학교가공립학교와경쟁하기위해학교의외부적건물만 을 확장하고, 학교 본연의 설립정신을 잃어버린다면, 학교를 폐쇄시키는 편이 더 낫다.”고 썼다. 그의 교장 재임 중에는 적정의 학생 수를 유지하고, 교사의 수준과 종교교육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학교부지로 이전
교사 신축은 그가 일본에 가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공사가 미루어졌다. 에드워드가 돌아오자 학교 건축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어, 1915년 정월부터 학교 신축을 시작했다. 순조롭게 진행된 학교 신축은 그 다음해에 교실 2동, 기숙사 2동, 그리고 강당 1동이 완공되었다. 1916년 4월 12일에 새 학교로 이전을 마쳤다. 에드워드 밴드는 설계, 감독, 재정 등 모든 분야에 직접 참여하며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새 학교의 건축공사비로 5천 파운드가 책정되었다. 이 공사를 위해 학교 건축위원회를 구성하고 건축에 관한 모든 업무를 주관하도록 했다. 소수를 제외한 건축위원들은 모두 대만 크리스천들이었다. 이들의 후원금 모금으로 건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린마오성(林茂生)은 졸업생 중에 최초로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대만인 기독교청년이었다. 그는 후에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1916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고, 또 얼마 되지 않아 이사로 임명되어 학교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학교 건축을 위해‘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모금활동도 했다. 그의 후원금 목표는 5년 내에 만 위안을 모금하는 것이었는데 1926년, 마침내 목표금액을 달성했을 때 모금활동을 그만두었다. 

새 학교의 면적은 모두 11정보(町步: 넓이의 단위. 1정보는 3,000평으로 약 9,917.4㎡에 해당), 약 33,000여 평에 달하였다. 120명의 학생들에게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신축된 교사와 시설로 인해 학생들은 즐겁고 유익한 학교생활을 누렸다.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생활을 했고, 다섯 명의 교사가 휴일도 없이 학생들과 한 식구처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지도했다. 에드워드 밴드도 바쁜 교장 업무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수학 등을 가르쳤다.

즐거운 학교생활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수한 교사와 좋은 시설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한 에드워드 밴드는 좋은 교사들의 청빙을 위해 정성을 기울였다. 특히 이 학교는 자연과학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싱글톤(L. Singleton, 沈毅敦) 선생을 특별히 초빙하였다. 학생들은 싱글톤 선생님과 함께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학생들 스스로 치약, 비누, 향수 등을 제조하여 판매도 하였다. 이러한 실용적 활동은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향상시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에드워드 밴드는 대학시절 축구부 주장을 지냈을 정도로 스포츠마니아였다. 교장 선생님의 지지로 스포츠 열기는 대단하였는데 후에 이 학교는 스포츠로 유명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특히 축구부의 실력이 뛰어나 동서남북으로 바쁘게 원정시합을 다녔다. 시합 때 마다 거의 패하지 않고 승리했다. 1930년, 전국 축구시합이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그러나 마지막 결승전이 바로 주일날이어서 장로교중학교는 이 시합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합이 끝난 후 에드워드 밴드는 축구부를 인솔하여 단독으로 우승팀들과 시합을 했다. 그 결과는 5대 1, 2대 1로 우승팀과 준우승팀을 이겼을 정도로 그들의 축구실력은 뛰어났다. 

에드워드 밴드의 교육이념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전인교육이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은 그의 교육선교에 가장 기본이자 중요한 요소이며 힘의 근원이었다. 1924년, 선교보고에서 그는 성경말씀을 통해 자기의 교육이념을 천명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사랑하라.”(빌 4:8) 에드워드 밴드의 제자인 황우동(黃武東) 목사는 그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그의 스승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예의가 바른 영국신사이고, 목사이며 수학자이며 운동선수이고 종교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로는 에드워드 밴드 교장 선생님을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어서 학생들은 그를‘만능 교장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본이 된 것처럼 에드워드 밴드는 자기 스스로 전인격을 형성하여 학생들의 본이 되었고, 선교의 현장에서 기독교적인 전인교 육을 실행하려고 노력하여, 학생들의 눈에는 만능 교장 선생님으로 보였으니 그의 전인교육은 선교현장에서 아름답게 열매 맺었다.

가족적인 기숙사생활
에드워드 밴드는 학생들의 심신의 단련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기고, 기숙사 사감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 했다. 신앙이 투철하고, 열정적이어서 생활 속에서 학생들의 본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사감의 임무를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교장 선생님이 직접 사감을 임명하였다. 역대사감들은 교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교장을 도와 학생들을 신앙으로 잘 지도하였다. 에드워드 밴드 교장은 학교기숙사는 하나의 큰 가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가족적인 분위기와 기쁨을 맘껏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에드워드 밴드는 학생들의 영적인 생명을 매우 중요시 여겨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숙사에서 기도모임을 갖고, 에드워드 밴드 자신이 학생들과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며 인도한 기도회는 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도 했다. 에드워드 밴드는 학생들의 생활훈련도 매우 중요시 여겨, 학생들의 생활을 엄격하게 지도하였다. 학생들은 반드시 교내의 청소와 정원관리, 환경미화 등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도록 훈련시켰다. 그가 학교를 순시하다가 학생들 중에 잔꾀를 부리거나 열심히 하지 않을 때는 언제 어디서고 엄히 지도하여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에드워드 밴드의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육과 철저한 생활훈련 속에 자란 학생들은 힘들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일본 식민지 교육의 탄압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문화 정책에서 무력침략 정책으로 전환하여 대만, 한국 등 식민지역에 황민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1933년 봄, 일본은 한 신문에 장로교중학교가 일본 정부의 교육방침에 위배된다고 비난을 쏟아부었다. 에드워드 밴드 목사는 이 같은 비난과 탄압을 완화하고, 학교를 계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일본인 교장을 초빙하기로 했다. 1934년 일본인 교회의 추천을 받아 加藤長太郞(가등장태랑)을 교장으로 초빙하고, 본인은 평교사가 되어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학교의 각종 종교활동을 인도하며 설립목적을 지켜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후에 그는“학생들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성실하게 성장하기만 한다면, 나의 직위의 고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역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회고록에 남겼다. 그가 얼마나 학생들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자기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식민 정부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져 학교 내에서 어떠한 종교활동도 금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에드워드 밴드는 할 수 없이 학교 근처의 땅을 구입하여‘희망학사
(喜望學舍: 현재는 교사숙소로 사용)’를 세우고, 30명의 학생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하여 종교활동을 했다.

영국으로 귀향
1939년 6월, 영국은 미얀마를 통해 군대를 중국에 파병하였다. 일본통치 식민지역에서 반영(反英)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국 선교사들에게 핍박이 가해졌다. 더욱이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이 동맹국이 되면서 반영 운동은 더욱 열기를 띠었다. 대만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에드워드 밴드 목사는 1940년 11월 22일, 28년 동안 헌신하였던 대만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는 아쉬운 마음으로 대만을 떠났지만, 이 학교에 대한 믿음과 열망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 학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야.”위로를 받으며 영국으로 돌아갔다. 과연 그의 말처럼 5년이 채 안 되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리고 대만은 일본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고, 이 학교도 다시 자유를 회복하여 기독학교의 정신과 면모를 회복했다.


강인규 | 대만중원대학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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