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연수와 사역의 시작
‘니 하오(안녕하세요)’와 ‘씨에씨에(고맙습니다)’만 알고 중국에 용감하게 들어갔다. 처음 닥친 것이 먹고 사는 문제. 식당까지는 들어갔지만 음식을 시킬 줄도 계산할 줄도 모른다. 손님들이 먹고 있는 것부터 훑어 본 다음, 제일 맛있게 생긴 음식을 점찍어 점원의 옷소매를 끌고 가서 검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개수를 표시해 시킨다. 대부분 성공했지만, 실패한 적도 많다. 제일 맛있게 먹었던 단골 메뉴는 ‘위샹로쓰까이판’. 음식을 다 먹고는 100위안을 낸다. 거스름돈은 이미 동전으로 가득한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온다.
말이 서툴러서 실수도 한다. 집을 구해 놓고 물을 파는 상점에 가서 물 한 통을 달라고 한다. ‘워야오이통수이’ 점원은 화난 얼굴로 노려보다가 내쫓는다. 영문도 모르고 쫓겨나 이방인을 냉대하는 현지 점원을 원망어린 눈으로 한번 노려보며 다른 상점을 찾아간다. 다음날, 언어학교 선생님께 물으니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다고 한다. 발음은 같지만 성조가 달라 전혀 다른 뜻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내뱉은 말은 ‘당신과 자고 싶어요.’ 누구나 선교지에서 말이 서툴러 한번쯤 겪었을 장면이다.
언어학교에서 한학기가 지날 즈음에 형제 한명이 연결되었다. 기쁜 마음 반, 걱정 반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 형제는 자신의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잘 못 알아들어 눈만 껌뻑이면서 고개를 연달아 끄덕이며 내뱉은 말은 ‘스마?(그래요?)’, ‘션 더우 즈다오(하나님은 다 아세요)’였다. 20% 정도 알아들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한국말로 기도까지 해 주고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그 형제가 한 말들을 나름 정리하기 바빴다.
중국 사람이 일생 동안 못해 보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글자가 너무 많아서 다 못 써보고, 음식의 종류가 많아서 다 못 먹어보고, 나라가 넓어서 다 다녀보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큰 나라의 동서남북에서 훈련생들이 모였다. 2년 동안 언어연수를 마치고 훈련학교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소그룹 시간에 학생들은 모두 중국 표준말을 한다고 하지만, 지방색이 강해 못 알아듣겠다. 결국 한 형제를 통해 한 형제가 쓰는 중국말을 내가 알아듣는 중국말로 통역해서 모임을 진행했다. 기도는 짧고 간결하고, 때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하나님은 알아들으셨겠지만) 기도로 마쳤다.
주님의 홈런 한 방
한번은 훈련학교를 시작하고 2주일 만에 공안에 의해 학교 문을 닫아야 했다. 학교를 시작한 도시는 외지인들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고, 무시한다. 중국어 표준말 외에 자신들의 사투리가 따로 있어서 외지인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학교 건물로 얻은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변두리로 가격이 비교적 싸면서도 학교 건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3층 단독 건물이었다. 10개 정도의 방과 층마다 화장실도 딸려 있어 학교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위치였다. 변두리이기 때문에 단지 안에 외지인들이 임대해서 쓰는 건물은 단 두 채뿐, 나머지는 모두 현지인들이었다. 각 마을이나 단지 안에는 빨간 완장을 차고 다니는 치안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상시 의심의 눈으로 외지인들을 살핀다.
문간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예배나 강의 등 공식적인 모임 때는 당번을 정해서 살피게 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문간에서 지키게 했다. 그날따라 당번이 한눈을 팔았고, 문을 지키던 형제는 노크 소리에 예배나 강의 등 공식 모임 때는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서는 들리지 않던 우렁찬 예배의 찬양소리에 치안들은 건수를 올리려 들이닥쳤다. 어느 집회든지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으면 일이 커지기 때문에 강의 오신 목사님을 모시고 뒷문으로 나왔고, 함께 동역하던 한 선교사는 붙잡혀 있다가 1시간 만에 3-4m가 되는 2층에서 뛰어 내려 절뚝거리며 나왔다. 건물에서는 무사히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뒤에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되어 학교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사역자들도 염려가 되지만, 20여 명의 학생들이 상처받을 것이 염려되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뛰어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모든 어려움을 함께 하자고 거듭 강조해 왔는데, 그들을 버리고 나왔다는 죄책감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함께 빠져 나온 강사로 오신 목사님의 손에 이끌려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 일로 짐을 싸서 피난길에 올랐다. 40여 시간을 달리는 기차에 내 어려운 마음도 싣고 떠났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애썼지만 “이 나라 이 민족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리고 타지에 와서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돕는데, 이들은 왜 나를 핍박하는가?” 하는 질문이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이들에게 잘못한 것 하나 없고, 그저 이들을 위해 내 삶을 헌신한 것뿐이었다. 괴로운 마음에 이 나라와 민족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기차에서의 마지막 밤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위해 세상에 와서 내 모든 것을 주었지만, 너희들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주님은 언제나 옳은 말씀만 하신다. 결코 벗어날 수도 없다. 그저 무릎 꿇고 동의하고 마음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이 나라, 이 민족들,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깊어진다.
당신을 훈련시키겠습니다
훈련학교는 아침 5시 4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3개월간 강의로 진행된다. 보안 문제 때문에 모든 창문에는 못이 박혀있고, 커튼이 밤낮으로 쳐져 있어서 햇빛을 보는 것이 힘들다. 한사람씩 교대로 빨래를 널러 뜰에 나가 있는 동안 햇빛을 쬐일 수 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날 무렵이면 모든 사람들은 얼굴이 하얗게 빛난다.
1년에 두 번씩 열리는 학교에서 섬기는 스텝들은 쉽지 않은 삶을 산다. 그중에 한 형제는 아침마다 드리는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자신이 인도하는 예배만 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은 숙소에 가서 잠을 자는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날 무렵 마음을 먹고 강의 시간에 방에서 자고 있는 형제를 찾아갔다. 대화를 하던 중 그 형제는 “저는 이 학교에 당신을 훈련시키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대화를 마친 다음 숙소에 돌아왔다. 괘씸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이 형제를 어떻게 내보낼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2,3일이 지난 아침, 묵상을 하던 중 주님은 요한복음13장 1절을 통해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떠날 때를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는 말씀을 주시며 그 형제를 용납해 줄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 인내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며칠을 주님께 항변했다. 주님이 이기셨다.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그 형제를 찾아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오늘은 나만 말하겠다.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커녕 너를 용납해 주지도 않고, 끝까지 인내해 주지도 않았다. 네가 왜 그러는지를 묻지도 않고 그저 훈계만 했다. 용서해라.” 고집이 세고 자존심 강한 형제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옳은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 교회의 지도자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심하기를 모든 지도자를 바꾸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이어졌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학생 중에 상처가 많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던 자매가 있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매는 탄광촌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열 살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았다. 18살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는 바람에 동생까지 보살피며 살아온 자매였다. 학기 진행 중에도 많은 동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훈련을 받으며 전혀 변화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은 자매를 학교에 남겨 계속 돌봐줄 것을 말씀하셨기에 스텝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게 했다. 이 자매의 사랑의 언어는 자신이 화를 낼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해서 자신의 말에 반응해 주어야 되는 것이었다. 학기가 시작될 때부터 순탄치 않았다. 다른 스텝에게 말과 폭력으로 상처를 주는 것뿐 아니라,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 품으라고 하셨다. 일주일에 몇 번씩 찾아와서 괴성을 지르며 하는 말은 교장선생님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 안에 가엽고, 측은한 마음뿐이어서 반응을 해 주지 않은 것이 이 자매에게는 어려움이었나 보다. “나는 너에게 관심이 많고 네가 이 공동체에서 잘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다른 스텝과 싸우고 떠난다기에 두 주간의 휴가를 주었다. 휴가 후에 돌아오면 다시 받아주겠노라고 했다. 떠난 후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는 자매는 1주일 만에 돌아왔지만, 자신의 분에 못 이겨 인사도 하지 않고 3일 만에 다시 떠나버렸다. 아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후 1년이 지날 무렵 그 자매가 사는 곳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강의를 가게 되었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내가 온다는 말에 어린 동생의 손을 이끌고 만나러 왔다. 많이 바뀌어 있었다. 자매는 “저 많이 바뀌었어요.”라는 말로 시작해서 2,3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것은 말이나 가르침이 아닌 그저 묵묵히 인내해주고 바라봐 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그 자매의 변화를 통해 보여 주셨다.
아빠라 부르며 따르던 아이
허난성 한 도시의 가정교회에서 단기훈련을 시킬 때의 일이다. 단기훈련은 학교의 현지 스텝들을 훈련시켜 정식 학교가 쉬는 동안에는 농촌의 가정교회를 택해 그들이 직접 과목을 정하고, 강의도 스스로 준비하게 하고, 모든 진행을 책임지게 한다. 현지 사역자들의 지도자십과 강사로서의 자질을 계발하게 하려는 것이다. 가정교회 사역자들과 사역자 훈련생들이 학생으로 참여했다. 자기소개와 삶을 나누는 시간에 나눈 내용들은 글로 쓰면 각 사람마다 충분히 책 한 권을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중에 16살 된 여자 아이가 있었다.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님이 관심을 갖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아이였다. 매달 100위안(18,000원 정도)만 있으면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교회가 그 아이를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부모는 자신들과는 상관없으니 교회에서 먹고 자는 것까지 다 알아서 책임지라고 했단다. 결국 그 아이는 집에서 버려져 가정교회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내적치유 강의를 통해 그 아이 마음의 이야기를 내놓게 했을 때 그 마음 깊이 숨겨진 억울함과 두려움, 외로움, 상실감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간 여를 울었다.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는지 평온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도 되요?” 이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들어줄 수 있는 아빠였나 보다. 그 아이는 서로 멀리 있어서 만날 수는 없지만, 중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2년여 동안 자신의 거취를 문자로 보내와서 상의했다. 그 아이의 문자 메시지의 시작은 ‘아빠’였고, 마무리는 ‘아빠를 사랑하는 예쁜 딸’이었다.
떠나오며
사역지에 도착할 때부터 아내와 기도해오던 기도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제일 좋을 때 내려 놓는 것이었다. 사역이 제일 잘 되고 있을 때 내려놓는 것이었다. 잘 달리고 있는 차는 탄력이 붙어서 부품을 하나 교환한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교 사역과 교회, 대학생 사역이 안정되고 현지 지도자들이 세워져서 이제는 밤낮으로 뛰지 않아도 된다. 가정도 돌보며 조금의 여유를 가지고 사역해도 될 정도로 전체 사역은 안정되어 있었다. 훈련학교에 집중한 8년 동안 몸은 지쳐 있었고, 두 아이들이 클 때 띄엄띄엄 채웠던 아빠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 있었다.
기도하는 중에 급변하고 있는 중국과 열방을 향해 선교하는 중국을 위하여 사역을 하려면 사역자가 먼저 준비되어야 된다는 마음을 주셨다. 1,2년 사이에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기 보다는 변화 이후 펼쳐질 20년의 그림을 그리길 원하셨다. 아쉬움을 뒤로하며 떠나올 때, 한 현지 동역자는 735위안을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어 내게 주었고, 다른 지체들도 각각 봉투를 준비해 주었다. 이들은 한 달 공동 생활비인 100위안도 없어서 전전긍긍하던 지체들인데….
지난해 12월부터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올해 4월 정도 되었을까 중국말이 너무 그리워졌다. 1999년 한국을 떠나 6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 한국이 그립고,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리워 가슴이 저려 며칠 동안 괴로워했는데, 이제는 중국에 남겨 두고 온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보고 싶어 가슴이 저려 왔다. 그들과 중국말로 그동안 못 다한 말들과 지난 일들을 밤새도록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러면서 “나도 이제 중국 사람이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길
앞으로 진행될 세계선교는 중국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선교하는 중국이 준비되어지는 것을 돕는 사역이 앞으로의 선교 방향이 될 것이다. 중국 땅 안에는 신학교, 성경통독학교와 더불어 선교사 예비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받기만 하던 그들이 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선교하는 중국으로 가는 모든 행보에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권바울 |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