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 하나
깐수성 란저우에 사는 A는 동샹족 청년입니다. 동샹족 마을에서 살다가 대도시 란저우에 들어와 살면서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돈을 버는 청년입니다. 그런데 그는 중국어를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습니다. 나이가 20대 초반 밖에 되지 않았는데, 잠시 동안 다닌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중국어는 그에게 외국어나 다름 없었고, 결국 글자를 배우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간단한 말로 한족들과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글자 익히기는 너무나 힘든 과제입니다. 도시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활하는 그에게 있어 문맹은 단순히 독서를 못하는 것 이상의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삶에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시골로부터 송금을 받을 때도, 송금해 줄 때도 그는 스스로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아파 병원을 가도 안내 표지를 읽을 수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받아 들고도 무슨 병명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무어라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금방 까맣게 다 잊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집 계약서에 아무렇게나 서명을 했다가 몇 년 동안 절약하며 고생해서 벌었던 돈의 상당 부분을 사기당하기도 했습니다. A는 매일 퇴근후 집에서 아내와 자신의 모어인 동샹어로 하루의 일과를 나누지만, 동샹말로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실에 한숨만 나옵니다. 나는 왜 한족이 아니고 동샹사람으로 태어났는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이야기 둘
쓰촨성 간즈주에 사는 B는 작년 가을에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B가 사는 마을은 향급 마을이어서 초등학교 저학년 반이 있습니다. 그 말은 B는 먼 거리를 다니지 않아도 초등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B는 초등학교에 가는 길이 마냥 즐겁지는 않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B가 집에서 가족들에게서 배우고 접했던 유일한 언어였던 M어(T언어의 분파)는 학교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보통화로 수업을 하고, 책도 보통화로 적혀 있습니다. 중국어를 읽기는 커녕 말도 하지 못하는데, 선생님은 그 중국어로 수학도 가르치고 과학도 가르칩니다. 국어시간은 아예 선생님이 하시는 발음대로 책을 그대로 외워버려야 겠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책을 외우기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게다가 집에서는 부모님과 할머니가 중국어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분들은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고도 지금껏 잘 살아왔으니까요. 그래서 B는 학교에 가기가 싫습니다. 학교에 가서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업을 듣고 있느니, 차라리 들판에 가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지금 다니는 학교는 저학년 과정 밖에 없어서 4학년부터는 1시간을 걸어서 진에 있는 더 큰 학교까지 가야합니다. 하지만 B와 B의 부모님은 그 먼 학교에까지 가서 공부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B와 B의 부모님은 M민족의 전통을 잘 지키고 이어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셋
광시성에 사는 C는 최근에 기독교에 대해 소개를 받았습니다.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미국인 선생님으로부터 영어공부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흥미가 생겼습니다. 이미 기독교인이 된 친구와 함께 성경공부에 참석한 자리에서 C는 선생님의 인도를 따라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중국어를 대단히 잘 하지는 않지만, 유머가 많고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설명을 잘 해주는 참 좋은 분입니다. C와 같은 좡족 청년들이 대다수인 성경공부 모임에서 그들은 모두 중국어로 책을 읽고 나눔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없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는 시간에는 모두가 좡어로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래도 중국어보다는 좡어가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만약 성경이 좡어로 적혀있고, 성경공부를 좡어로 하고, 좡어로 기도하고, 좡어로 찬양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고 C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보니 좡어를 쓰고 있는 이웃 마을에 어떤 외국인이 와서 보통화로 기독교를 소개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사람의 중국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만 했지, 그가 소개했던 기독교의 내용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를 하지는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C는 그 사람이 만약 좡어로 기독교를 이야기해 주었다면 마을 사람들이 훨씬 잘 이해하고 잘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국 소수민족의 이중언어교육 현실
중국의 소수민족들을 하나의 색깔로 규정할 수는 없다. 각 민족의 상황이 다르고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류 민족에 해당하는 한족으로의 동화가 많이 진행된 민족이 존재하는가 하면, 동화를 거부하고 여러가지 형태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민족도 존재한다. 중국 정부가 표준어 교육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고 대부분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지만, 아직도 몇몇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교육의 효과가 그리 좋지 못하다. 지리적으로 너무 고립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는 학교나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정부의 장려 정책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립된 내륙의 소수민족 지역에서 기꺼이 일할 교사도 부족하고 그 지역의 소수민족 사람들의 교육열은 도시만큼 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한족화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고수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자녀교육에 반영되기도 한다. 최근 모 국제단체의 연구 결과를 보면, 중국 내 소수민족 언어 가운데 한족화(한화) 되지 않고, 다음 세대에서도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나갈 것으로 보이는 그룹은 광시성, 꾸이저우성, 윈난성, 쓰촨성, 깐수성, 칭하이성, 닝샤회족자치주, 네이멍구자치주, 신장위구르자치주, 시장자치주 등의 지역에 걸쳐 최소 100개 이상이며 2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중국 정부의 보통화 교육정책에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교전략에도 중대한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아직 복음화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미전도종족 중 대다수는 중국어로 적힌 성경과 보통화로 전해지는 복음의 메시지로는 충분히 복음의 본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우리의 사역 대상이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데 우리가 우리에게 편한(혹은 편리한) 언어만을 고집한다면 그런 자세 자체가 복음 전파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사역의 상당 부분의 에너지를 소수민족들의 언어에 접근하는 것에 써야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모어의 중요성
언어는 인간의 삶에 있어 문화와 철학,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세계관과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모어(mother tongue)는 한 인간이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접하는 순간부터 익힌 언어로서, 그 사람의 정체성의 근간에 흐르는 언어다. 태어나면서부터 습득한 언어(acquainted language)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학습된 언어(learned language)가 있다. 이는 학교에서 학업을 위해서든 시장에서 생계를 위해서든 여러 경로와 목적으로 익힌 언어를 말한다. 이런 언어를 제2언어(second language)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제2언어는 국가 공용어(national language)나 지역의 교역어(trade language)인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는 보통화(普通話)나 지역의 한어(예를 들어, 쓰촨화, 윈난화, 광동화, 푸젠화 등)가 그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제2언어가 모어의 위치를 대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모어에는 단순히 어휘 몇 개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식의 언어 지식이나 언어 능력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어 안에는 가장 친밀한 정서적 안정감이 존재하고, 모어를 통해서 세상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며, 모어를 사용할 때 그 사람은 참으로 본래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모어에는 커뮤니케이션 이상의 힘이 있다. 중국에 있는 소수민족에게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미 한족화된 민족의 경우 그 민족 정체성의 변화가 그들의 언어 사용에 있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반대로 자신들의 언어를 고수하고 동화되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민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에게 보통화, 즉 제2언어는 비즈니스나 의사소통 등의 특수한 목적을 위한 언어 이상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한다. 가장 그들의 삶에 와 닿고 피부에 느껴지고 가슴으로 이해되는 언어가 있는데, 보통화는 그러한 모어의 역할을 대체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언어를 인간에게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람어를 사용하여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설명하셨듯이, 중국에 있는 소수민족들을 위해서도 편리한(혹은 편리한 것처럼 보이는) 보통화를 강요하며 복음을 보통화로만 전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삶 속에까지 낮아지는 성육신의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또 하나의 언어를 익히고, 그 언어로 복음을 전달하는 일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모어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육신의 절정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어야 말로 그들이 복음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소수민족 언어 성경번역의 필요
로버트 모리슨이 중국어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 1807년 이후, 중국교회는 인간의 가르침이나 외국인 선교사의 교훈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든든히 세워져왔다. 지난 200여 년의 중국교회사 가운데 성경은 추방당하지도 않고 문화적으로 이질적이지도 않으며 온갖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현지인의 마음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을 소개해 주는 최고의 선교사였다. 한국교회가 말씀의 기초위에 세워졌듯이, 중국교회도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중심 삼고 세워진 교회다. 하지만 그러한 성경 중심의 교회는 지극히 한족의 세계, 즉 보통화를 읽고 쓸 수 있는 담장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중국어 보통화의 담장 너머에는 아직도 그들의 언어로 적힌 성경도 없고 기독교의 중요 개념들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해 낼 적절한 단어도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어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왕 선교사의 사역이 자신들의 선교사역을 편하게 수행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문화적 지리적 상황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앞에 순전하게 반응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라면, 중국 안에서도 소수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절대로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다. 공식적으로 55개 민족이 존재하는 중국이지만, 실제로 언어 문화적으로 민족을 구분해보면 대략 300개 정도에 이르며, 그중 최소한 몇 세대 동안 절대로 언어가 보통화에 동화되지 않아 그들의 언어로 성경의 번역이 필요해 보이는 언어도 최소 100개 이상 200개까지 이른다. 그들은 그들의 말과 그들 언어의 친근한 표현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독교는 히브리어의 종교도 아니고, 헬라어의 종교도 아니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의 언어로 번역되어 그들의 가슴을 깊숙히 울리는 언어로 말씀하시는 복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으며, 예외가 없도록 해야 한다. 모든 사역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일을 위해서도 사람이 필요하다. 단체를 막론하고 소속을 초월하여, 여러 단체 여러 사역자들이 이 일을 위해 협력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만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야 한다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들의 언어로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경우에 따라서는 생계와 생존의 위협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류 사회로부터의 소외, 즉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활의 불편이나 위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족 중심의 중국 사회로부터 경제적,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소외되는 위치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문맹인 이유를 그들이 무식하거나 게으르거나 계몽이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마치 이땅의 수많은 미전도종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라고만 말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미전도종족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이며, 우리가 한 걸음 더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에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그 한걸음이 중요하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들의 언어를 익혀서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해결 방법을 한 마음으로 모색하는 일이 필요하다. 산을 넘어야 한다면 산을 넘어가서라도, 시간이 걸린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한다면 에너지를 들여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들에게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쪽, 즉 중국어의 세계, 한족화의 세계, 문명화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이 우리로서는 편리할 수 있지만, 그들 민족으로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는 그들의 문화와 언어와 정체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마지막 날에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 당당한 하나의 언어 민족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한다.
강산 | 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