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지난 8월 11일, 한성교회에서 ‘한국 화교교회 1세기(一世紀)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한국 화교교회 100주년 기념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서 본지의 필진으로 수고해 주시는 강인규 교수님께서 ‘여한중화기독교회(旅 韓中華基督敎會) 100년사’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셨다. 그 발표 내용을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정리를 함으로써 여한중화기독교회의 10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자 한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인 한국에 정착한 화교교회를 지난 100년 동안 친히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한국 화교교회 설립을 위한더밍 부인의 노고를 기념하고자 한다.
중화기독교회 설립 과정
일찍이 중국과 한국은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었다. 여한중화기독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중요한 선교사가 바로 ‘더밍’ (Mrs. C. S. Deming)이라 불리는 미국감리교 소속 선교사였다. 더밍 여사는 1884년 저장성 금화부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어렸을 때 중국인의 영향을 받아 중국선교를 결심했고 성장한 후 영국침례교 소속 선교사인 요명도(Rev. Joseph Samuel Adams) 목사와 결혼하여 일찍 중국선교를 시작했다. 원래 윈난에서 선교하려 했으나 장애에 부딪혀, 난징(南京), 우창(武昌), 안칭(安?)을 거쳐 저지장성 진화(金華)까지 이르러 그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때 이곳에서 더밍 여사가 태어났다. 이후 요 목사는 한커우(汉口)에서 전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50여 년이 흐른 후였다. 더밍 여사는 16세에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후에 미국에서 정착하였다가 한국선교를 원하는 미국인 더우이밍(都伊明) 박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더밍 여사는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 사역을 해야 했다. 이런 변화를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1911년 9월, 인천에 도착한 더밍 부부는 그곳에서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한국에 온 첫 날 집수리를 하려고 사람을 불렀는데 뜻밖에 중국인 목수를 만났다. 이를 본 더밍 여사는 매우 기뻤고 하나님이 한국으로 부르신 뜻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화교는 약 17000여 명, 그중 2500명이 서울에, 1500명 정도가 인천 제물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화교들 중에 기독교인은 약 천 명 중에 한두 명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을 본 더밍 여사는 화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더밍 여사는 서울에 화교 기독교인이 한 명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 그 사람이 바로 한의사 처따오신(車道心) 이었다. 그는 헌터 코버트(Dr. Hunter Corbett,1835-1920) 박사가 산동에 개척한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는 20년 전 서울에 와서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미국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8-1932) 목사의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한국어도 배우며 한국인과 결혼했다. 그는 혼자 화교교회를 세우는 것은 역부족임을 알았다. 그렇지만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복음 전하기를 잊지 않았다. 아울러 누군가 와서 복음사역을 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더밍 여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그가 바로 자기가 찾던 사람임을 직감했다. 어느 날 오후 그를 집으로 초대해 화교들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나누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간증하자 처따오신은 감동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첫 만남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화교교회 설립을 위해 의기투합 했다. 마침 왕싱바이(王星白) 군이 영국성서회 백 목사와 함께 베이징에서 서울로 성경판매를 위해 왔다. 그는 화교들은 많으나 교인이 적은 것이 바로 목자 없는 양 같이 보였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더밍 여사와 처따오신을 만나자 매우 기뻐하며 두 사람을 격려하고 화교교회 설립을 서두르라고 독려했다.
더밍 여사와 처따오신은 한국기독교청년연합회(YMCA)에서 방을 빌려 1912년 5월 첫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랫동안 염원했던 화교복음화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날 예배에 참석한 신도는 모두 10대에서 30대 사이의 남성이었다. 이들은 모두 처따오신이 전도하여 참석한 사람들이었다. 첫 예배에서 설교하던 처따오신의 목소리는 긴장과 감격으로 인해 연신 떨렸으나 몇 주가 지나자 용기와 믿음으로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석한 인원이 얼마 안 되었으나 열심을 내어 전도하자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두 번째로 드리는 예배에서 당시 YMCA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던 베이징 사람 왕신푸(王新普) 선생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는 나중에 베이징에 돌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여한중화기독교회의 첫 열매가 되었다. 20년 전 한국에 와서 식당을 개업한 왕춘톈(王春田)도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의 발전
YMCA에서 예배드린 지 반년쯤 지났을 때 모두들 자신들만의 예배장소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1913년 정월 초하루 교우들은 더밍 여사의 집에 모여 신년을 축하하면서 교회 건축과 목회자 초빙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응답은 신속히 이루어져 서소문에 위치한 대사관 주방장인 푸저우(福州) 사람 톈웨이안(田?安)의 건물을 임대했다. 임대료 월 15원은 교우들이 자원하여 헌금하였다. 이렇게 하여 음력설에는 새로운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모두들 사기가 고조되었다. 여한중화기독교회가 서양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개척된 것이 아니라 자립, 자전, 자양의 ‘삼자(三自)’ 정신에 입각하여 시작되었다. 근대 중국교회는 교회건축, 목회자 사례비 및 운영비 등 거의 모두 서양선교회의 원조로 유지되었기에 더욱더 의미가 크다. 중국 자립교회의 등장은 1906년에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한중화기독교회는 1912년 설립 당시 이미 자립교회였으니 정말 의미 있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가 설립되자 산동장로회 리커봉(李可鳳) 목사를 초빙하였다. 1913년 4월 초대 목사로 취임한 후 리 목사는 길가에서 놀고 있는 화교자녀들을 보고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초등학교를 세웠다. 산동성 라이저우(萊州)에 있던 미국침신회 신도 쑨빙얜(孙炳炎) 형제가 교사로 부임하여 예닐곱 명의 어린이를 가르쳤다. 그러나 리 목사는 산동에 가족을 두고 홀로 한국에 왔기 때문에 1년이 채 못 되어 돌아갔다가 산동장로회 노회의 파견을 받고 다시 여한중화기독교회에 목사로 취임하여, 1913년 11월 둘째 주일 입당과 취임 감사예배를 드렸다. 한국, 일본, 서방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축하하였다.
1913년 4월, 여한중화기독교회는 목사 초빙에 이어 뜻밖에 훌륭한 동역자를 얻게 되었다. 4월 초 더밍 여사는 인천 중국총영사 장쥔홍(?君?)의 부인이 중국 쑤저우(蘇州) 웨슬리회(감리교단) 신도라는 말을 듣고 동역자들과 함께 심방을 갔다. 장 여사는 이미 그곳에서 교육사역을 하고 있었다. 총영사 부부와 부인의 동생 천(陳) 선생은 이미 화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총영사는 한림학사로서 교육 사업에 투신하여 부부가 각각 매일 세 시간씩 가르치고 있었다. 대부분 여학생이었는데 이들은 학교에 올 때 전족을 하고 왔다. 장 여사는 매일 아침 욕실에서 그들의 전족을 풀고 발을 씻겨주었다. 이런 일이 십여 일 동안 계속 반복되자 학부모들은 그만 전족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장 여사는 가정을 심방하고, 그들의 생활습관을 개선하도록 권유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의 좋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1913년 4월 12일은 교회가 설립된 지 일 년 만에 첫 세례식이 거행된 중요한 날이다. 일곱 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중 장 여사의 딸도 있었다. 장 총영사는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부인의 전도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다. 첫 열매를 거둔 후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났다. 1915년 봄에는 세례교인 1명, 등록교인 13명, 새신자 10여 명, 그중 여신도 6,7명 등 매주 예배 참석인원이 3,40명에 달했다. 교회 창립 후 3년 만에 예배 참석자가 3,40명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1907년에 일어난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이 곳곳마다 교회들을 각성하게 하였고 당시 여한중화기독교회도 그 영향으로 주일 오후마다 전도하였다. 더밍 여사는 한국여선교사총회 연설에서 당시의 뜨거웠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매주 주일 오후 2개 구역의 교우들이 교회에서 기도회를 한 후, 2인 1조로 흩어져 소책자와 전도지를 나눠주며 전도하고, 밤에 다시 교회로 돌아와 그날의 느낌과 경험들을 나누었습니다. 아주 작은 소모임에 불과했지만 모두 진심과 정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흘린 땀 한 방울과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 재정
여한중화기독교의 재정은 본회 교우헌금, 화교후원, 서양인후원의 3개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중국교회와 확연히 다른 화교교회만의 특징이다. 당시 중국교회는 재정의 대부분을 서양선교회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한중화기독교회는 원칙적으로 자립교회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서소문에 예배당을 빌릴 당시 매월 임대료 15원을 모든 교우들이 자진해서 헌금한 것이 좋은 예다. 서양인이 한 헌금은 더밍 여사의 어머니 아담스 부인의 헌금이었다. 당시 중국 한양(汉阳)에 계셨던 아담스 부인은 교회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헌금하셨다. 특히 교회가 막 창립되었을 때에는 4개월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후원하셨다. 어머니 외에도 주한선교사들의 특별 후원과 각 선교회의 후원도 있어 매년 수입이 약 1200원에 달했다. 그러나 예배당이 교회 소유 건물이 아닌 까닭에 임대료는 계속해서 재정적인 부담이 되었다. 또한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에 불편하기도 했다. 교회 창립 당시 YMCA를 빌려 사용하다가 6개월 후 서소문의 새 건물로 이사했다. 1915년 10월 위신민(于新民) 목사가 리커봉 목사를 이어 부임한 지 1년 후 학교 공간이 부족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고 1년 후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5년 동안 네 차례나 이사를 다녔으니 당시 개척교회의 어려움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밍 여사는 화교(華僑)복음사역을 위해 공간을 더 넓힐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1913년 한국여선교회총회 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와 학교, 화교기독청년연합회로 사용할 새로운 건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여가시간에 쉴만한 공간이 없습니다. 저녁에 쉬면서 영육을 재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고 싶습니다. 서울에 사는 중국인들이 모두 알 만한 장소에 우리 소유의 건물이 있어서 오랫동안 냉대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위로 받을 곳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면 이 소수의 성도들이 부단히 성장함을 보고 성령께서 조용히 우리 가운데 일하심으로 인해 기뻐할 것입니다. 때때로 크고 작은 고난을 만나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강해지고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교회의 청사진은 예배드리는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사회에 봉사하고 연약한 지체들을 보살피는 곳이었다. 그의 기도는 머지않아 현실로 응답되었다. 1918년 10월 중순, 교회는 건물주 천(陈) 씨로부터 계약기간이 곧 만료되었으니 이사를 가든지 매입을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재정상황은 열악했었지만 교회는 매입하기로 결정했고 더밍 여사는 모든 교우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
더밍 여사는 기도하면서 각 교회에게 후원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1917년 봄, 더밍 여사는 건축헌금 모금을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2월에 어머니와 치바이먼(戚伯门) 부흥사를 모시고 텐진, 지난, 영파, 상하이 등 중국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1918년 치 부흥사는 서울에서 부흥회를 시작했고 당시 왕공원(王公温) 선생이 성령의 감동으로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다. 1919년 4월, 더밍 여사는 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동분서주한 결과 각계각층의 관심과 후원을 얻어 마침내 서소문 건물을 매입했다. 이로써 진정한 중화기독교회의 예배당이 생기게 되었다. 전재천 선생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늘 서울을 유람하다가 서소문에 있는 넓은 화교교회를 보았다. 예배당 뿐 아니라 목사 사택과 소학교, 그리고 부설 유아원도 있었다. 지붕에 정원을 만들어 멀리서도 잘 보이고 문가에서 책을 읽고 신문도 보며 복음을 논할 수 있으니 이는 아름다운 이들의 연보요, 중국 벗들의 노력의 결실이구나.
더밍 여사가 5년 전 시작한 기도가 마침내 아름답게 이루어져, 그녀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었고, 한국 화교교회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교회 건물이 생긴 이후 한성교회는 안정적으로 발전하였고, 더밍 부인, 처따오신 장로, 왕공원 집사 등 모두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써 10년 만에 세례교인이 약 50명이 되었고, 헌금 수입도 월평균 60원에 달하게 되었다. 교우들이 설립한 복음건축소 직원들은 수입의 십일조로 매년 500원에서 2천 원 정도를 헌금했고 1927년에는 3천원까지 헌금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교회학교
명말청초 천주교가 중국에 유입될 당시에는 서양과학기술을 매개로 전도하여 상당히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올 때에는 교육, 의료, 구제 등을 통해 전도했고 선교전략 또한 매우 진보하고 다원화되었다. 여한중화기독교회도 이러한 시대적 조류와 방식을 수용하여 예배당을 지어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교회 부설 학교, 청년회 등을 조직하여 화교자녀들을 교육했다. 특히 교회학교 운영은 복음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고 화교사회에서도 지지를 많이 받았다. 한성교회 창립 당시에는 YMCA의 방을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공간과 인력이 부족하여 교회학교를 세울 수 없었다. 이듬 해 새로운 장소를 빌려 이사하고 리커봉 목사를 초빙했을 때 이 목사는 아이들이 공부할 학교가 없는 것을 보고 미래의 일꾼 양성을 위해 교회 부설 소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학교설립 동기와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도사로 부임한 후 교민 자녀들이 거리에서 할 일 없이 놀고 있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앞으로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되기 어렵겠다고 여겨 소학교 설립을 건의했다. 모두들 이에 동의했고 즉시 학교를 세웠다. 학생은 6,7명이었다. 산동 라이저우에서 미국침신회 소속 쑨빙얜 군을 교사로 모셔왔다.
리 목사는 산동 광문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교육의 부재는 곧 좋은 일꾼의 부재를 뜻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에 교회 동역자들과 의논하여, 한국 최초로 화교교회의 초등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갓 설립되었을 당시 학생이 예닐곱 명에 불과했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여한중화기독교회의 특색을 잘 나타냈으며 이후로 화교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부설 유치원과 소학교도 같이 세워지는 모델이 되었다. 당시 한국화교사회에는 교회학교이외에도, 화교총상회(華僑總商會), 광동상회(廣東商會), 남방상회(南方商會)등이 설립한 중국인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들 모두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아 학교를 세웠으나 경영상 많은 문제점에 봉착하여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1913년 화교총상회는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 30명을 모집하고 교사 2명을 초빙했다. 그러나 교사들이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지도 잘 몰랐고 학생들이 교회학교에 가기를 원하여 학교는 문을 닫고 말았다. 남방상회도 학교를 세우고 교사를 초빙했지만 교사의 심리적인 문제로 결국 학교 문을 닫게 되었다. 사실 학교 설립은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져야 효과적인 교육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다. 마침 교회에는 학교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갖추어졌고, 또 사랑과 책임감 있는 교사들이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상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다. 교육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필자의 생각도 학교에서는 교원인력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화교학교가 운영상의 위기에 직면한 이때 교회학교는 꾸준히 학생들이 늘어나 오히려 수용이 불가능해졌다. 더밍 여사는 1913년 한국여선교회총회에서 교회학교를 시작한지 1년도 채 안 되어 학생들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고 보고하였다.
1927년 『중화기독교회연감』의 저자 전재천이 한국으로 파송되어 한성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 부설 소학교에는 호강대학(?江大?)의 왕지커(王吉科)선생이 재임하고, 학생은 모두 29명(여학생 14명, 남학생 15명)으로 성장하였다. 유치원에서는 남녀 각 3명, 15명의 아동들이 톈웨이주칭(田魏竹青) 여사와 천슈잉(陣秀英) 여사가 보살피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교회학교는 화교 자녀 양육과 화교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며 안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시들지 않는 선교의 열정
더밍 부인은 1912년 여한중화기독교회를 서울에 설립하였다. 이 지면의 한계 상 언급하지 못했지만 더밍 부인은 인천중화기독교회와 평양교회를 개척하는데도 참여하였다. 1929년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17년 동안 여한중화기독교회를 충성으로 섬겼다. 중국인 목사들은 겨우 1,2년 정도의 짧은 재임기간이어서 실제적인 선교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어려운 상황인 반면에 더밍 부인의 17년이라는 장기간의 섬김은 그가 여한중화기독교회의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29년 더밍 부인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몇 년 후 다시 중국으로 파송 받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중국이 사회주의화 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 은퇴를 하였다. 그녀가 보여주었던 중국선교를 향한 열정은 오늘날 젊은 선교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리라 믿는다.
강인규 | 대만중원대학 교양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