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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2  통권 132호  필자 : 강산  |  조회 : 2654   프린트   이메일 
[중국의 미래]
중국 소수민족 성경번역을 위한 협력의 필요

기독교는 번역의 종교다
원본을 고수하지 않고 기꺼이 타문화 타언어로 번역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종교 기독교는 본질에서부터 선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은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면서 말했던 그 언어, 그 발음을 최고의 것으로 여겨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고, 그 메시지의 본래 의미를 따라 각 나라와 민족과 언어 상황에 맞게 번역하여 언어의 장벽에 갇히지 않도록 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이런 점에서 아랍어 문자와 발음을 신성시하는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성경번역의 역사와 함께 가는 것이고, 기독교의 역사는 번역을 통하여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없이 전파되도록 했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중국에서의 복음의 역사도 성경의 번역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또 다른 성경번역의 현장 가운데서 또 다른 선교의 시작을 여전히 직면하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소수민족들 가운데서는 그들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고, 그들의 마음에 와 닿으며 충분히 이해되는 언어로 적힌 성경이 없어 복음의 진척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이 글에서는 현재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성경번역의 필요와 현황을 살펴봄과 동시에, 소수민족 선교를 위한 협력의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는 자칫 현장에서 생각하지 못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의 문제이며, 동시에 보다 효과적으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선결조건이기도 하다.

소수민족 언어 성경번역의 필요와 현황
중국은 1949년 사회주의 체제로의 통일 이후, 국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전 인민에게 보통화(普通話, 중국어 표준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에게 보통화를 이용한 초중등 과정을 의무교육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국민들이 보통화를 사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근거로 중국에서는 보통화가 모든 소수민족을 막론하고 사용되고 있으며, 더 이상 소수민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이는 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주장이기도 하다. 지난 수십 년간 전 국민의 기본 지식 능력 강화를 위해 정부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상당히 많은 소수민족들도 보통화로 읽고 쓰는 것을 익혀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지역과 민족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학교나 교사의 부족, 경제적 어려움, 강력한 민족 정체성, 지리적 고립 등을 그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은, 비록 초등교육을 받아 보통화를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에게 더 친숙하고 마음을 울리며 감동이 되는 언어, 즉 모어(母語)가 상당히 많은 소수민족들 가운데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본래 메시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뜨겁게 반응할 수 있는 언어는 바로 그들의 모어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어의 위치는 그 민족이 완전히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보통화가 대치할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한자를 읽고 쓰고, 또 기본 생활에 필요한 수준의 보통화를 말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모어성경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민족 정체성이나 모어의 역할을 상당 부분 오해하거나 무시하고, 단순히 외부인 사역자가 또 다시 번역의 작업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필요에 따라 지난 세월 중국기독교가 성경번역을 진행해 왔듯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민족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왔다. 경우에 따라서 번역과정 중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하고, 1949년 공산화 이후 성경 사용에 대하여 외부로부터의 극심한 통제를 받기도 했다. 번역된 성경 중에서도 실제 사용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몇몇 소수민족 지역에서는 오랜 역사 가운데 그들의 문자와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소수민족은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할뿐더러, 이를 위해 일하는 일꾼 역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일부 통계에 의하면 중국 내 소수민족 언어들 중에서 성경번역 작업이 필요해 보이는 언어의 수는 200-300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 언어의 수는 주변의 다른 언어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독자적 언어이며, 동시에 향후 몇 세대 안에 소멸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언어들이다. 비록 그들 중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언어로는 성경도 없고 찬송도 없으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부를 호칭마저도 없다. 이상의 200여 개 언어들은 주로 광서성, 귀주성, 운남성, 사천성, 감숙성, 청해성, 내몽골, 신장, 서장 등에 분포되어 있다.

협력의 필요 - 선교사들 사이의 협력
중국 내에 여전히 존재하는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은 이 세대의 선교사들이 끌어안아야 할 남겨진 과업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러한 남은 과업을 완수(Finishing The Task)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협력(partnership)이다. 특히 사역자들 사이의 협력은, 각 개인들의 사역적 정보와 노하우를 나눔과 동시에 각자의 필요에 대한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삼위가 함께 동역하셨던 분이시며(요 17:1-4), “형제의 동거함”을 선하게 보시고(시 133:1), 삼겹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듯이 서로 협력하여 일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전 4:7-12). 그런데 우리 한국인 사역자들은 ‘동역’, ‘팀사역’ 혹은 ‘동업’을 실패의 지름길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결국 사역적 폐쇄성을 낳게 되고, 소수민족 지역 같은 개척지역에서 수십 년간 사역적 노하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보가 유통되지 않고 일부에게 독점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정보가 공유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선교지에서의 중복투자가 일어나게 되고, 사역자들 사이에서 접근 전략의 충돌이 발생되기도 하며, 급기야 선교사들끼리의 갈등과 반목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의 저력과 믿음의 유산이 후대에 계승 발전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안타까움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최근에 어느 국제단체에서는 포괄적 계획수립(Comprehensive Planning) 이라는 협력의 제안을 내놓았다. 이는 특정 소수민족 지역을 대상으로 일하는 사역자들의 경우, 국적과 민족, 소속단체와 교단을 막론하고 서로의 정보와 힘을 모으자는 제안이며, 특별히 성경번역을 위해 필요한 일체의 서비스를 그 단체에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완수함에 있어서, 그 지역이 누구의 사역지라거나, 어느 단체가 주도를 해야 한다거나, 누구의 이름이 그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자는 제안이다. 동시에 공통의 목표와 공통의 비전을 위해 모두가 일정 부분을 양보하고 모두가 일정 부분의 수고와 고통을 나누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협력은 기꺼이 손해를 보겠다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가능한 것이며, 그런 형태의 협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협력의 성과물, 즉 시너지(Synergy)가 발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부 지역에서는 정보를 공유하고 공통의 전략을 세우기 위한 모임들이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상당수의 소수민족 사역자들 사이에서 협력은 요원한 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성경번역의 과제, 그리고 언제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고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는 현실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선교사들의 전략적 협력이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서로의 전략을 한 방향으로 수정하며, 그들이 진정으로 복음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강구(講究)해 나가야 한다. 이는 단체를 막론하고 소수민족 지역에 대해서 연구한 성과를 나누며, 언어연구에 함께 참여하고, 성경번역 과정에 한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한 학문적 지원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지 않은가. 성경번역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 믿음의 사람들을 양육하고 교회를 세우며 현지인들의 건강한 지도력을 만들어주는 일은 여러 다양한 단체, 다양한 사역자들 사이에 협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영웅처럼 뛰어난 개인들이 전설적인 활약으로 사역을 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평범한 자질을 지닌 평범한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동역의 정신과 섬김의 정신을 따라 협력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교현장에서 드러낼 때가 바로 지금이다. 협력! 협력! 협력만이 살 길이다! 그것이 선교사 자신들을 위할뿐더러 선교지의 바로 그 민족들을 위해서 해야 할 중요한 선결 과제이다.

협력의 필요 - 중국교회와의 협력
중국기독교의 주인은 당연히 중국교회다. 외국인은 일시적인 조력자요 좋은 친구일 뿐, 결국 중국교회가 중국의 기독교를 이끌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 착각하면 안 된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왕 노릇하는 패러다임은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제국주의적 선교 시스템이며, 심지어 성경적이지도 않다. 중국의 소수민족을 섬기며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 가운데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그 주도권은 중국교회가 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국교회의 사명이요 중국교회에게 주신 사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 외국인들이 소수민족 사역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개척 단계에서 일시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이다. 한시적인 사역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적으로만 들릴 수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교회가 그럴 수 있는 저력이나 의지가 있느냐”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럴 능력도 없는 어린 아이에게 너무 막중한 일을 맡긴 채 떠나버리거나 방관만 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도 그리고 맡은 일에도 모두 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중국교회의 역량을 키워주고, 중국교회가 소수민족 사역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해야 한다. 사실 중국교회가 중국 안에 있는 소수민족 선교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할 의지나 역량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역시 전략적 협력과 동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교회의 전략적 동참도 없었고, 한국인 선교사들과 중국교회와의 협력도 없었다. 모두 각기 따로 따로 자기의 사역만을 해 왔던 것이다. 동시에 지난 십수 년간 중국교회를 위해 이모저모로 많은 역할을 감당해 왔던 한국인 선교사들은 ‘선교중국’의 비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 한족 사역을 해 왔던 선교사들이 소수민족 선교에 대한 필요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중국기독교인들이나 교회들이 선교에 소극적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선교는 선교지에 교회를 심는 것(church planting)이 아니라 선교를 심는 것(mission planting)” 이라는 말도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신학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전 세계 다른 모든 교회와 마찬가지로 중국교회도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적 자원의 보고요 주체다. 특별히 중국 내 소수민족 선교를 위해서 중국인(한족) 교회가 갖고 있는 역량은 이미 충분하다. 특별히 성경번역과 관련하여, 소수민족 언어를 익히고 연구하거나, 소수민족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지역의 정부관리들과 원만한 관계를 쌓아나가는 가운데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데 있어 충분한 지식적, 인력적 자원들이 중국교회에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중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역량이 현장에서 쓰이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 시대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이라고 본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교사들은 이미 중국에서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 조력자요 친구(partner)다. 중국교회가 중국교회의 방향을 세워나가는 시점에 있다면,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선교의 사명과 선교의 열정, 그리고 선교의 노하우를 전해야 한다. 중국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헌신된 이들이 자원하여 복음의 일꾼이 되도록 독려하고, 그들이 단순한 열정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구비될 수 있도록 안내하며, 그래서 중국 소수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바로 그들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외국 단체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재정적인 도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동반자로서 선교의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말이다.

이미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교회를 선교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 중국교회로 하여금 중국 내 소수민족의 성경번역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당연히 그들이 복음의 전진을 위해서 해야 하는 과업임에 분명하다. 차츰 중국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고학력자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언어학이나 지역학을 익히거나 훈련을 받은 젊은이들이 소수민족 성경번역 사역에 참여하도록 하여, 외국인 사역자들과 함께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감당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사역의 주체가 되고 외국인은 서비스를 해주는 조력자로 남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교의 지도력 이양 사례가 없을 듯싶다. 

협력의 상승효과
“시너지”라는 말은 함께 함으로 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의 무게에 비하여 말 두 마리가 함께 짐을 끌 때 2배의 무게를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짐을 끌 수 있다는 데서 실증된다. 한글로 번역할 때 “상승효과”로 번역하는 것을 보면, 둘 이상이 함께 할 때 훨씬 더 많은 효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너지를 위해서 함께 협력의 초기 단계에서 그 효과를 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협력하는 당사자들 사이에 각자의 잇속에 대한 근시안적 이해의 충돌이 생기고, 협력으로 얻을 수 있었을 효과를 오히려 반감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역(逆)시너지 효과다. 왜 그럴까? 서로간의 신뢰의 부족이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도 원인일 수 있으며, 장기적 안목의 부재도 원인이 될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협력과 동역의 가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효율성의 논리를 따지기 이전에 협력과 동역은 하나님의 방법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약간의 손해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불신앙이 협력을 막는 것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 소수민족을 위해 일해 온 외국인들의 사역은 20년을 넘어가고 있다. 그 동안 한국인 선배 선교사들이 감당해 왔던 수고와 노력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어, 이제는 우리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아울러 각 개인과 단체가 소중하게 가져온 사역의 노하우와 정보들 또한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다고 본다. 하지만 이를 바꾸어 말하면, 이제는 공통의 비전과 공통의 부르심을 위해서 소수민족 지역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의 힘을 모아야만 하는 때가 되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소수민족들이 그들의 언어와 그들의 노랫가락에 맞추어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하며 찬양하는 일을 위해서, 서로의 이기적인 마음들을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이에 더하여 중국교회가 이런 타문화권 사역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하며, 그들에게 같은 비전, 같은 소망을 나누는 것 또한 이 시대의 요구사항임에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들 사이에서, 그리고 단체들 사이에서, 서양선교사들과 화교들과 한국인 선교사들 사이에서, 외국인 선교사들과 중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깊이 있고 은혜로운 협력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강산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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