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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2  통권 132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2829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대만 신문매체의 선구자, 바클레이 목사(Rev. Thomas Barclay)

지난 호에는 대만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대만 맹인의 아버지, 캠벨 목사(Rev. William Campbell, 1841∼1921, 甘?霖)를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이번 호에는 ‘대만 신문매체의 선구자, 바클레이 목사(Rev. Thomas Barclay, 1849∼1935)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바클레이 목사는 영국장로교회가 대만에 파견한 다섯 번째 선교사였다. 그는 1875년 6월 5일 대만에 도착하여 1935년 소천할 때까지 60년 동안 대만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는 영국장로회 선교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만선교에 헌신한 목사이기도 했으며, 그는 신학교육, 백화문(白話文)운동, 그리고《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臺灣府城敎會報)》를 발행하는 등, 초기 대만선교에 커다란 공을 세운 충성된 선교사였다. 

바클레이 목사의 생애와 헌신
바클레이 목사는 1849년 11월 21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고, 밑으로는 여동생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칼뱅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학교성적도 우수한 총명한 아이로 자라나 1864년 글래스고우 대학에 입학했다. 수학성적이 우수하여 당대의 저명한 물리학자 켈빈(Lord Kelvin)의 연구실에서 전기학을 연구하면서 그의 논문을 황실연구회에 발표하기까지 했다. 당시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로 그의 이름이 대영백과사전에 기록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바클레이는 대학 2학년에 재학하던 16세 생일 날 하나님 앞에 일생을 헌신하겠다는 서약서를 썼다. 그리고 매년 생일날 그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서 헌신의 뜻을 다짐하였다. 1892년 바클레이 목사가 44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Miss Elisabeth A. Barclay)와 결혼한 후에는 부부가 함께 매년 그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 1909년 7월 사모가 상해(上海)에서 수술하는 과정에서 사망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혼자 그 서약서에 서명하다가 1934년 11월 21일에 그가 사망하면서 서명을 멈추었다. 그 서약서는 1935년 그가 사망한 후에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바클레이 목사는 대학시절에 중국 샤먼(廈門)에서 선교하는 더글라스 목사(Rev. Carstairs Douglas)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중국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을 졸업하자 그는 대학시절에 절친한 친구 맥키찬(D. Mackichan)과 깁손(J. C. Givson)과 함께 선교의 비전을 갖고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 신학교(Free Church Divinity College)에 입학하였다. 1873년 신학교 졸업 후, 그들은 다시 독일의 라이프지그(Leipzig) 대학에서 함께 유학하였다. 라이프지그를 졸업한 후 맥키찬은 인도의 봄베이(Bombay)의 윌슨대학(Wilson College)의 총장으로 활동하였고, 깁손은 중국 산토우(汕頭)에서 그리고 바클레이는 대만에서 각각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이들 셋은 각각 다른 곳에서 선교활동을 했지만,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왕래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바클레이 목사가 맥키찬에게 보낸 편지에,  깁손 목사가 1866에서 1876년까지 10년 동안 바클레이에게 보낸 편지를 정리하여 저울에 달아보니 무려 3파운드 9온스에 달했다고 한다. 깁손은 이 편지들이 자신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한다는 소식이 스코틀랜드교회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 우수한 인재들을 선교사로 내보낸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라고 애석해하며, “국내에 이렇게 유능한 인재들을 받아드릴 수 있는 교회가 없단 말인가” 하며 한탄했다. 또한 그들이 국내에 남아 활동하도록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전을 따라 계획대로 선교지로 떠났다. 

바클레이 목사의 대만선교
바클레이 목사는 영국장로교회의 대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서, 1874년 9월 19일, 부모형제들과 영원히 이별한 채 선교지로 향하였다. 12월 18일, 3개월 만에 샤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5개월 동안 샤먼어를 배웠다. 1875년 6월 5일, 다고우(打狗: 지금의 까오슝)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대만 땅을 밟음으로 영국장로교회가 대만에 파견한 다섯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바클레이 목사는 다고우에서 일 년 반 동안 머물면서, 대만어를 배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영국선교사들은 초기부터 현지어를 중요시했음을 볼 수 있다. 현지어 공부를 하지 않고 선교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허무맹랑한 처사인데도 불구하고,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한국선교사들은 아직도 현지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바클레이 목사는 다고우에서 언어를 공부하면서 대만 선교현황을 살펴보았다. 당시 대만 남부교회의 선교중심이 다고우와 수도인 타이난(臺南)으로 분산되어 자연적으로 인력의 부족으로 선교의 효과가 저하되는 것을 감안하여 다고우의 선교지를 타이난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877년 그가 가르치던 3명의 학생들과 함께 타이난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타이난자오서후이(臺南敎士會)’를 조직하여 대만선교를 좀 더 조직적으로 전개하도록 노력하였다. 

바클레이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건전한 교회의 건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교회내부의 정돈에 더 주력하였다. 물론 그도 전국의 복음화라는 큰 목표아래 노력하고 있었지만, 성급한 복음 전파보다는 교인들의 신앙과 인격의 수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바클레이 목사가 대만에 선교사로 부임해 왔을 때는 대만에 복음이 전해진지 벌써 10여 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그 당시 대만교회의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 대만교회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나는 많은 착각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이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교우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반드시 귀중한 물건들은 자물쇠를 채워야만 해서 정말 괴로웠다네.” 그는 이토록 대만교회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교회여서 교회 내부의 정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신도들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신도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부당한 행위를 저지른 신도들은 그 교적을 취소시키며, 교회에서 추방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신도들에게는 엄격한 교리문답을 통하여 신앙의 동기를 철저히 확인한 후에야 교회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바클레이 목사의 수난
대만선교를 위해 열심히 봉사한, 바클레이 목사는 대만의 기후와 위생환경 때문에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야 했다. 그는 젊고 건강했지만, 1878년 대만에 온지 3년 정도 지났을 때, 혹독한 학질로 2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의 병이 너무 심각하여 대만 동역자들은 그에게 영국으로 돌아가 치료받고 오라고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에 머물기를 끝까지 고수하며, 2개월 간 학질과 격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가 대만선교를 하면서 겪어야했던 또 하나의 큰 어려움은 대만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었다. 바클레이와 그의 동역자들은 커자런(客家人)이 사는 부락 얼룬(二崙)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커자런들의 심한 욕설과 공격을 받아야 했다. 1885년 7월 18일, 바클레이 목사는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위해 특별히 얼룬에 내려가 주민대표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기로 하였는데, 갑작이 수십 명의 청년들이 인분이 가득한 똥통을 들고 와서 똥을 교회에 퍼붓고 갖은 욕설을 하며 교회를 파괴하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는 이러한 폭도들의 만행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온유하게 그들을 설득했지만, 폭도들은 오히려 인분을 바클레이 목사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퍼부으며 교회를 철거하도록 위협하였다. 바클레이 목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태도로 “여러분! 이 귀한 대변을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논밭에 뿌리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하니 그의 지혜와 용기가 얼마나 특출했는지 짐작이 간다. 얼룬사건이 발생한지 7년 후에 바클레이 목사는 현지 청년들을 학교에 입학시키고, 신학교까지 졸업시켜 일생을 주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섬기도록 교육시켰다고 하니,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실감할 수 있겠다. 

타이난신학교(臺南神學校)의 창설
바클레이 목사는 대만선교의 다양한 분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가장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는 신학교육을 정립한 것이다. 대만선교는 비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폭풍우 속에서도 꾸준히 그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성장했다. 그 결과 현지 사역자의 양성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바클레이 목사는 원래의 신학교를 재정립하고 30여 년간 신학교에 몸담으면서 240여 명의 현지 사역자들을 양성하여 대만 신학교육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대만 초기 선교에는 다고우와 타이난 두 곳에서 ‘전도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대만사역자들을 양성하였다. ‘전도사 양성소’는 선교사가 동역자들을 가르치는 사도제 교육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교육과정이나 수업시간이 일정하지 않아서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러한 사도제 교육방법을 조직화하여 신학교를 창설하고 고정된 장소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강의는 선교사들이 돌아가며 했다. 바클레이 목사는 학생들의 생활교육과 인격교육을 중요시하여 학생들은 반드시 신발을 신고, 단정한 복장을 착용하도록 규정하였다. 왜냐하면 초기 신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노동계층 출신이어서 맨발로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바클레이 목사는 안식년 휴가로 영국에 돌아가 그의 모(母) 교회에서 대만선교 활동을 보고하고, 대만의 신학교육을 위해 건물이 필요하다고 회중들에게 보고하였다. 그의 보고를 들은 교우 한 명이 감동하여 익명으로 1,000파운드를 헌금하였다. 그는 대만에 돌아와 700파운드로 5,000평의 땅을 구입하고, 1903년 2월 18일, 27명의 학생과 2명의 교수가 기거할 수 있는 현대식 규모의 신학교를 세웠다. 교육과정은 종교과정 외에 과학과목을 가르쳐 신앙과 과학이 충돌되지 않고, 다 함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인 것을 가르쳤다. 특히 바클레이 목사는 실용지식들을 강조하여 양력과 음력의 차이, 썰물과 민물의 현상, 태풍 등에 관한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바클레이 목사는 신학교육 뿐 아니라 장로교회 부속인 창롱중학교(長榮中學校)의 창립에도 참여하고 대리교장까지도 역임하였다. 그가 창롱중학교 대리교장 당시에 린마오성(林茂生) 학생이 가난한 가정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생을 판단하고, 세 명의 의사에게 그 학생의 장학금을 부탁하여 린마오성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인문학부 철학과에 유학시켰다. 그는 대만학생으로 일본의 가장 높은 학교에 들어간 최초의 학생이 되었다. 그는 1916년 그 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역시 대만인으로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졸업 후 창롱중학교와 대만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28사건 때 희생되었다. 

바클레이 목사와 백화문(白話文) 운동
19세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의 사명을 갖고 세계각지에 흩어져 선교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선교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현지어의 공부를 매우 중시하였는데, 그 현지어를 배우기 위해 선교사 스스로가 언어공부를 위한 참고서들을 편찬하는 등 문서선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문서선교 기구들을 설립하여 인쇄소를 설치하고, 성경 번역과 복음책자의 발행 등을 통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신도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않았고, 대부분 교육을 받지 않아 한자를 읽을 수가 없었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신도들의 독서능력을 단기간에 배양하기 위해 고안한 언어가 ‘백화문(白話文)’이었다. 소위 말하는 바이화원은 영국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샤먼(廈門)선교의 경험에 근거하여, 샤먼어를 알파벳 철자로 표기한 문자이다. 백화문은 배우고 쓰기가 간단하며 거의 회화에 가까운 문자였다.

대만어와 샤먼어가 비슷하여, 대만 초기 선교에 있어 바이화원은 매우 중요한 언어가 되었다. 창롱중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바이화원을 필수적으로 배우게 했다. 1876년 설립한 타이난신학교에서도 바이화원은 학생들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과목이 되었다. 바클레이 목사는 바이화원을 보급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는 교회가 생명력이 넘치고, 건전한 교회로 발전하려면, 신도들이 모두 자유자재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자는 너무 어려워 이러한 목표에 달하는데 적합하지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바이화원은 부녀, 아동과 교육을 받지 못한 신도들에게 매우 적합한 문자라고 판단하여 ‘자오후이공바오서(敎會公報社)’를 설립하고,《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를 창간하여 바이화원을 적극 보급하였다. 

바클레이 목사와《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
《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는 대만 기독장로교회 ‘문서전도기관’에서 발행된 간행물로, 1885년 창립된 이래 그 명칭이 몇 번 바뀌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발행하였다. 무려 126년의 역사를 지닌 대만의 최초 간행물이다. 당초《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를 창설한 목적은 각각 분산된 교회들이 자오후이바오를 통하여,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상호교류를 꾀하고 또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여 신도들의 교리에 대한 지식을 증진하여 신앙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함이었다. 또한《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는 선교사역에 도움을 주기 위한 교회 내부의 소식, 기독교 교리와 신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교회를 선도하는 내용 등도 포함되었는데, 이 내용들은 신도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미신을 깨우치고, 건전한 신앙을 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외에도 시사문제, 천문지리와 과학지식 등을 소개하여 신도들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키고, 또 외국 서적들을 번역하여 신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신도들의 신앙뿐 아니라 현대화된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초기 대만교회에 필요한 성경, 찬송가와 전도책자들은 거의 샤먼에서 공급하였다. 1880년 5월, 대만 최초의 선교사 맥스웰(Dr. James Laidlaw Maxwell M.D, 馬雅各, 1836∼1921)이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인쇄기를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1881년 6월 인쇄기가 영국에서 대만으로 운송되었지만, 그해 바클레이 목사는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특별히 인쇄기 사용법을 배우고 1884년 1월 6일 안식년을 마치고 대만으로 돌아왔다. 그가 대만에 돌아와 인쇄기를 조립하여 그해 5월 24일 처음으로 인쇄기를 가동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대만 근대 인쇄업의 효시로 바클레이 목사는 그 인쇄소를 ‘취전탕(聚珍堂)’ 이라 명하고, 일반인들은 ‘신로수방(新樓書房)’이라 불렀다.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인해《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는 1885년 7월 12일에 발행되었고, 8월 26일 타이난자오스후이(臺南敎士會)는 자오후이바오(敎會報) 발행업무를 바클레이 목사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였다. 바클레이 목사가 60년 동안 대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 출판사역에 할애했다는 그것은 그가 60여 년 동안 대만 선교에 종사하면서 남겨놓은 걸작이었다.《대만푸청자오후이바오》는 대만선교뿐 아니라 근대 대만 인쇄업의 현대화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큰 업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대만 신문매체의 선구자’ 라고 일컫는다. 바클레이 목사의 대만선교는 한 알의 밀알이 이토록 훌륭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클레이 목사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우리도 그와 같은 열매들을 맺어갈 수 있기를 더욱 기도한다.


강인규 | 대만 중원대학교 응용중문어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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