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데기 경건은 가라
바울은 말세의 여러 징조 중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을 언급하며, 참된 경건이 사라진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성에 대한 불교적 이해와 이원론적 이해의 영향과 경건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 혼란을 겪기도 한다. 모든 성도들과 한국교회가 경건의 능력과 성경적 의미의 영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외형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바리새인들을 살펴보자. 바리새인들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구제와 금식, 기도와 헌금에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그들의 구제행위를 과시했다. 또한 기도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중언부언하며 많은 말로 기도했다. 그들은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여 사람들에게 그들의 금식을 알게 하였다. 그들은 텃밭의 채소까지도 십일조를 드리는 철저함과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경건의 완벽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구제와 금식, 기도와 헌금에 있어 바리새인들이 겉으로 보여주는 경건은 완벽하다. 경건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경건하다, 영성이 뛰어나다” 라고 말한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는 참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첨예하게 달랐다. 이들의 구제와 금식, 기도와 헌금과 같은 신앙적 행위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용이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에게 고백되어져야 하고 드려져야 할 신앙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큰 길에서, 군중을 상대한 전시용이었다고 평가하셨다.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다. 바울도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의 여러 징조를 말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을 언급하였듯이 그것은 껍데기였다. 알맹이는 빠져버린…….
잘못된 이분법도 가라
다음으로, 분리된 영성 즉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식적인 영성, 능력 없는 경건으로 살고 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분리시키고,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별개로 생각한다.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분하고, 물질계(物質界)와 비물질계(非物質界)를 양분하고,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여 물질계와 육에 속한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닌(非靈的) 속된 것으로 취급하고, 비물질계와 영혼에 속한 것만이 영적(靈的)이며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예배, 찬양, 기도 등은 영적인 것이고, 성도가 노동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집안에서 일하고 먹고 마시는 일, 문화 활동을 하는 일 등은 영적인 것과는 구분되는 속된 것으로 생각하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다.
교회나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파워풀한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요, 십자가군병 같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무기력한 신앙인으로 산다. 거룩함의 영역이라 생각하는 부분은 지극히 거룩하게 여기고, 속된 것의 영역이라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한없이 속(俗)되게 사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이 어쩌면 한국기독교가 총체적 부패와 영적 무기력에 빠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한다. ‘경건의 능력’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소위 ‘영성(영적)’은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위장되어 우리의 경건의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
회복을 명한다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경건의 모양은 물론이거니와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여야 한다. ‘영성’ 이 성경적인 의미로 재인식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경건의 범위는 어디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영성(영적)이 미쳐야 하는 영역은 어디인가?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경건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생애의 전 기간에 걸쳐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날마다 그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서로 봉사하여야 한다. 그의 영광과 전능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생명의 양식인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세우신 주의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도 기도하듯이, 기쁨으로 주님을 노래하듯이 살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사업장에서도, 일터에서도, 학교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예술 활동 중에도, 행정을 하는 중에도, 법을 집행하는 중에도 경건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두어야 한다. 권력 앞에서도, 돈 앞에서도, 세상이 주는 쾌락의 큰 유혹 앞에서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질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주의 뜻을 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신앙의 실력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도가 하는 일이 먹는 일이든 마시는 일이든 어떤 일이든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영적인 삶이 아닌가? ‘영성’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닌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죽음의 영역도 삶의 영역도 주께 속했음을 인정하고, 주인 되신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모양이요, 경건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행실을 통하여 영광돌리라고 하신다. 껍데기만 아니고 그 내면으로도, 외모로만 아니고 그 심령으로도, 말로만 아니고 그 행실로도, 아는 것으로만 아니고 몸소 실천함으로 경건의 모습과 능력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
경건의 삶을 사는 것은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절제하고 훈련하여 경건의 삶을 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건이나 소위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그를 향한 태도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경건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을 향하여야 한다.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따르기를 원합니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가 필요하다. 항상 그리스도를 찾고, 의지하고, 그를 위하여 사는 거룩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언행심사를 내어맡기는 과감한 의탁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회개케 하시며 말씀을 조명하시어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우리 상황을 다 공개하고 도움을 청하는 순결함이 있어야 한다. 이 길만이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않고 악을 행하기를 즐기고자 하는 우리가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늘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영적 원리를 기억하자.
우리 모두가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진정한 영성을 회복하기를 기도한다. 성도들의 신앙이 사람들을 향한 선전용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되고 드려지는 참된 신앙이기를 기도한다.
김아모스 | 빌리온선교회 한국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