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꿈속으로
역사, 그것은 과거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역사 탐험, 역사의 흔적은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한탄하거나 회고하게 한다. 역사, 그것은 흥왕성쇄 변천의 흔적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인류의 궁극적 의미이다. 역사의 활동기록은 연속성을 지닌 진실과 존중이다.
1989년 ‘6월 4일 텐안먼(天安門)사건’이 발생한 그해, 남편과 7명의 한국 목회자들은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8개의 도시를 집중적으로 탐방했다. 그 당시 6.4 텐안먼사건의 피비린내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70년대 말부터 중국선교에 헌신 해 오던 남편에게 그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제 정말 때가 왔구나”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중국선교의 비전을 나누면서 시작된 중국선교센터 공사가 2년 반에 걸쳐 끝이 났다. 이때, 여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는 8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선교를 향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딛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그분은 새로운 선교사역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때부터 중국을 향한 선교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를 대상으로 긴축정책을 실시했고,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서 화교들이 이 땅에서 터전을 일구는데 어려움을 겪게 했다. 그래서 1980년대 당시에 많은 화교들은 대만, 남미, 미국, 호주, 일본과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택했다. 1990년대 통계자료에 의하면, 그때 6천여 명의 화교가 한국을 떠났으며 1만 4천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6?25 전쟁 이후 4만 명이던 한국 체류 화교 인구가 2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초기에 미국으로 이민 간 대다수의 화교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으며 1990년대에 이민 간 화교는 이전에 1960,70년대에 대만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성경모임을 했듯이 그들만의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 말씀도 보고 함께 침목도 다졌다. 그래서 한국화교 모임을 만들어《韓華團契》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같은 이름으로 정기 간행물을 창간했다. 이 간행물은 미국에 있는 한국화교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믿음을 주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과 나누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잡지는 당시 외국으로 이민 간 한국화교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고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한 권의 잡지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화교들을 한 마음으로 묶을 수 있었다. 이 잡지가 모든 한국화교에게 복을 나누어 주고 또한 복음의 통로가 되길 기대한다.
1992년 8월 24일 국제적인 외교무대가 막을 내리던 날, 주한 대사관에서 중화민국 국기를 내리던 그날, 모든 한국화교들은 두 손에 작은 국기를 들고 조국인 중화민국 대만을 향한 애국심을 불태웠다. 당시 내 마음은 몹시 침통하고 암담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 소속될 것인가? 앞으로 우리 한국화교 자녀들은 어느 쪽에 속해서 교육을 받을 것인가? 누가 한국화교의 뼈아픈 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 갈 것인가?
중한수교 이후 우리들의 부모님이 떠나온 고향
산동성(山東省)은 더 이상 갈수 없는 곳이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 역시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현실의 변화는 우리 한국화교에게 오히려 하나의 돌파구가 되었다. 1990년대, 나는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제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정, 교회, 선교훈련원에서 일인 다역으로 생활하면서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그래서 나는 생활의 여러 가지 체험을《韓華團契》잡지에 수시로 기고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는 IMF가 터졌다. 고난의 시간도, 추운 겨울도 금방 지나 갈 것이라 믿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주하고 평범하기만 하던 나의 삶에 전환점이 생겼고, 나는 시련을 겪을수록 더욱더 넓은 경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 교회가 있는 이 정동거리도 21세기로 들어서게 되었다. 봄날의 새파란 잎과 가을날 노란 은행잎은 피고 졌다. 이 정동 길은 내 삶 그 자체이며 기쁨이었다.
한국화교 2세들은 1960년대부터 대만에 가서 대학과정을 공부했다. 부모님 세대가 한국에서 고생한 덕분에 2세대는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고국 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 중에, 중한수교 이후에 시대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한국의 여러 대학교와 대기업에 대거 채용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한 화교는 약 40여 명이었으며 오늘날 중문학과 학과장으로 계신 분들도 더러 있다. 기타 석·박사로 여러 대학교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 주류사회에 정착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지난 몇 년간 한국화교 학술회(韓華學會)에서는 학술적 연구과 중국과 대만 양안(兩岸)의 학술적 교류를 진행해왔다. 다른 한편 한국화교에 대한 복지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한국화교 역사에 대한 자료도 수집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화교협회가 몇 번 이사를 하는 중에 한국화교에 대한 소중한 자료들이 많이 분실되어서 복원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영역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가운데 그가 우리를 보내신 곳에서 충성을 다하여 주님에 대한 마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 복음의 씨앗을 모든 중국인들에게 심어야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2002년 월드컵 대회에서 4강의 신화를 이루어낸 한국의 위상은 한 층 더 높아졌다. 오늘날의 서울을 이전에는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이 도시의 자연경관, 교통상황, 문화수준, 위생수준, 치안상태, 생활의 편리함, 예의범절의 척도, 패션과 시대의 흐름, 과학 기술 분야 등이 모두 선진 국가에 뒤쳐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불기 시작한 한류바람은 지금도 그칠 줄 모른다. 2002년 그 해에 한성교회에서 한국 화교교회 창립 9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동시에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해서 90주년 기념 특집을 출간하였다. 이는 한국화교역사에 대한 최신기록을 담은 자료집이다.
2007년 8월 27일 할렐루야교회에서 제1회 미션 차이나 대회를 개최했다. 중국선교에 헌신한 한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에 있는 7개의 화교교회 성도들과 대만 기독교 단체인 우주광(宇宙光)에서 동역자들도 함께 했다. 대회 위원장은 남편인 유전명 목사가 맡았다. 기조 강연은 토마스 왕(王永信) 목사님이 하셨다. 대회 측에서 삐앤윈뽀(邊雲波) 형제를 초청했다. 그는 “무명의 전도자에게 드리는 편지(獻給無名的傳道者)” 라는 책을 쓰신 분이다. 이 분을 만나볼 수 있어서 참 행복하고 감사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그 책의 내용을 전부 다 외울 정도였다. 심지어 서예공부 할 때도 책 내용으로 붓글씨를 쓸 정도로 내게 여러모로 영향이 큰 책이었다. 1980대 초에 남편은 삐앤(邊) 형제의 책 내용으로 편곡한 곡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 대만의 린즈핑(林治平) 교수님은 그 자녀에게 전화를 해서 이 아빠가 그 유명한 삐앤(邊)형제를 직접 만났다고 자랑까지 했다. 대회 중에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 선교하러 온지 200년이 된 기념으로 역사적인 사진과 자료들도 전시했다. 중국 근대 역사를 연구하시는 린즈핑(林治平) 교수님, 차스지에(査時傑) 교수님, 우에이와이양(魏外揚) 교수님, 강인규(姜仁奎) 교수님 등 참석하셨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한국인 선교사들은 한성교회에서 중국 선교 관심자들을 위한 모임인 땅 끝 소그룹 모임(地極團契) 출신들, 중국복음선교회의 중국선교훈련원의 학생들이었다. 중국복음선교회에서 중국선교에 헌신한 많은 한국 형제자매들을 훈련하여 선교사로 양성시키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승리의 나팔소리
할렐루야! 우리는 승리했다. 슬픈 시절도 눈물도 모두 자나갔다. 하나님께서 큰 시련 속에 있던 남편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은혜로 충만하게 하셨다. 미국 LA에서 한국화교들을 위한 전도 대회가 개최했다. 그 기간에 전 세계에 퍼져있는 고등학교 동기들 동창회를 열었다. 졸업한지 30년 만에 모인 것이라 모두들 감격했다. 친구들에게 금장식 성경과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동창회에 한 친구가 나더러 성경과 책 한 권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나님께서 친구들을 모두 축복해 주시길 기도한다. 며칠 동안의 전도 집회는 오로지 우리 한국화교를 위한 시간이었다. 산동 사투리가 너무 반갑고 정겨웠다. 나는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집회를 위해 섬겨 주신 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슥 4:10)” 잡지《韓華團契》20호의 편집자 칼럼에서 편집장은 “우리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한국화교에게 임하는 것이며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알게 되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의 불꽃이 우리 가운데 계속 타오르게 하시고《韓華團契》잡지가 한국화교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한다.” 라고 말했다.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아멘!
주님, 나를 인도하소서. 마흔 살에 연구소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충전하기를 원합니다. 매년마다 일본과 대만에서는 그 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글자 하나를 선정한다고 한다. 대만 시민들이 ‘소망하다’ 라는 뜻의 ‘반(盼’자를 선정한 것처럼 나 역시 글자 하나를 선정하고자 한다. 한결같이 20년은 유지해온 대견스러운《韓華團契》잡지를 대표할 만한 한 글자 “美”를 선물하고 싶다. 그대들이 주님을 위해 한 모든 수고는 “참 아름다운 일이다” 그리고 여러분 역시 참 아름답다.
이건미 | 중화한성교회 사모, 애화도서관 관장
번역 | 차이나 · 본지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