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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2  통권 132호  필자 : 유전명  |  조회 : 3409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중국을 향한 다리, 화교교회
한국 화교교회의 상황과 화교교회의 특색

중국인은 ‘십년의 번영을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백년의 번영을 위해서는 사람을 심는다(十年樹木, 百年樹人: 십년수목, 백년수인)’ 라는 말이 있다. 옛날 사람들에게 ‘百(백)’ 이라는 숫자는 크고, 길고, 오래 산다는 의미였다. 장수(長命百歲), 백만장자(百萬富翁), 온갖 꽃이 일시에 피어 만발함 같이 (百花齊放), 한국화교가 한국으로 이민 온지 벌써 백년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 민족성, 교육정책 등에 있어서 한국화교는 동남아시아 기타 지역의 화교들과 같지 않다.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도 없고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국가정책의 영향으로 한국화교들의 마음은 항상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한국 화교교회의 탄생
1912년 산동해양(山東海陽)에서 온 차도심(車道心)은 신앙 때문에 부친에게 핍박을 받아 부친에 의해 산매장을 당할 뻔했다. 외삼촌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야밤에 고향을 등지고 도망쳐 나와 얜타이(煙台)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먹고 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며 중의학을 배웠다.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대한민국 서울에 오게 되었다.

YMCA 청년회에서 따이더밍(戴德明, C. S. Deming) 사모를 만난다. 더밍 사모는 중국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서 출생했으며,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은 기쁘게 만났으며, YMCA의 방 한 칸을 빌려 첫 모음을 가졌는데, 이것이 화교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후에 오랜 시간 중국선교를 해 오던 진루오란 교사(敎士: 선교사)가 1914년 중국 남방혁명의 난(中國南方革命之亂)으로 한국에 와서 따이더밍 사모와 함께 사역을 하게 되었다. 먼저 한성교회를 설립하고, 평양교회, 원산교회, 인천교회, 청진교회, 부산교회를 설립하였다.

재건과 확장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이후, 화교 대부분은 서울을 떠났다. 교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교회가 파괴되어 모일 방법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졌다. 북한의 교회는 이때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지금까지도 교우들의 생존여부를 알지 못한다. 남한으로 피난 온 화교, 잇달아 남쪽에서 돌아왔다. 과거의 한성교회는 폭격을 맞아 파괴되어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YMCA의 건물을 빌려서 모임을 시작했다. 후에 또 피어슨 성경신학교를 빌려서 모였고, 교우들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결국 1958년에 정동 25번지의 이 땅을 구입하여 교회 건립을 시작하였다. 한성화교교회는 오늘날 영적인 안식처가 되었다. 올해로 창립100주년이 됨을 기뻐하며 축하한다. 한화(韓華)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천교회는 전쟁의 불길로 크게 파괴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한국전쟁 후에 빠르게 모임이 회복되었고, 북미장로회선교사 메이카이란(梅凱蘭, Miss Helen Mc Clain)이 젊은 나이가 중국에서 선교를 하고 있었는데, 신(新)중국 건립 이후 은퇴하여, 여러 해 파키스탄에서 영어 교수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부담으로 1955년에 화교교회 설립에 협력하기 위해 중화기독교의 한국 노회(區會: 여한중화기독교연협회의 전신)에 왔으며, 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전도와 어린이 여름수련회 등 복음사역을 시작하였다. 대구, 군산, 영등포, 수원 등에 교회를 설립하고, 대전, 광주교회는 이민자들의 이주자 수는 급격히 감소하였으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현재 재한 중화기독교연합회에 속한 교회는 인천, 부산, 수원, 대구, 영등포, 군산에 있는 일곱 교회들뿐이다.

중국선교를 위한 신학훈련과 제 활동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외국인을 통제하는 정책, 토지소유권과 무역사업 경영권 제한 등을 실행했다. 판문점 도끼 사건은 사회불안을 불러일으켰고, 화교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화교들은 잇달아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이민을 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다. 결과 화교는 2만 명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 교회 성도들도 한집 한집씩 한국을 떠났다. 교회는 곧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났다. 대만에서 초청받아 오신 목사님들도 잇따라 떠나셔서 전에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시련을 만나게 되었다. 70년대에 하나님께서는 한국 화교 가운데 헌신한 청년들을 부르셔서 준비시키셨고 졸업 이후 교회를 섬기며 교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70년대 말, 필자와 한국교회 황의춘(黃儀春) 목사는 중국선교신학교를 설립해 중국선교에 헌신한 한국 청년들이 중국선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이전에 OMF(Overseas Missionary Followship) 총무를 역임하셨던 김기문(金基文) 선교사, 성결교의 이빈한(李賓漢)목사, 침례교의 이동희(李東熙) 목사 모두 당시 학생이었다. 84년, 중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한국 청년들이 중국선교를 위한 단체인 띠지(地極)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후에 중국복음선교회로 발전하게 되었고 한국교회와 중국교회 간의 다리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80년대 한국교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86년에 아시안 게임을, 88년에 서울올림픽을 개최한 한국교회는 중국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냉전이후 처음으로 중국에서 온 손님을 이렇게 많이 접하게 된 것이었다.

1992년에 중국과 한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순간적으로 중국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유감스럽게도 당시 한국교회는 중국선교 모색 기간이었다. 화교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중국선교의 계몽작업으로 중국선교대회를 열어, 한국교회는 온 힘을 다해 중국선교의 필요를 소개했고, 중국선교연구회와 중국복음선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1994년 정식으로 중국선교사훈련원을 세워, 중국선교에 헌신한 한국교회 청년들을 훈련시켜 중국선교 대열에 참여하게 했다.

중국선교의 미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굴기(掘起)는 전 세계 사람들로 괄목하게 했다. 최근 몇 년 이래로 중국교회는 중국선교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농촌인구가 도시로 대량 유입되면서 농촌 가정교회(家庭敎會)는 감소하게 되었고 도시 가정교회는 부흥하게 되었다. 헌신한 청년들이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 삼자교회(三自?會)의 변화, 중국 정부의 선교사에 대한 이해는 해외에서 중국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단체들이 다시 선교의 정책과 방향을 생각하게 했다. 최근 한국 내에 중국선교에 헌신한 청년들을 겨냥한 신학교육 사역이 일어나고 있다. 각 신학대학교들이 이 분야의 필요성을 보게 되었고 중국어로 공부할 수 있는 특별과정을 준비하였다. 헌신한 중국 청년들을 받아들여 훈련과 학업을 마치고 귀국시켜 조국 교회를 목양하게 한다. 한국 화교교회는 온 마음을 다해 협력하여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유전명 | 한성교회 담임목사, 중국복음선교회 한국대표
번역·정리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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