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어깨에 있는 난쟁이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 - 알프레드 아들러 -
묵직한 중국, 묵직한 저자 어디에나 중국은 있다. 단순히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국 사람이나 상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과거 우리의 역사에 있었고, 중국은 현재 우리의 경제에도 있으며, 중국은 미래의 우리의 국제관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크게 자리매김하여 함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이제 미국의 역할이 주목받는 곳이면, 어김없이 등장하여 때로는 협력자로, 때로는 경쟁자와 대립자가 되어 국제사회의 새로운 한 축으로 세워져가고 있다. 이제 중국은 국제관계를 받치는 양축의 하나로서 위치뿐만 아니라 그에 맞는 역할과 역량을 배양하기 위한 포석을 준비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체재안정과 경제성장을, 외부적으로는 제3세계와의 국제정치와 자원외교에 있어 부드러운 면모로 길을 개척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소리 없는 묵직한 행보가 중국식 외교의 특성이 되어가고 있다. 기존의 미국중심의 하드파워에 염증이 난 국제사회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풍의 소프트파워를 기대와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올해 초에 중국의 행보에 관한 오랜 관찰을 보여주는 묵직한 책 한 권이 나왔다. 중국이라는 중량감 있는 주제, 680여 쪽의 두툼한 단행본의 분량,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 외교정책에 있어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저자의 중량감 등 여러 면에서 묵직함을 느낄 수 있다. 1971년, 저자인 헨리 키신저는 그동안 죽의 장막이라 불리며 베일 속에 가려있던 중국을 직접 방문해‘핑퐁외교’라는 창의적 접근으로 미·중 수교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하버드에서의 오랜 교수직의 통찰력과 국제외교에서 다방면의 요직을 겸한 현실정치의 감각으로 무장한 저자는 현재의 세계질서 가운데 중국을 새로운 파트너로 세우는데 있어 경험적 관점으로 중국의 근현대사를 풀어내주고 있다.
키신저에 눈에 비친 중국 ‘이 특이한 나라!’ 이것은 중국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저자의 감탄사이다. 그리고 그 특이함을 본서의 서론 격으로 제시하며 중국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관점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키신저가 느낀 특이함은 3가지이다.
첫째는 중국문명의 걸출함이다. 그 역사의 길이뿐만 아니라 보존, 그리고 그 문화의 폭뿐만 아니라 융화력에 있어서는 따라온 문명이 없는 듯 보인다. 그 한 예로 기원전 이천년 전 상(商)왕조에 출현한 중국문자는 지금까지도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과 오랜 병법의 이야기들을 먼 옛날의 단회적 경험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오늘날의 현실정치의 지혜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p.25)
둘째는 사회가 공인한 국가통치술로서의 인(仁)과 덕(德)의 유교적 배경이다. 중국식 통치의 정점에 있는 중국황제는 정치적으로 통치자인 동시에 형이상적인 역할을 감당한 자기도 했다. 즉 그는 천자의 지위로서 하늘과 땅의 상징적인 중재자 역할을 감당하며 크고 작은 모든 것의 ‘대동(大同)’을 이루는 핵심인물로 받아 들여졌는데, 만약 그의 통치에서 덕의 길을 벗어나면 천명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되어 반란과 새 왕조의 출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p.36)
세 번째는‘스스로 역사와 현재에 있어 중심이다’라는 대국적 자부심이다. 이러한 모습은 주변국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으로 작용할 뿐 더 넓은 주변국과는 단절되어버리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즉 자신들의 문화와 체제가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면서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고, 가장 부유하면서도 해외교역이나 혁신에 무관심한 모습으로서의 여유이다.(p.55)
이러한 대국의 특이함을 파악한 키신저는 자신만의 경험과 통찰의 렌즈를 유지하면서도 역사와 정치의 중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중국의 근현대사 전체를 청나라의 이홍장을 시작으로 마오쩌동, 덩샤오핑, 장쩌민 등의 중국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스케치해 나간다.
거인의 눈에 비친 거인들 일전에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을 읽으며 거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 시대의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꼈다. 처음에는 그분의 경험과 삶이 한국 현대사의 한 획으로 어디서 어떻게 그어지는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열었지만, 닫으면서는 최고의 통치적 자리에서 그가 바라본 인물들의 평과 그 인물의 역할에 있어 공과 사에 관점을 얻게 된 유익이 있다.
말 그대로 아직도 살아있는 거인의 눈인 키신저는 책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도 틈틈이 내놓고 있다. 먼저 마오쩌동에 대해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영향력에서는 압도적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했고, 가차 없고도 냉랭했으며, 시인인 동시에 전사요, 예언자이면서 재앙이기도 했던 마오쩌동은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하마터면 중국의 시민사회를 박살낼 뻔했던 여정의 발단이기도 했다.”(p.125) “마오쩌동이 중국역사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처럼 권위와 냉혹함과 전 지구적인 영향력의 조합을 전통적 요소와 교묘히 결합시켰던 중국지도자는 일찍이 없었다.”(p.139) 거인의 눈에 비친 중국의 거인 마오쩌동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후하지 않다.
대약진 운동의 시작을 보며“원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마오쩌동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오래두고 보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서슬 퍼렇게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그것이 자신의 변증법적 접근이라고 정당화했다.”(p.229) 라고 서술했다.
키신저는 저우언라이를 온화함과 균형을 갖추었으면서도 외모와는 상반되는 통찰력 있는 리더십의 소유자로 평가한다. “60여년의 공직 생활에서 나는 저우언라이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키는 작지만 우아한 자태며 표정이 풍부한 얼굴에 번득이는 눈빛으로, 그는 탁월한 지성과 품성으로 좌중을 압도했으며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보았다.”(p.298) 그리고 그는 항상 마오쩌동의 약점을 채워주며, 지나친 점을 막아주는 상반된 조정자의 기능으로 자리를 지켜갔다.
마오쩌동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한 시대의 종말은 덩샤오핑의 복권으로 이어졌고, 그의 리더십은 개혁개방을 통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중국의 현대화를 이끌어냈다고 키신저는 평가한다. “오늘날 경제대국으로서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유산이다. 그는 지도자의 궁극적 임무, 즉 자신이 이끄는 사회를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던 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완수했다.”(p.409) 그 일을 이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자신의 신념을 강조하고, 민중의 인내력을 의지하며 통치한 마오쩌동과는 달리 덩샤오핑은 자신을 숨기면서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을 수 있도록 중국인들의 닫힌 창의성에 족쇄를 풀어줌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며 경제개발을 추구해갔다. 때로는 “빈곤한 게 사회주의는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중국의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솔직담백함도 보여주는 지도자였다.(p.411)
그리고 키신저는 마지막 지도자로 장쩌민에 대한 평가를 자신과 대화를 나눈 덩샤오핑의 말을 인용하며 평가로 대신하고 있다.“ 당신은 이미 장쩌민 총서기를 만났겠지요. 앞으로 또 그를 만날 기회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는 자신만의 아이디어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에요. 정말 지적인 사람이라오.”(p.540) 실제로 장쩌민은 우월했다. 상대방과 대화를 유지하는데 있어 때로는 외국어실력과 서구음악에 대한 지식을 활기 넘치게 사용했고, 풍부한 중국 고전의 격언을 인용하고 노래도 부르곤 했었다. 이러한 인물의 평가 외에도 중국을 수십 차례 방문한 저자는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의 몰락과 마오의 혁명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톈안먼 사태 등 중국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굵직한 변화상을 국제관계의 배경 속에서 함께 소개하고 있다.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 이야기 본서를 논할 때 잊지 말아야할 점은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책 이전에 그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에 관한 책이란 점이다. 특히 미·중 양국의 외교적 관점이라는 틀에서 오랜 외교관의 자리에서 중국지도부의 흐름을 평가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서를 읽고 있을 때 한 일간지 북섹션에서 이와 관련한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책 제목은 《오바마와 중국의 부상》으로 오바마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방향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실현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책이다. 지난 해 4월까지 미국 동아시아 정책을 총괄해온 책의 저자 베이더는 버락 오마바 행정부가 갖고 있는 대외정책의 가장 큰 고민을 ‘중국을 어찌할 것인가?’로 시작한다. 그리고 베이더와 백악관 참모들이 결정한 중국과의 관계설정의 요체는 균형이었다. 냉전시대 패권다툼의 딜레마를 답습하지 않고 중국의 실체를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을 감소시키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기조의 근간을 형성하고, 관점을 제공한 이들 중에 바로 헨리 키신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중국과 미국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주장은 두 나라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블록으로서 서로를 대한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양쪽 모두를 파멸로 끌고 가는 길이다.”(p.631) 라고 말한다. 이러한 힘의 안보와 경제에서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균형적 외교와 협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서는 결론을 내린다.
본서를 대하며 외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기에 그 분명한 한계도 느껴진다. 우리가 바라보는 중국을 넘어서는 더 큰 틀의 중국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는 있으나, 미국과 비교하여 문명사적 교류의 역사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역사를 가진 우리의 관점과 대응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은 근현대의 2백여 년의 역사에서 중국의 정치와 경제적 측면의 교류를 지향해 왔지만, 우리는 그것 외에도 정신문화에 있어 그 역사적 관성을 무시하며 접근할 수 없다. 저자의 더욱 정확한 중국 이야기는 이러한 문화 정신적 공유가 이루어진 후에나, 아니면 우리의 관점을 삽입한 후에 한 번 더 크게 그려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90을 넘긴 노학자의 평생의 작업이라 할 수 있는 중국 평가서 ‘On China’는 우리에게도 인접 대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더해줌으로 우리의 적절한 준비와 대응을 요청하고 있다.
‘거인의 어깨에 있는 난쟁이는 거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말처럼 아직 우리는 거인 중국을 또 다른 큰 거인을 통해 대면하고 있는 형세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두 구심력 사이에서 균형과 독창적 자리매김을 통해 두 거인들을 평화적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감한다.
이 관 | 前중국선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