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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5.1  통권 131호  필자 : 요셉쩡  |  조회 : 2737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한중수교20주년, 선교중국을 생각한다
한중수교 20주년이 대만선교에 미친 영향

존경하는 민 목사의 부탁으로 고심 끝에 이번 특집에 기고를 하게 됐다. 개인의 사정과 원고청탁, 선교사역 및 총회에서 맡은 여러 가지 업무로 필자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는 것은 함께 일 하는 동역자들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20년 전 대만과 한국의 갑작스런 단교(斷交)로 인해 대만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잊지 못할 매우 힘든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부탁 받은 특집원고의 주제는“한중수교 20주년이 대만선교에 미친 영향”이지만 필자는 대만의 입장과 각도에서 이 주제를“대만과 한국의 단교 20주년이 대만선교에 미친 영향”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20년 전 갑작스런 단교로 힘들었던 경험 
1992년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단교의 의사를 통보해왔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대만 정부 대사관 관저 재산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대만 주한대사관의 관원들은 거의 맨몸으로 쫓겨나다시피 한국을 떠났어야 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6일, 미국은 중국과 수교할 의사를 대만에 통보하고 1979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수교를 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대만 대사관에서는 충분한 사후처리와 대사관 관저에 대한 재산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게임 등 국제대회에 태권도선수가 참전할 때마다 한국 심판과 위원들의 불공정한 처사로 심지어 실격 처리되는 사건이 있었지만 대만 정부는 일관되게 저자세를 취해왔다. 하지만 억울함을 당한 선수와 일반 여론의 한국정부에 대한 불만은 날로 거세졌다. 근래에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가지고 온“한류현상”으로 대만의 많은 한류 팬들이 한국의 연예인과 가수들을 우상시하고 한국에 관광을 열심히 간다고 해도, 양국 간에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만 여론은 극렬한 반한(反韓) 캠페인을 벌였다. 

작년에 미국으로부터 대만, 한국과 일본의 브라운관 생산이 독점금지법을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대만 정부의 소식통에 의한바 한국의 삼성전자가 미국과 비밀리에 협상을 해서 대만의 브라운관 생산 공장이 큰 손해를 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만의 기업들과 일반시민들은 한국에 대한 악감정이 있고, 한국제품 사용에 대해 크게 반발한다. 이러한 현실을“중한수교 20주년이 대만선교에 미친 영향”에 관심을 갖는「중국을주께로」의 독자들과 편집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길거리에서 분풀이로 삼성 텔레비전을 부수고, 또한 TV 정치논쟁프로그램에서 MC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공격하였으며 관객들을 동원하여 거침없이 한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몇 해 전 어떤 사람이 공자와 서시(西施)가 한국사람이라는 주장을 펼쳐 중국과 대만의 중국인들에게 큰 반감을 사서 한국에 대한 감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대만과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좋은 관계 
지난 20년간 대만과 한국 양국은 수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대만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더욱더 저자세와 냉철한 태도를 유지했다. 최소한 교회 기도회 중에 대만과 한국 양국의 관계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했으며 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두 나라의 관계 개선과 회복을 위해 힘쓸 수 있도록 기도했다. 대만교회와 대만의 그리스도인들은 양국 간의 갈등과 불화가 모두 정치가들의 조작이며 따라서 한국교회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관여했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대만교회의 목회자와 많은 성도들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깊다는 걸 몹시 부러워한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훌륭한 목회자들의 깊은 아름다운 영성을 닮고 싶어 한다. 또한 한국의 수만 명이 다니는 대형교회의 부흥된 모습과 담임목사님의 믿음과 영성이 담긴 간증에 감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40년간 대만에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와 성도들이 한국교회를 방문하여 교회성장의 비결을 배워갔으며 끊임없이 모방하며 새로운 성장비결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근래 20년 동안의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업적은 기존의 선교강국인 미국교회를 훨씬 앞섰다. 대만교회는 한국교회의 선교 업적을 부러워하면서 아직 선교에 있어서 많이 부족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만, 한국과 단교된 후, 교회성장을 위해 해외 교회를 탐방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만이 한국과 단교된 지난 20년간 대만교회와 한국교회 간의 교류는 이전 보다 다소 저조한 상황이었다. 또한 1990년대부터 미국교회에서도 만 명 또는 수 만 명의 성도가 다니는 초대형교회가 생겨남에 따라, 이들 교회의 부흥된 모습은 침체된 서구교회에게 생기를 불어넣었고 대만교회의 목회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당시 대만의 한 선교단체인“서기 2000년 복음운동(公元兩千年福音運動)”의 인도 하에 대만의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그 옛날 대만에게 복음을 전해준 미국, 캐나다, 유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심지어 인도의 교회와 영성에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받은 목회자에게 배우려고 한다. 십 수 년 전에도 싱가포르에 두 교회가 셀 교회로 크게 성장을 했다. 싱가포르교회와 대만교회는 문화적으로 서로 친근하고 다 같은 중화언어권이라 서로 교제함에 있어서 별도의 통역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이점이다. 대만의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과 헌신한 청년들이 싱가포르로 신학을 하러 갔으며 그곳에서 교회 성장의 비결을 배우고 돌아왔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그 수는 대만 청년들이 근래에 미국, 캐나다, 유럽 등으로 유학을 떠난 수와 비슷하다. 

지난 20년간의 대만교회의 급성장 
지난 20년간 대만교회는 천 명이 되는 교회가 다섯 군데 밖에 없는 상황에서 2010년 성도가 만 명 이상 되는 한 교회가 생겼다. 천 명 넘는 교회도 오십 군데나 되고 여러 교단 마다 골고루 분포해 있다. 대만의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20년 전 2%도 안 됐지만 이제는 5%를 넘는다. 가톨릭을 포함하면 6.44%가 되고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에 그리스도인 비율은 11%를 돌파했다. 이 모든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한국교회의 부흥의 물결이 대만교회에 흘러들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 동안 대만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무릎 꿇고 기도해준 사랑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대만교회를 대표해서 한국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비록 대만과 한국 양국 간에 정계와 기업계 그리고 민간부분과 스포츠 분야에 계속해서 살얼음판을 걷고 있지만 대만교회와 한국교회의 성도간의 교제는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1972년 여의도에서 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던 그때부터 대만교회는 한국교회를 형님 교회로 생각하면서 교회성장의 비결을 배워왔다. 오늘날 대만교회가 이만큼 크게 성장한 결과를 본다면 한국교회의 성장비결을 배운 것은 완전하게 효과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사랑의 모습에 대해 대만교회가 받은 감동과 감격은 그야말로 확실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앞 다투어 선교지로 나아가다 
중국은 1976년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1979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주장했다. 1987년 대만정부는 대만 국민들에게 중국에 있는 친척 방문과 관광을 허용했다. 1992년 대만과 한국이 단교한 그 해에 대만 기업가들 사이에 대대적인 중국투자 붐이 일어났다. 그중 많은 대만교회와 성도들이 그 기회를 타고 중국에 있는 삼자교회나 가정교회와 결연을 맺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 대만교회는 오늘날 같이 부흥된 상황이 아니었다. 중국 내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를 양육훈련 하는 것은 모두 대만의 중소형교회(예배 인원수가 수 십 명 혹은 3백에서 5백 명의 교회)가 인도하였으며, 대부분 일 년에 서너 번 소규모의 게릴라식 양육훈련이였다. 그에 반해 중국선교사역에 뛰어든 한국교회 규모는 대만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다. 그런데 한중 문화차이로 인한 시행착오와 중국공산주의 정치권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한국교회의 중국선교사역은 불가피하게 제한을 당하고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중국선교를 위해 대만교회를 준비하시다 
그동안 대만교회는 근 십 몇 년간 많은 교회가 뚜렷한 성장을 보였고 더 나아가 노력 끝에 교회성장의 독특한 모델을 발견했다. 그중 한국, 싱가포르, 미국, 인도네시아 등 여러 곳의 교회를 통해 대만교회 고유의 성장 모델을 찾아냈다. 그래서 그것을 중국교회에 실험하기로 했다. 중국과 문화, 언어가 통하는 대만사회는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의 상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만에 있는 중국 문화와 언어 그리고 사회 시스템과 가치관은 중국보다 더 중국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과 중국교회는 대만을 몹시 부러워하고 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대만교회는 중국의 삼자교회나 가정교회 모두에게 호감을 주었고 보다 더 쉽게 그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이는 대만과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함에 있어서 제일 큰 차이점이다. 이런 문화적 동질감은 신앙심이 깊고 재정이 탄탄한 한국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이 따라 올 수 없는 이점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한국인 선교사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국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선교단체의 중국교회에 대한 헌신을 누구도 대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만교회의 20년간의 타문화권선교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대만교회는 1950년과 60년대에 이미 해외 선교에 눈을 뜬 적이 있으나 선교대상자는 모두 다 해외로 나간 화교들이었다. 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딜 가든지 먼저 같은 유대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서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날 때였으며 전세계적으로 무역왕래를 시작하게 되었고 국제적인 항공 산업이 발달됨으로 각 나라를 편리하게 다닐 수 있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많은 나라의 선교사들이 대만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대만교회 역시 자극을 받아서 많은 선교사를 외국으로 파송 해 했다. 그중에 제일 큰 원인은 1970년에서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만유학생들이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으로 떠나게 된데 있다. 그중에 그리스도인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는 유학을 가게 된 학생들이 그 나라에서 예수를 믿고 성경 반을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들은 훈련받은 목자가 필요했고 대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말레이시아 화교교회에서 목회자를 파견해서 이들을 목양했다. 그래서 원래 대만이나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목회하던 목회자들이 새로운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있는 교회로 발탁되어 간 것을 좋게 여겨 선교사로 불러 주었다. 

성과가 좋지 않았던 타문화권선교 
또 다른 면에서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교회의 중국인 신학교육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본래 서양 교단에서 파송받은 선교사들이 설립한 신학교와 신학교육자들이 현지의 중국인 신학자들을 교육시키고 그들을 미국, 영국 그리고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제1세대 중국인 예비 신학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국에 돌아오지 않았으며, 유학을 떠난 국가에 남아서 목회를 했는데 그들이 목양한 교회는 대부분 중국인 유학생과 중국인 이민자 교회이었다. 그러나 서양선교사의 뒤를 이어 모국에 돌아 온 중국인 예비 신학자들은 화교 교회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그곳 교회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대부분 중국인 교회의 타문화권선교는 여전히 해외에 있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또 많은 대만선교사들이 중앙아메리카, 남미 쪽으로 선교사로 나갔지만 그들의 선교대상자 역시 현지에 사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화교들 위주였으며 거의 현지인들에게 선교한 선교사는 없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근래 몇 년 동안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 중에는 이미 예수를 믿는 이들도 있으나 또 어떤 이들은 대만에 건너와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국내외에서 영향력 있는 주의 종들이 된 반가운 소식도 있다. 

동남아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 
대만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동남아의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으로 가기위해 파송을 받았다. 그곳에는 중일전쟁 때 운남, 미얀마 지역으로 끌려간 후 미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병들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그들이 남긴 국적불명의 2, 3세 자손들도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대만교회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대만정부도 그들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며 암암리에 지속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 중국공산당을 견제하고 있었다. 대만교회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사용되는 언어는 여전히 중국어를 위주로 한다. 이 지역에는 많은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있는데 그들은 중국,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 여러 나라를 다니고 있으며 중국어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하다. 그래서 대만교회의 사역자들에게는 언어가 큰 이점이지만 한편으로는 사역의 확장을 제한시키는 격이 돼 버렸던 것이다. 중국어를 할 수 있는 한일전쟁 때 남겨진 노 병사들의 후손들과 중국어를 하는 소수민족에게만 선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문화권선교의 후발주자, 대만교회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비(非)중화권 지역에 선교를 나가게 되었다. 예를 들어 북 아프리카, 남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이다. 그런데 적극적인 타문화권선교를 얘기 하자면 1990년대 후반부, 심지어 21세기 초부터 에서야 시작됐다고 말 할 수 있다. 대만교회가 타문화권선교를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 비해 늦게 시작한 이유는 1980년 이전의 대만 정부는 그때까지 여전히 반공사상을 갖고“중국을 무력으로 항복시켜 통일중국을 이루는 꿈”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되었고, 대만 정부에서 장개석(蔣介石) 총통 일가의 시대가 일단락을 짓고 난 후 에야 대만의 교회는 비로소 좁은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대만에서 자란 사람들의 외국어 능력이 보편적으로 뒤처져서 중국어만 하는 반면에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은 중국어뿐만 아니라 민난어(萄南話: 복건성 남쪽 지역의 방언), 객가어(客家話: 광동성 매현 지역의 방언)도 잘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화교들은 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어는 물론 중국어의 방언인 광동어(廣東話), 민난어, 조주어(潮州話), 태산어(台山話), 해남어(海南話)를 할 수 있으며 말레이시아 말과 인도네시아 말도 유창하게 한다. 그래서 타문화권선교에서 매우 중요한 수단인 언어가 발달된 이들에게는 선천적으로 타문화권선교를 잘 하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그에 비해 대만에서 헌신한 중장년층의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국제공용어인“영어”는 여전히 어려운 언어임에 틀림없다. 

홍콩의 화교들은 대만보다 더 일찍 중국에 진출해서 투자를 하고 공장을 세웠다. 그런데 홍콩화교들은 표준 중국어를 잘하지 못해서 주로 잘하는 광동어를 쓰는 광동지역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홍콩의 교회에서는 전적으로 광동성 안에 있는 중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만교회 역시 정부가 중국에 대해 친척 방문과 경제투자를 개방하기 시작한 후 자연스럽게 가까운 언어권의 복건성을 위주로 그 다음엔 북쪽 연안지방으로 올라가 이제는 중국 내륙 지역에도 확산 되었다. 대만에서 사용되고 있는 민난어 이외에 대부분 국민들이 쓰는 꿔위(國語)는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어(普通話)와 똑같아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회성장 캠페인 
대만의 교회는 1989년부터“서기2000년 운동”(公元..千年福音運動)에 참여했었고 초교파적인 연합사역 선교단체를 조직하였다. 우선 서기2000년까지 대만의 교회가 5배의 성장률과 성도 수가 200만 명으로 성장할 것과 200명의 타문화권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대만의 모든 교회가 함께 마음을 모아 협력함으로 2000년이 되던 그해에 200명의 해외 선교사 파송의 목표를 달성했으며, 204명이 넘는 타문화권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했다. 또한 외국의 2400명의 선교사(주로 인도에서)를 입양했다. 십 년간 대만의 기독교인은 557,483명에서 780,529명으로 늘어났으며 성장 비율은 40%이며 대만교회의 수는 3127개에서 3961개로 26.67% 성장했다. 이러한 성과는 비록 처음에 정한 목표와 여전히 차이는 있지만 그동안 모든 교회들이 한 마음으로 노력해서 대만교회가 부흥의 비결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대만교회 여전히 발전 공간이 매우 크고 넓다 
대만에는 외국 부흥강사들이 많이 온다. 또 한국, 미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여러 주변 국가의 교회가 빠른 성장을 이루는 것은 항상 대만교회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대만의 교회와 전임사역자들 중에 현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팀을 만들어 교회를 탐방 가고 일꾼을 보내 훈련받게 한다. 거기다가 점점 더 많은 전임사역자들이 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만과 한국이 단교된 전후의 대만교회의 선교 현황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교단에서는 1998년부터 진정한 타문화권선교 사역이 펼쳐졌는데 네팔, 인도, 부탄, 방글라데시, 미얀마를 대상으로 사역한다. 비록 그 규모와 성과는 아직도 미비하지만 이제는 이전에 주로 동포에게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탈피해서 현지인에게 선교를 하게 된 것이다. 2011년 말, 대만의 모든 교회와 교단 그리고 파송단체에서 55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2만 명이 넘는 선교사 파송 대국인 한국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대만교회가 지속적으로 힘써야 할 부분이며, 그래서 한국교회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필자 약력
1946년 생. 타이완 타이난시(台灣台南市)에서 태어났으며, 중국문화대학교 동양어학과에서 러시아어를 전공(1965-1969년 문학학사), 아시아침례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경력
1972년-1975년 대만침례교신학교 M. DV 졸업
1975년-1976년 침례교 쩐광탕교회(眞光堂) 전도사
1976년-1980년 부산중화기독교침례교회 담임목사
1980년-2007년 대만침례교신학교 전임교수; 부원장 및 학과장
1998년-2007년 아시아침례교연합회 선교부 총무연임(1998년 3월부터 사역자들과
는 홀로 네팔, 부탄, 인도, 방글라데시 등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역에 헌신을 했다.)

2003년 -2007년 대만침례교연합회 해외선교부 부장
2007년- 현재 대만침례교연합회 총무


번역 | 차이나 간사 ·본지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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