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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5.1  통권 131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3237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대만 맹인의 아버지, 캠벨 목사(Rev. William Campbell)

이번 호에는 대만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캠벨 목사(Rev. William Campbell, 1841~1921, 甘爲霖)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캠벨 목사는 영국 장로회에서 두 번째로 대만에 파송된 선교사로 47년 동안 대만선교에 헌신하였는데, 맹인학교를 세워 그들을 지도했기에“대만 맹인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는 대만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그에 관련된 책들을 출판하여 대만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가 대만선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다양하고 깊이가 있었다.

캠벨 목사의 대만선교
캠벨 목사는 1841년 4월 영국 스코틀랜드 남부의 글래스고(Glasgow)에서 태어났다. 그는 글래스고대학(Univ. Glasgow)을 졸업하자마자 자유교회신학교(Free Church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71년 6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모험심이 유난히 강했던 캠벨 목사는 30세 때 영국 장로교회 대만선교사로 지망하여 허락을 받았다. 1871년 7월 19일 런던노회에 속한 이즐링턴교회(Islington Church)에서 파송을 받고, 그해 9월 7일 리버풀(Liverpool) 항구를 떠나 홀로 대만을 향해 출발하였다. 10월 말 그는 샤먼(厦門)에 도착하여 영국 장로교회 샤먼 선교사인 더글러스(Rev. Carstairs Douglas) 목사의 도움으로 그곳에서 대만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2월 10일, 그는 샤먼에서 조그만 범선을 타고 대만에 도착하였는데 도중에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모든 물건을 잃어버리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천신만고 끝에 다고우(打狗: 지금의 까오슝)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대만의 수도인 안핑(安平: 지금의 타이난)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대만선교에 착수한 그는 영국 장로교회에서 대만에 파송한 두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영국 장로교회가 첫 번째로 대만에 파견한 선교사는 리치에(Rev. Ritchie, 李彧) 목사인데, 그는 1867년에 대만에 도착하여 다고우에서 12년 동안 선교하다가 1879년 9월 29일,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그곳에 안장되었다. 

캠벨 목사는 대만에 부임하여 1개월도 안 되어서, 현지 교인들과 함께 타이난(臺南) 부근의 무처(木冊), 깐쯔린(柑仔林), 깡쯔린(崗仔林), 바마(拔馬) 지역의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지 상황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존의 선교지를 어느 정도 파악한 캠벨 목사는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여전히 많은 것을 발견하고, 타이난을 선교기점으로 하여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불모지를 적극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부지역의 산악지대에 근거하는 원주민들과 펑후(澎湖) 등 비교적 낙후된 섬들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산간벽지와 낙도 등에 복음을 전하는데 누구보다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부지역 산지족의 복음사역
1872년 10월 14일 캠벨 목사는 동역자인 의사 딕슨(Dr. Mathew Dickson)과 18명의 신도들을 대동하여 중부 산악지대를 방문하여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58명의 원주민들의 인도를 받아 더 깊은 산악지대를 탐험하며 선교지를 개척하였다. 이틀간의 도보여행을 거쳐 마침내 지금의 푸리(璵里)에 도착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미개한 원주민들과 최초로 접촉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원주민들은 쉽게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가 반년 후에 다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그들 스스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73년 4월 27일 주일에 푸리 근처의 세 곳의 교회에서 4,50명의 원주민들이 큰 나무 밑에서 매우 경건하게 예배를 드렸다. 캠벨 목사는 이곳에서 3주 동안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도왔고 추장의 열병까지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그는 그들의 신임을 얻어 더 깊은 산속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며 접촉하는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캠벨 목사는 외국인으로는 처음 르웨탄(日月潭)을 발견하였다. 옅은 안개가 자욱한 르웨탄을 발견한 캠벨 목사는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1627에서 1637년까지 대만에서 선교한 최초의 네덜란드 선교사인 칸디두스(Candidus)의 이름을 따서, 이 호수를 칸디두스호라 부르며 그의 선교활동을 기념하고자 하였다. 르웨탄은 현재 대만에서 산악지대에 위치한 유일한 천연적인 호수로 대만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발전하였다. 그해 9월 캠벨 목사는 다고우의 영국영사 불록(T. L. Bullock)과 미국 박물관 관원 스티얼(J. B. Steere)을 대동하여 이 호수를 다시 방문하였다.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부근의 산악지대에 진입하여 깊은 산속을 탐험하였다. 그때 마침 서로 다른 부락의 원주민들 간에 상거래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부족 간에 심한 충돌이 있었다. 그들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60여명의 원주민들에 포위되어 생명이 매우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다행히 스티얼이 권총으로 원거리의 나뭇잎과 가지를 명중시킨 것을 원주민들이 보고 놀라 도망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대만 사회는 이민사회이고, 정부의 공권력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각 부족들은 재산과 생명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켜야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 간의 충돌과 싸움이 빈번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용감한 용사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에 대만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은 언제나 이러한 생명의 위험이 도사리는 환경 속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해야 했다. 캠벨 목사는 이러한 위험한 환경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대만 중부지역과 산악지대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결과 대만 중부지역 선교사역의 기초를 성공적으로 건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펑후(澎湖)섬의 선교사역
펑후는 대만 부근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었다. 펑후는 비록 대만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대만과는 달리 일찍이 송나라 때부터 중국의 행정권에 귀속되어 중국 본토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가 청나라에 와서야 대만과 펑후는 하나의 행정권에 병합하여 청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청나라 때 대만에 상륙한 선교사들은 대만선교를 우선으로 하였기 때문에 펑후까지 선교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캠벨 목사는 1886년 4월 그의 대만 동역자 까오장보오(高長伯)와 함께 대만 중부의 장화(彰化)지역 순회전도를 시행하였다. 그들은 이 지역을 돌아본 다음 조그만 범선을 타고 펑후로 건너갔는데, 비록 먼 거리는 아니지만, 3일 동안 노력하여 6월 6일 겨우 펑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 조그만 집을 세를 내어 지내면서 복음의 전초기지로 사용하였다. 

캠벨 목사는 펑후에서 한 달 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너무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었다. 부득이 까오장보오를 그곳에 남겨두고 홀로 샤먼에 가서 병을 치료한 다음 다시 돌아와야 했다. 캠벨 목사는 평소에 매우 건강한 목사였다. 하지만 펑후의 강열한 태양과 또 쌀이 생산되지 않는 이 지역의 특성상, 일 년 이상을 발효시킨 심지어 구더기까지 생긴 섬 특유의 음식을 매일 먹다보니 건강한 캠벨 목사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병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펑후의 생활조건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복음을 전하는 캠벨 목사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이 되었고 변화 받아 함께 복음사역에 동참하였다. 

캠벨 목사는 병으로 펑후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재빠르게 대만의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졌다. 특히 남부지역의 형제자매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 낙도와 벽지선교에 관심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펑후 선교회”를 조직하여 장기적으로 펑후지역을 선교하기로 하였다. 그 후 펑후는 대만교회의 선교구가 되었다. 선교업적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캠벨 목사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맺어진 선교의 아름다운 열매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바이수이시(白水溪)교회 사건
비록 캠벨 목사가 벽지와 낙도까지 매우 활발히 복음을 전했지만, 그래도 그의 복음사역의 중심지는 타이난과 그 부근이었다. 그는 이 지역을 자주 순회하며 이 지역의 한인(漢人)들은 물론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 지역의 중요한 교회 중에 하나는 바이수이시(白水溪)교회였다. 이 지역은 우즈까오(吳志高)라는 깡패두목은 정부와 협력하여 지방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갖은 행패를 부리며 백성들을 괴롭히고 갖은 착취를 일삼았다. 지방 관리들도 그의 행패를 잘 알고 있었지만, 과거의 공로를 인정하여 모른척하며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그의 행패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바이수이시교회는 1874년 캠벨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교회가 건립되자 이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로 귀의하여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들은 근처의 유명한 사찰 비윈사(碧云寺)나 따시엔사(大仙寺) 등에 과거와 같이 헌금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우즈까오는 교회에 매우 심한 불만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교인들을 괴롭혔다. 특히 우즈까오는 이곳에 교회를 건설해서 자기 첩 묘지의 풍수를 파괴한다는 이유로 교회를 철거시키도록 갖은 폭력과 행패를 불사하였다. 1875년 1월 28일, 캠벨 목사는 우즈까오가 부하들을 동원하여 교회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긴급히 교회에 도착하여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그들을 안정시켰다. 과연 우즈까오는 심야에 부하들 40명을 동원하여 죽창과 횃불을 들고 교회를 공격해 약탈하며 불을 질렀다. 캠벨 목사는 이들의 공격으로 창에 찔려 심한 부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만은 구했지만, 이 사건으로 노부인이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고, 교회는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튿날 캠벨 목사는 관청에 이 사건을 신고하고, 영국 영사에게 보고하여 범인들을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범인들을 체포하지 못하고 부득이 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맹인선교의 선구자
캠벨 목사는 타이난 지역에 맹인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에 대해 특히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대만에는 대략 17,000여명의 맹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적당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사회의 버림을 받고, 거지나 점쟁이 아니면 막노동 등에 종사하여야 했기에 생활환경이 매우 낙후된 상태였다. 이 맹인들은 선천적인 질병으로 맹인이 되기도 했지만 후천적인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맹인이 된 경우도 상당수가 되었다. 캠벨 목사는 전에 원왕(溫旺)이라는 맹인을 만났는데 원왕은 이 지역 깡패인 우즈까오(吳志高)의 미움을 받고, 그의 부하들의 폭력으로 눈알이 빠져 맹인이 되었다고 고백하며, 자기와 같은 경우의 사람들이 100명이 넘는다고 폭로하였다. 캠벨 목사도 어렸을 적에 조금만 잘못하였더라면 소경이 될 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캠벨은 그들을 도와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싶은 의욕으로 충만했다. 

1887년 1월 31일, 그는 휴가차 영국에 돌아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영국의 장로교회에 그의 맹인사업계획을 보고하고, 필요한 경비 등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는 점자판을 직접 설계하여, 맹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글래스고 선교회에서는 그의 맹인선교를 위해 500파운드를 특별히 헌금하기도 하였다. 그는 영국에서“맹인점자술”을 도입하여 대만 맹인들을 가르치고, 1890년 2월에 자기 집에서 맹인학교를 세우고 맹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지금의 타이난 계총학교(啓聰縯校)의 자리에 세 들어 조금 더 규모있는 맹인학교로 확장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쉰구탕(訓騫堂)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대만에서 최초로 세워진 맹인전문학교가 되었다. 

1895년 청나라는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여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하게 되었다. 1896년, 일본이 대만을 통치하기 시작한 두 번째 해에 캠벨 목사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부 관리들을 설득하여 일본 정부가 직접 맹인학교를 경영하도록 건의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허락하고 타이난에 공립맹인학교를 세웠다. 그 이름은“대남자혜원맹인교육부(台南慈惠院盲人敎育部)”라 이름을 지었다. 1915년에 이 학교를 신축하고 농아들까지 수용하여 가르쳤다. 

캠벨 목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점자법과 인쇄기를 개발하여 맹인들이 성경과 기타 다른 책들을 통해 공부하도록 하였고, 또 교회신문에 맹인사역들에 대한 소식을 전하여 대만의 전 교회가 맹인사역에 참여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맹인들 중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학비를 열심히 모금하여 그들을 도왔다. 또 그들이 공부하고 돌아오면 이 맹인학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다른 맹인들을 돌봐주도록 하였다. 1915년 일본 정부는 캠벨 목사의 맹인들에 대한 공이 매우 지대하다고 인정하여 그에게“훈오등쌍광욱장(勛五等雙光旭章)”을 수여하였다. 대만교회에서는 그를“대만 맹인의 아버지”라고 칭하고 공로를 기념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명실상부한 칭호라고 생각한다.

대만 역사와 언어의 연구
캠벨 목사는 대만의 벽지와 낙도 등의 선교와 맹인들 선교에 혁혁한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대만 역사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겨놓았다. 네덜란드가 대만을 38년(1626-1664) 동안 통치한 적이 있었는데, 캠벨 목사는 그 당시의 사료들을 수집하고, 중요한 것들을 번역하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1889년에 출판한“대만선교의 성공(台灣宣敎的成功)”과 1903년 출판한“화란통치하의 대만(荷蘭統治下的台灣)”이라는 책들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대만 역사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캠벨 목사는 어느 곳에 가든지 늘 손에 연필을 쥐고,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했다. 이러한 습관이 일궈낸 그의 저술은 진실성이 높고, 객관성이 높아 대만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915년 캐나다의 록코스 신학교에서는 그의 선교업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캠벨 목사는 언어에도 능통한 선교사였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 이외에도 샤먼어(민난어), 일본어, 네덜란드어에 능통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점자를 연구하여 대만 맹인들이 통용할 수 있는 점자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는 후에 오는 외국 선교사들을 위해“샤먼음신자전(厦門音新子典)”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니 그의 선교의 영역이 얼마나 다양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자전은 현지인 린진성(林錦生)과 천따로우(陳大己)의 참여와 도움으로 1913년 7월에 출판되었다. 이 자전은 약 15,000자를 수록하고 있고, 읽기 쉬운 백화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 샤먼어를 배우고 연구하는데 매우 편리했다. 

1917년 2월 21일, 캠벨 목사는 76세의 연로한 몸으로 47년 동안 선교에 헌신했던 대만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대만선교와 대만의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집까지 팔아서 선교에 헌신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는 경비가 문제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후회하지 않고, 감사와 축복을 잊지 않았다. 비록 그들 부부는 떠났지만, 그의 두딸은 대만에 남아서 부모님의 선교사명을 감당했다. 그들이 대만을 떠날 때 대만교회에서는 성대한 환송식을 거행하여 47년 동안 헌신적으로 일한 캠벨 선교사내외에 깊은 감사와 노고를 기념하였다. 캠벨 목사는 영국으로 돌아가 4년 동안 은퇴생활을 하다가 1921년 9월 7일 영국의 본머스(Bournemouth) 고향에서 소천하셨다. 비록 캠벨 목사는 대만을 떠났지만 그의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열정적인 선교정신은 여전히 대만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대만교회는 물론 후에 대만에 온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귀감이 되고 있다.


필자주 : 지난 1월 아버님이 92세의 연세로 소천하시고, 여러 가지로 분주하여 글을 싣지 못해 독자 여러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버님께서“천국이 참 좋다”라고 하시면서 소천 하셔서, 저희들에게는 더없는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고 특권인 것 같습니다.


강인규 | 대만 중원대학교 응용중문어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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