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로 한국 관객에게 알려진 감독 천카이거는 2010년 말에 신작《조씨고아(?氏孤?)》를 선보였다. 이는 춘추시대 조씨 가문의 이야기로 좌전《左?》과 사마천(司??)의《사기(史?)·조세가(?世家)》에 실려 있고, 13세기 원대 기군상(紀君祥)이《조씨고아(?氏孤?)》라는 희곡을 제작하여 유럽까지 전해진 중국의 첫 번째 희곡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735년 프랑스에서 불어로 처음 번역되었고 1738년에는 영역본으로 출간, 1748년에 이탈리아 창작 가극인《중국영웅》으로 상연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조씨고아(趙氏孤兒)〉를〈중국고아L’orphel in de la Chine〉로 번안해서 1755년 파리에서 공연하였으며, 무려 190여 차례 공연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볼테르는 당시 신?구교간 종교적 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툴루즈의 상인인 신교도 장 칼라스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이들을 죽였다는 혐의로 피소되어 사형을 받자, 이에 분개한 볼테르는 이 사건에 개입하여 죽은 자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가족들이 피해 보상을 받도록 도왔으며 구교의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였다. 볼테르는 계몽주의 철학을 실천하며 부조리한 송사에 개입하여 결백을 입증했던 자로서, 억울하게 멸문멸족 당한 조씨고아 이야기를 담은 이 희곡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볼테르는 유럽의 황권숭배와 도덕이 타락한 사회를 비판하고 이상적인 도덕을 외치는 계몽운동을 전개하여〈중국고아〉를 기존의 복수와 충효를 강조하는 관점보다는 이성과 인애에 초점을 맞춰 내용을 개편하였고 인간본연의 도덕을 중시하여 원대 기군상의 원작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줄거리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중국의 춘추시대에 주나라 왕실의 쇠퇴와 더불어 제후들이 발호하던 시기에 진(晉)나라의 재상인 조순은 당시 권문세도가로서 그의 사위는 당시 국왕이었고 아들 조삭은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았다. 장수 도안고는 진(晉)나라의 국왕과 조씨 가문에 불만을 품고 조삭의 전승 축하연에서 음모를 꾸며 국왕을 죽이고 조씨 가문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웠다. 또한 재상인 조순를 비롯하여 장남 조삭 장군과 친족 300여 명을 참혹하게 도륙하였다. 이때 조삭의 아내 장희는 의사 정영의 도움을 받아 남자아이를 낳고 도안고의 명을 받았던 한궐은 장희의 자결로 인해 정영이 조삭의 아들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이로 인해 한궐은 문책을 당해 한쪽 눈을 잃게 되고, 다급해진 도안고는 성안의 갓난아이를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정영은 조씨 가문의 지인(知人)인 공손저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불행히도 공손저구는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도안고는 정영의 아내가 안은 아이를 조씨 가문의 손자로 착각하고 정영의 아들과 아내를 죽였다. 정영은 조씨 가문의 손자를 바쳤다는 공로를 핑계 삼아 도안고의 문객을 자청하여 조씨 가문의 고아는 양아버지 도안고에게 검술을 배우고 서당을 다니며 차츰 양아버지와 부자의 정을 쌓게 된다. 오랫동안 앙심을 품었던 한궐이 도안고를 활로 쏘고 난 후 정영은 마침내 도안고에게 조씨고아의 신분을 밝히고 보호하려다 도안고에게 칼을 맞자 조씨고아가 가문의 원수인 도안고를 죽이게 된다.

복수를 낳는 교만과 질투 
조씨고아(?氏孤?)의 본명은 조무(?武 BC598－BC541년）로 춘추(春秋)시대 진나라 대부(大夫) 조순(?盾)의 손자이자 조삭(?朔)의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진 성공(晋 成公)의 여동생으로 역사서에는 조장희(?庄姬)라 불렸다. 영화 내용은 역사서의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고 오히려 원대 희곡에 가깝다. 어느 날 국왕은 조삭이 승전하고 돌아오는 마차에 새총을 쏘아 말을 놀라게 하여 자객이 들었다는 소동을 일으키고 그 책임을 도안고에게 전가시킨다. 진나라 장수 도안고는 국왕과 조씨 부자 앞에서 돌맹이를 삼키며 억지 사죄를 한다. 전장에서 자식을 잃었던 도안고는 전공을 쌓은 젊은 장군 조삭에게 시기심을 느끼고 조씨 가문의 위세를 두려워하는 무능한 국왕에게 치를 떨게 된다. 굴욕과 질투심으로 절치부심하면서 복수를 결심했지만 복수로 인한 미래의 공포를 떨치지 못하여 조씨 가문의 멸족을 선택하였다. 지위가 높을수록 겸양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를 보일 때 다른 사람의 질투를 막을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적을 만드는 불신 
사람들과 건전한 신뢰관계를 쌓지 못한 도안고는 조씨고아에게 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은 적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지만 이는 매우 어렵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300명을 도륙하고서도 매순간 마음의 불안함을 달랠 수 없었다. 양부 도안고는 조씨고아에게 자신의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않으면 적이 없게 되지만 이는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라고 밝혀 타인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으면 신뢰관계를 쌓을 수 없음을 자인하였다. 도안고는 자신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아이를 살려주겠다는 거짓말로 정영의 아내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죽였다. 조씨고아는 지붕에서 뛰어내리면 받아주겠다는 양아버지 도안고의 말을 믿고 뛰어내리지만 도안고가 받아 주지 않아 땅바닥에 떨어졌다. 도안고는 조씨고아에게 세상 누구도 믿지 말라고 가르쳤다. 세상 모든 이를 믿지 않고 적으로 만든 불신은 결국 복수를 불러 일으켰다. 이에 반해 정영은 조씨고아를 지붕에서 받아주었다. 조씨고아는 정영이 받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다시 뛰어내린 것이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건전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가족 간에도 믿음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서로 확인할 수 있다.

복수를 가장한 폭력에 반대
한궐은 정영에게 왜 도안고를 독약을 타서 죽이지 않았냐고 물었다. 정영은 고아가 자라서 도안고의 앞에서 이 아이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게 한 후에 복수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궐은 서로 사랑한 후에 그를 배신하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영화에서는 누구를 위한 복수인가를 묻고 있다. 도안고는 정영에게 무슨 권리로 아이에게 복수를 하도록 하는지 물었고,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죽일 수 있겠는가를 물었다. 영화에서는 복수가 과연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또한 조씨고아가 정영의 처자식을 죽인 원수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한 복수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 타당한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영화에서는 어른이 어린 아이에게 생사여탈의 권한이 없듯이, 어린아이가 어른을 대신해서 복수를 하게 하는 것은 생명 윤리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감독은 어린 소년에게??살인??이라는 잔인함을 용인하기 어려웠다고 밝히며,??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라는 복수의 순환을 염려하였다.    정영은 자신이 도안고를 죽이기보다는 성장한 조씨고아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도안고에게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깨닫게 하는 것이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영은 마지막에 살륙의 추악함을 깨닫게 되고 조씨고아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만류하게 된다. 결국 정영은 도안고와 조씨고아의 결투에서 희생자로 생을 마감하였다.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으며 폭력적인 복수는 또 다른 희생을 낳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평범한 삶속의 행복 
영화에서는 복수를 끊는 효과적인 방법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씨고아의 어머니 장희(庄姬)는 자결을 선택하며 정영에게 아들이 복수를 모르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해주길 부탁하였다. 자식이 불행한 복수의 씨앗이 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마지막 장면인 원수 도안고와 대립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조씨고아는 복수를 모르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로 묘사하는데 치중했다. 자신의 부모를 죽인 양부 도안고에게 효성을 다하였으며, 도안고가 한궐의 화살에 맞자 조씨고아는 양부를 살리고자 정영에게 치료약을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아버지로 여긴 정영보다 평소 자신을 귀여워해주는 양부에게 더 정이 가는 천진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평범한 부자와 순진한 어린아이에게 어두운 복수의 그림자는 거의 찾기 어렵다. 감독은 고전극에서 영웅으로 묘사됐던 정영도 보통사람으로 묘사하여 평범한 삶이 지위, 명예, 재화로 인해 야기되는 질투와 복수를 치료하는 명약(名藥)임을 시사했다. 

원수를 감동시킨 사랑
도안고는 복수의 씨앗을 멸하고자 조씨 가문의 아들과 손자를 제거하였지만 정작 자신이 양아버지가 되어 조씨고아를 키우며 부자간의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조씨고아가 조씨 가문의 손자란 사실을 다소 감지하고 있던 도안고는 15세의 나이로 전장에 나간 조씨고아가 적군에 포위된 것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부정(父情)을 참지 못하고 적군에게 돌진하여 조씨고아를 구출하였다. 조씨고아의 친부모를 죽인 원수였지만 조씨고아와 함께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며 자식은 적이 없길 간절히 바라는 보통의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도안고가 친부모의 원수인 것을 알고 달려드는 조씨고아에게 도안고는 몇 차례나 맞서기를 피하며 정영과 함께 떠나라고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칼을 들고 맞서다가 노기충천한 조씨고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도안고는 그동안 쌓아올린 부성애 때문에 자신의 마지막 적을 제거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잔인하게 300명을 도륙했던 도안고 조차 조씨고아를 키우며 부자(父子)의 정을 맛보았고 그로 인해 가족간의 진실된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정영은 도안고가 조씨고아를 사랑하게 하여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만 못하게 느껴지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부자간에 끈끈한 천륜의 정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 감독의 영화《투게더》에서 기차역에서 버려진 아이를 주워 정성을 다해 양육해가 아버지의 애타는 정을 연상케 한다. 이 영화는 아들을 잃고 사랑에 굶주렸던 도안고가 원수의 자식인 조씨고아와의 진실된 사랑을 통해 상한 마음을 치유 받는 과정을 보여주며, 친자식이 아니어도 부자간의 두터운 사랑의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복수를 끊고 사랑과 생명을 주는 희생
영화의 영문 제목은 희생《Sacrifice（?牲)》이다. 장희, 한궐, 정영의 아내, 공손, 정영 등 여러 인물이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되었다. 심지어 잔인하게 살육을 저질렀던 도안고 조차 양아들에게 희생당했다. 생명은 지위의 고하나 비천과 관계없이 소중하고 존귀하다. 도안고는 조씨 가문의 손자를 찾기 위해서 성 안의 100여 명의 어린아이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마치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는 위한 헤롯왕의 광기와 유사하다. 정영은 도안고에게 자식의 은신처를 알려주어 어쩔 수 없이 조씨고아와 무고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친 자식을 희생시키는 선택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 정영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남의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식을 희생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영이 자신의 자식을 희생해서 남의 자식을 구한 영웅으로 떠받들지만 감독은 이 점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회의를 던진다. 도안고는 15년 전에 정영의 아이를 죽이려할 때 어째서 자기 자식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며 정영이 친 자식을 팔아먹은 무서운 사람이라고 꾸짖었다. 이에 대해 정영은 조씨고아의 부모가 이미 죽었고 다른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중국과 유럽에서 사람들은 《조씨고아》가 자기 자식을 희생시켜 남의 자식을 구한 위대한 이야기라며 감동받았다. 영화에서 보여준 부득이하게 선택한 불완전한 희생을 죄인의 속죄양이 되신 순결한 예수님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천카이거 감독은 원한을 소재로 한 고전 이야기를 진실한 사랑의 위력으로 승화시켜, 희생을 통한 생명의 존귀함을 전달하였다. 조씨고아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희곡, 소설, 영화로 개편되면서 중국 역사나 전통 문학에서 치중한 선과 악, 충신과 간신, 복수와 보은 등 전통사상의 대비나 충효, 인과응보를 앞세우기보다 볼테르의《중국고아》처럼 사랑과 화해를 통해서 폭력을 지양하고 사회의 반목을 제거하여 화목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인간의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고 존엄을 지켜주려는 생각과 노력이 현 중국의 정치와 문화에 한 줄기의 서광이 되길 기도한다.


김영철 | 한양대학교 중국학과 교육전담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