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대학시절 나는 체육학과 남학생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나의 첫사랑이다. 그는 운동선수였는데 질병으로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됐다. 그의 가정은 매우 복잡했다. 우리 집처럼 화목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욱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온천하가 그를 거부하는 것만 같아서 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다. 그와 나는 문화수준이나 생각, 성격, 습관 사이에 차이가 많았다. 그래도 나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나는 곧 임신했다. 그는 내게 물었다. “변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나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변했다. 나는 결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결코 이혼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현모양처였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일찍 퇴근해서 장을 봐서 밥을 하고 국을 끓여 먹였다.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시간동안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다. 내가 겪은 모든 고난은 헛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다.
이혼 나는 하루 종일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며 아이를 키웠다. 돈을 벌어 집도 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나는 그가 바람을 피울 것은 상상도 못했다. 외도 후에 그는 너무나 변해버렸다. 집에 들어와서는 이유 없이 화를 냈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욕을 했다. 그때 나는 집을 내가 샀기 때문에 그의 스트레스가 큰 거라고 생각했다. 이혼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화낸 이유가 참 간단하다는 것을. 외도!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나만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나는 혼자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결국 이혼을 했다.
나를 돌아봄 이혼 후 2년 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벼랑으로 떨어지는 고통이 너무나 컸다. 마치 파도에 떠밀려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긴긴 밤,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느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혼 후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주님을 믿고 난 후에, 가정배경, 성격차이, 교육의 수준, 같이 지내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문제들이 없다면, 결혼에도 문제가 없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랑도 변함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새로운 사랑 이혼 후, 나는 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직장 동료였고 유명한 시인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두 번이나 이혼했고, 여러 번 연애에 실패했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내가 여전히 옳은 사람이라고 여겼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원하지 않기에 내가 그를 사랑해야 하고 그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사랑의 달콤함을 느끼게 되었다. 시를 쓰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했다. 나는 우리 앞에 행복한 밝은 미래가 펼쳐지길 간절히 바랐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술주정을 했고, 거짓말을 일삼았으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 그 시간동안 나는 많이 지쳤다. 그때 내 친구가 문자를 하나 보내주었다. “우리는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야.” 나는 이 말의 뜻을 점차 알게 되었다.
마음의 평정을 회복함 이러한 감정 가운데 발버둥치고 있을 때, 나는 화가 마위앤위앤(馬媛媛)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좋은 친구사이가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한 게 아니었다. 그저 친구의 체면을 유지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나중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은 주일학교에 보냈고 나는 성가대에 들었다. 그런데 찬양을 부르고 나서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면 곧바로 잠자기 시작했다. 설교가 거의 끝 나가면 잠에서 깨어나 결론부분을 들었다. 신기하게도 두 달 후 나는 잠을 안 자게 되었다. 설교를 들을수록 점점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주일마다 예배당에 가는 것을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깊이 있는 설교를 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하나님께서는 친 자녀를 대하듯 나를 길러주셨고 건강히 자라게 하셨다. 내게 기적적인 간증은 없다. 특별히 크게 변화된 부분도 없다. 주님을 믿기 전에 나는 웃는 걸 좋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주님을 믿게 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예전에 나는 내 자신에게 강하고 용기를 내라는 의미로 웃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진심으로, 웃음을 참을 수 없기에 웃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무엇을 보든지 다 아름답게 보인다. 예전에 나는 햇빛이 싫었다. 늘 분발해서 강해지라고만 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햇빛은 내게 확신을 준다. 생명의 소망이 있다는 확신을.
전 남편에 대해 생각할 때 이제는 마음이 한결 평온하고 차분하다. 그와 나는 보통 친구 사이처럼 가끔씩 통화도 한다. 예전엔 그가 나를 거칠게 대했기에 쌓인 원한을 하나님께서 없애주셨다. 그러고 나니 그가 측은히 여겨졌고 이전보다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왜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했는지 묻지 않는다. 나의 깊은 아픔은 감사로 변화되었다!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평범한 여자들 같이 얻은 것을 잃을까 걱정만 하며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기에 그 무엇도 나를 요동케 하지 못한다. 예전에 나는 나의 의를 위해 내 자신의 노력에 의지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나는 이제 가장 좋은 결과는 주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준비해주시는 것이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비추시는 빛으로 인해 나의 부족함을 보게 되었다. 만약 내게 다시 아내의 역할을 감당할 기회를 주신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녀 계획 우리 집에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다. 아들이 열 살이었을 때, 딸을 하나 키우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렇게 하길 원하시는 것 같았다. 이 생각이 떠오르고 아이를 데려오기 까지는 보름도 안 걸렸다. 딸의 친부모님은 가난했다. 그 아이는 네 살이 되도록 이름 하나 없었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안이(安一)라고 지었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서 장래가 있게 되기를, 그 아이를 키워준 가정 가운데도 밝은 미래가 있게 하는 아이가 되기를, 또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예전에는 사람의 힘을 의지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양육하라고 맡겨주셨으니 키울 힘도 주실 것이다.
양육 하나님께서는 자녀양육을 통해 그분의 크신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기에 교육에도 효과가 있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의 말은 들어주지 않고 화만 내서 서로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셨기에 아이의 잘못을 용서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내가 기대하는 수준에 못 미칠 때는 내 자신에게 묻곤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보살펴주신 것 같이 이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가?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러모로 볼 때, 아이의 미래는 부모의 믿음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 믿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풍성한 지혜를 주신다. 금은을 단련하듯이 여호와께서 내 마음을 단련하신다. 아이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 손에 잠시 맡겨주신 것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아가고 있다. 나와 아이는 절대 평등하다는 것, 나와 아이는 함께 성장하고 있다는 것, 함께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을.
마음의 준비 나는 어린시절 꿈이 있었다. 한결같았던 그 꿈은 바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 꿈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하던 초기, 나는 불교가 인간 지혜의 정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가 있다면, 서로를 속이지 않아도 되고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면 사회에는 모순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조금씩 불교교리의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불교의 교리는 명확하고 정교했지만 그 교리의 근본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결국 공(空)에서 시작해 공(空)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무(无)로 돌아갈 뿐이었다. 나는 유가사상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매우 뛰어난 사상이기에 중국을 부흥하게 하는 방법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유가는 이상주의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사상이라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 결국 나는 기독교의 문 앞에 다다랐다. 그제야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길이 하나로 모아졌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 7:7-8)” 하나님의 말씀 한구절 한구절은 실제이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사람마다 회개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이 아니었다면, 평등과 민주주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민주주의적 삶을 산다고 해도 형식만 있을 뿐이지 지속될 수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시다!
출처 | 海外校园 第107期 번역 | 서가은, 본지 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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