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经>
道冲而用之,或不盈,淵兮似万物之宗。
挫其锐,解其纷,和其光,同其尘。
湛兮似若存。吾不知谁之子? 象帝之先。
<韓文>
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사만물지종.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담혜사약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字義>
道 : 5,000여 자(字)로 구성된 도덕경(道德經)의 약칭을 노자(老子)라 하고 있지만, 실상 노자란 대칭(代稱)이 본칭(本稱)인 도덕경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도(道)는 노자의 핵심 내용으로 천지만물의 근본(根本)을 의미한다.
冲 : 충(盅)의 가차(假借)로서 텅 빈 것, 차지 않은 것, 허공무상(虛空無象)을 뜻 한다.
或 : 항상. 盈 : 차다, 넘치다. 淵 : 깊다, 심오하다.
宗 : 종가, 근본. 挫 : 갈아서 무디게 한다.
锐 : 날카롭다, 뽐내다. 解 : 해결하다, 풀다. 纷 : 분쟁, 불화.
和 : 조화, 화목. 尘 : 티끌, 속세.
湛 : 깊고, 맑다. 吾 : 우리, 나. 象 : 같다.
<語譯>
「道」는 텅 빈 그릇과 같지만 그 속에 아무리 많은 것을 넣어도 가득 차는 법이 없으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만물의 근원(宗)과 같다. 날카로운 부분을 갈아서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고, 빛과 조화를 이루며 티끌과 함께 공존한다.
「道」는 그토록 무형무상(無形無象)하나 실제존재(實際存在)인 듯 하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 이전에 이미 존재한 듯 하다.
<解說>
老子는「道」의 體象(체상)을 “冲”, “盈”, “渊”, “宗”, “先” 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道」는 하나의 빈 그릇과 같은 공허무상한 것이지만 그 용적(容積)에 있어서는 천지 만물을 다 넣어도 오히려 여유 공간이 많이 남을 정도로 무한대에 속하며 만조(滿槽)라는 것이 없다.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그것은 만물의 본원(本源)과 같다.「道」는 그야말로 取之不盡, 用之不竭, 眞空妙有(취지불진 용지불갈 진공묘유)의 특질(特質)을 가지고 있다.
이어서 노자는「道」를 채득한 자에게 어떤 변화 있는가에 대해 挫其锐,解其纷,和其光,同其尘(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의 네 마디로 귀납하여 말해주고 있다.
「道」는 인간에게 작용하여 인간의 예기(銳氣), 즉 날카로움을 갈아 없애는 힘이 있다. 이 무한적인「道」앞에 서게 되면 그 누구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재능을 자랑하거나 남을 배척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적인 태도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항상 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노자가 바라는 참된 인간상(人間相)이요, 아름다운 사회상(社會相)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본적인 도경(途徑)인 사물(事物)의 제일원인이 되는「道」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노자는 오늘도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인들에게 소리없는 소리(無聲之聲)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聖經으로 본 老子>
1. 성경에서 말하는「道」
老子는 도덕경(道德經)의 첫 머리에서 道可道 非常道라 하면서「道」의 초월성을 강조했을뿐 아니라 도덕경 全文을 통해서「道」를 “淵”, “宗”, “大”, “先”, “一”, “玄”, “母”, 등으로 비유하여「道」의 현묘(玄妙)함을 말했다.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道」를 해석하는 데에 따른 아쉬움과 인간의 한계를 느껴「道」는 그 무엇과 같은데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음(不知)으로 대신하는 지혜를 보였다
실로「道」는 심오방대(深奧尨大)하여,「人道」의 범주를 뛰어넘어「天道」의 범주에 속하기에 인간의 구두(口頭)와 필묵(筆墨)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道」는 계시(啓示)의 영역이며 이지(理智)의 영역은 아니다. 계시의 영역은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것이며 이지의 영역은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것이다. 노자는 형이상과 형이하를 관철(貫徹)하여「道」를 “一” 이라고 말한다. 공자가 모도자(慕道者)라면 노자는 입도자(入道者)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道」에 비하면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며 당연한 일이다. 성경에서 말하는「道」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자.
* 하나님의 말씀,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15).
영(靈) 아닌육(肉)의 인간(人間)으로서 불가도(不可道)라 함은 진실한 고백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 하심으로「태초」에 속하며 万物之宗, 象帝之先이요, 알파와 오메가이다(계21:6).「道」는 靈 이기에 불가시적 실존(不可視的實存)이요(창 1:2, 요 4:24), 피조자(被造者)가 아닌 창조주(創造主)이시다. 생수의 강, 마르지 않는 샘인「道」를 통하여 죄인들을 씻으시고 해갈의 축복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리자.
2. 성경적 관점으로 본 和光同塵(화광동진)
「道」의 體象(체상)에 대한 가르침에 이어 老子는「道」의 효용(效用)에 대해 네 마디로 귀납하여 가르치고 있다. 곧挫其锐,解其纷,和其光,同其尘(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이다. 앞의 두 마디는 약간 생소한 감은 있으나 뒤의 두 마디는 매우 익숙한 말로서, 기독교에서 보다 다른 종교에서 더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이 구절은 意味深長(의미심장)한 金句(금구)이기에 성경을 통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挫其锐, 解其纷(좌기예, 해기분).
글자 그대로 예리하고 날카로운 부분을 갈아 없애는 것이다. 인간의 銳氣(예기) 즉 혈기, 교만, 옛 자아를 말씀의 검으로 제거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道」에 의해 나 자신의 모난 부분을 갈고 닦여서 온화하고 포용심 많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항상 노력하는 것이 평생의 과제이다. 나 스스로 남에게 늘 온순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할지라도 상대편에서 무례하고 날카롭게 나온다면 이에 대해 잘 대처하는 자세 또한 필요하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이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이다. 주님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서로 물고 다투면 피차 멸망할까 두려워 해야 할 것이다(갈 5:15).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2-3).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 모두가 성경의 교훈을 따라 마음과 삶을 통하여 挫其锐, 解其纷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2) 和其光,同其尘(화기광, 동기진).
和光同尘은 和其光,同其尘의 줄임말이다.
<和光>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 예수님은 빛이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5).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8-9).
*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 5:41).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우리는 빛을 받아들이는 빛된 삶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빛이 되라 하신다. 이것은 빛의 본체(本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빛의 반사체(反射體)로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빛 인 것처럼 교만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자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同尘>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눅 7:34).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2).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7).
*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 9:10).
예수님은 和光同塵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한 몸이시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죄인들을 사랑하시어 늘 함께 하셨다. 사도 바울 또한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행 9:1-16).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며,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하였다(고전 9:20-22). 이 또한 和光同塵의 삶이다. 和光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同塵으로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유소충 | 영등포중화교회 담임 ․세계선교신학원 교수․중국선교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