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인간은 7세 이전의 발달을 이후의 인생에서 반복한다는 성격심리이론을 언급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 중 첫 번째 발달 시기, 즉 만 0~1세에 해당하는 시기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이 시기는 인격이라는 집의 기초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아직 기억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자신이 속해있는 세상과 자신을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표현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욕구이다. 그래서 욕구가 생기는 대로 표출을 한다. 그런데 그 표출이 기껏해야 울거나 몸을 흔드는 정도이다. 양육자인 엄마는 이러한 아이의 행동을 보고 그가 어떤 욕구를 갖는지를 알아차려야 하며 가급적 빨리 그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만져 주고, 얼러 주고, 토닥여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놀아 주고, 대소변 기저귀를 갈아 주는,등의 돌봄이 계속되면 아이는 욕구를 가진 자신이 안전하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발달학자 에릭슨은 기본적 신뢰(basic trust)라고 불렀다.

성경에서 세상이 창조되는 부분을 읽어보면 이와 흡사하다. 아직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점차 제대로 된 존재로 지어져가는 것이다.??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1~2).??신학자들은 혼돈과 공허라는 용어를 해석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이를 0~1세의 아이의 심리상태와 동일하다는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해가 훨씬 쉽다. 어거스틴은??태초에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놀라운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또한 중요한 창조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시간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모든 세계는 정지의 세계와 다름없을 것이며 그것은 혼돈과 공허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기억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의 세계가 그러하다. 기억이 없다면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시간 속에 살아가는 데 아이는 치매 환자와 같이 시간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만 1세 이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이 불분명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잘못 알고 있는 양육방식
'어차피 기억이 불분명한 시기이니까, 제대로 기억도 못 해낼 테니까, 대충 키워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는 치매 환자가 기억도 못하니 대충 돌보면 어떨까와 같은 입장이다. 분명 아이나 치매 환자는 자기에 대해 기억을 못 해낼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반드시 어떤 상태로든 결과가 표출된다. 영양 상태나 외형, 마음의 자세에서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양육은 그 아이 자신이 커서 기억을 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그 흔적을 몸과 마음에 그대로 지니게 된다. 또 한 가지, 아이의 욕구에 가급적 빨리 반응하지 않으면 어떨까? 누군가는 아이 젖을 먹일 때 시간 간격을 맞추어서 주고 중간에 애가 떼를 써도 주지 말라고 가르친다. 과연 이것은 옳은 양육방법일까? 기억이 불분명한 시기라는 점을 다시 고려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아이의 버릇이 나빠진다고, 인내력을 배워야 한다고 이러한 양육방식을 옹호하겠지만 과연 이 시기의 아이가 '인내력'이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을까? 인내력은 시간과 기억의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 시기 아이에게 참으라는 말은 인내력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만한 고통이 몸에 배게 할 뿐이다. 만약 만 1세 이전의 아이가 가정에 혹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면 이러한 지식을 염두에 두고 아이를 양육하기 바란다. 그러면 그 아이는 기본적인 신뢰가 잘 자리 잡는 아이로 성장할 것이다. 물론 강박적으로 키울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아이가 부모의 의도에 따라 양육되지는 않지만, 그 의도대로 자라지 않더라도 무리없이 성장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이가 생각만큼 그렇게 약한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소홀한 돌봄을 받고 성장한 아이들에게는 후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진단할 수 없다. 현상은 있는데 기억으로 남겨있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가 있다. 누군가가 과음을 해서 집에 왔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니 지갑에 돈과 신용카드가 없고 눈에는 멍이 들어있다. 그런데 술 먹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기억에 없으니 멍든 게 아프지도 않고 돈과 신용카드 없어진 게 아깝지도 않을까? 오히려 기억이 잘 안 나니까 혼란스러운 마음에 더 괴롭지 않을까? 그렇다. 기억이 불분명한 이 시기의 문제는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훨씬 더 집요하게 우리 자신을 지배하고 괴롭힌다. 에릭슨이 말한 기본적인 신뢰가 깨진 이러한 상태를 불안전(unsafety), 불신(mistrust), 혹은 경계가 무너진 것(break down)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퇴보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가볍게는 뭔가 불안정하다는 막연한 느낌 정도이고, 심하게는 정신분열병의 망상과 환각처럼 비현실적인 혼란이다. 이 상태는 너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자신의 불안정이 환경에 투영된다. 그래서 주변이 믿을만하지 못하고 위험스럽다고 하지만, 냉정히 보면 자기 자신이 믿을만하지 못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심리를 가리켜??투사(projection)??라고 하는데, 이는 만 0~1세의 시기에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 보이는 대표적인 방어기전이다. 알면서도 남 탓하는 것을 투사라고 하기도 하지만, 더 심해지면 나와 남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자기 마음의 소리를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는 환청의 소리로 듣게 된다.

귀신들림과 축사(逐邪)의 문제
이러한 극단적인 투사가 우리 선교 현장에서 중요하게 거론될 수 있는 영역이 귀신들림의 문제이다. 귀신들림이라는 표현은 사실 원인보다는 현상에 따른 것이다. 그는 비현실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리고 자기가 아닌 어떤 다른 영적 존재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귀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다 환상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투사가 이를 지지한다. 말은 귀신이지만 사실은 다 자기 마음의 투영인 것이다. 냉정히 투사에 의한 현상인지 실제 다른 영적 존재에 의한 현상인지를 구분할 수는 없을까? 일반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웬만한 분별력으로도 어렵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두 부분은 잘 섞이는 것 같다. 유유상종이라고, 투사의 현상과 귀신들림의 현상은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 면역이 떨어진 사람에게 균에 의한 감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두 가지는 분명 다르지만 결국 매한가지인 셈이다. 그런데 감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생각해보면, 투사와 귀신들림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에 대한 지침도 비슷하게 떠오른다. 감염의 경우 항생제를 사용하거나 소독하는 것처럼 균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염된 사람의 전반적인 건강을 증진시켜 면역력을 강화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후자가 잘 이루어지면 전자는 가끔 소홀해도 무방하다. 마찬가지로 귀신들림의 현상을 유일하게 축사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영적 경계, 즉 영적 건강과 영적 면역력을 강화하면 귀신은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다. 귀신들림의 문제를 고려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마가복음 5:1~15에 나오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이야기이다. 베뢰아신학의 김기동 목사나 몇몇 사람들이 이 구절을 통해 귀신은 몸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귀신은 그냥 떠다니는 것보다 몸에 있을 때 안정을 누리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는 말이다. 축사의 행위가 대부분 그런 흐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간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아한 점이 있다. 몸이 그렇게 좋으면 돼지에게 들어가서 잘 살 것이지 왜 들어가자마자 돼지 떼가 단체로 자살을 했을까? 돼지 떼가 제 정신은 아닐 수 있어도 굳이 죽으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구절이 앞의 논리를 지지하는 성경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은 귀신의 이름이 군대라는 점, 그리고 몰살되었다는 점에서 귀신이라는 존재에 당시의 로마군인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다. 당시 돼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로마 군인을 위한 사육이었다는 보충 설명도 적절해 보인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 이 한 사람의 인격이 얼마나 소중했는가이다. 사람들은 이 귀신들린 자가 정신이 온전해진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15절). 현장에 있었다면 도대체 저 예수는 누구인가 하면서 나도 두려웠을 것 같다.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이 온전해진 것을 보고 다행으로 여기며 기뻐할 수 있는 예수님의 입장이 되진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사람이라면 그 편에 서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의헌 |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