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산
02년 7월말,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더위로 집집마다 에어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빗소리처럼 들리는, 그야말로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이 땅에 처음 왔다. 어느덧 가을이 다가왔고 9월 말부터 추위가 찾아왔다. 예년보다 빨리 추위가 왔다고 한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식사를 준비하거나 가사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나도 모르게 침대 위로 올라갔다. 숙제 하고, 책 보고, TV 보고, 잠자고, 기도하는 등 대부분의 생활이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바보같이 그땐 왜 그랬는지……. 선교사는 추운데서 견뎌야하는 것이 마땅한 양 그렇게 추위를 꾹 참고 보내다가 급기야 병이 들었다. 허리를 펼 수가 없어서 한의원에 갔더니 허리에 한기가 들었단다. 11월 중순에야 누안치(煖氣)라는 시스템으로 난방이 시작되었다. 집안이 훈훈해졌다. 몸을 지질 수 있는 온돌도 아니고, 언제나 켤 수 있는 개별난방도 아니지만 따듯해진 집안 공기는 움츠려있던 몸과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으면서 ‘이제야 살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추위는 내가 이 땅에서 넘어야할 첫 번째 산이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나보다 더 추위를 많이 타셨던 한 여성 선교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2005년 초여름에 북경에 오셨다. 나의 임무는 단지 집 계약을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계약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분이었다. 마침내 40대 가냘픈 여성 한 분이 무거운 짐을 낑낑대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중국어 한 마디도 모르시는 분이 주소 한 장만 가지고 혼자 택시를 타고 오신 것이다. “세상에!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라고 해도 되는데……. 여자 혼자서 이 많은 짐을 가지고…….” 순간 내 마음에 그 분을 향한 긍휼함(?)이 뭉클 일었다. 그렇게 그분과 만남이 시작되었다. 

정착하시는 동안 피파시장(批?市?)과 대형마트를 동행하면서 약간의 도움을 드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를 드렸는데도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처음 오신 분들은 문제가 생기면 SOS를 요청하기 일쑤인데(귀찮을 정도로) 이 분은 달랐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기 싫어하셨다. 그러면서도 고상한 품위가 묻어나는 분이셨다. 겉모습은 강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셨다. 이 싱글 선교사님은 나보다 4살이 많았다.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셨고 미국과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엘리트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겸손하셨는지 모른다. 기꺼이 중학생 아들 이삭이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셨다. 당신 자신도 거저 배웠다고 거저 가르쳐주셨다. 늘 고마운 마음에 아들 편에 김치며 음식들을 싸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중국인과 연애 중이시라는 소문을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교제하시는 분은 선생님 바로 앞집 남자 분이었다. 그 앞집 남자 분은 유일하게 영어가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청화대 교수님이란다. 더구나 잘생긴 미혼이라니. 우째 이런 일이! 주님의 기막힌 안배하심으로 기막힌 인연이 시작되었나 보다.

할렐루야! 얼마 후 한인교회에서 선남선녀가 극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아름답게 단장한 신부의 결혼 서약하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에 너무나도 훌륭하고 믿음직한 신랑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일 것이다. 나도 기쁨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이 흡족한 혼인 잔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그 가정을 축복했다.

재작년 가을쯤이었다. 선생님이 다 죽게 된 목소리로 미역줄기 볶음이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하셨다. 이상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을 부탁할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한국 미역줄기를 사서 볶고 잣죽을 쑤어서 달려갔다. “이런, 세상에나!” 핏기 없이 바싹 여윈 얼굴에는 병색이 역력했다. 선생님은 가래침을 뱉은 휴지가 쌓인 더러운 방에서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채로 여섯 달을 지내셨다.

만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하셨고 바로 택시를 불러서 환자를 우리 집으로 옮겼다. 남편이 환자를 업고 5층까지 올라갔다. 마침 빈방이 있어 선생님을 모셨고 조촐하게 병실을 꾸렸다. 처음 정성껏 준비한 상을 받으시면서 오래 간만에 받아보는 상이라고 눈물을 흘리시며 그릇을 비우실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그 긴긴 시간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버려둠을 당하신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선생님께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을 회개했다.

한편으로는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선생님 남편은 뭘 한 건가?” 원망이 나왔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사람은 죄 없다고 하셨다. 자신의 병은 ‘거식증’이라 병원에서도 남편도 도와 줄 수 없다고 했다. 영국에서 공부 할 때도 겪었던 일이라고 하셨고 먹고 싶은 음식을 조금씩 먹으면 회복될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자존심 강하고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시던 선생님이 나에게 “이번 한번만 도와달라고, 한번만 살려 달라”고 애원하셨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 간병도 한 번 안 해본 내가 선생님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려고 동분서주했다. 저녁에는 셋이서 나름 신유 집회도 했다. 찬양하고 예배하고 간증도 나누고 빠른 회복을 소망하면서 주님의 치유의 손길을 구했다.

우리는 그 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감사의 제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뭐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 생리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숨 쉴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특별한 일이며 기적인지 깨닫게 하셨다. 선생님은 가끔 기력이 좋으실 때 햇볕이 드는 식탁에 앉아서 구비구비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곤 하셨다.

선생님은 자신이 졸업한 미국 신학교 중국 분교를 세우는 것이 꿈이셨다. 교수 남편을 만나 부지를 헌물 받았지만 중국정부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힘을 잃은 가운데 있었다. 학교를 지으려고 모금운동을 하고 사람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선생님이 우리 집에 머무는 동안 느헤미야서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각자 자신의 영역을 감당하므로 아름답게 지어져 가는 것을 보게 하셨다.

하루는, 지금 남편과 사랑에 빠진 얘기를 하시며 두 볼에 홍조를 띄우셨다. 어느 날, 집 열쇠를 잃어버리셨다고 하셨다.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그분이 “뭘 도와드릴까요?” 영어로 물어오셨고 열쇠 고치는 사람을 찾아 문제를 해결 했다고 한다. 그 후 가끔 마주칠 때마다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이 남자 분이 선생님 집에 방문을 했는데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기대게 되었고 친밀함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다. 지금껏 남자 손도 한번 잡아 본 적이 없었던 선생님의 러브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음식을 조금씩 드시면서는 안색이 조금씩 좋아졌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고 주기적으로 통증을 느끼셨다. 영국에서 거식증에 걸려서 몸무게 30kg이 되어 한국에 실려 왔을 때는 음식을 섭취하고 바로 회복되셨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가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의 남편과 내가 그렇게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할 때는 완강히 아니라고 하시더니 성치 않은 몸을 하시고 혼자 비행기를 타셨다. 링거를 꽂고 휠체어를 타고 공항에 나타난 이 환자를 아무런 제지도 없이 비행기에 태웠다. 이것은 기적이다. 환자가 비행기를 타려면 보통 항공료의 6배를 지불하고 의사의 동의서가 필요하고 보호자가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일주일 후 암이 전신에 퍼진 것으로 판명이 되었고, 판명 받은 다음날 새벽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소천하셨다.

천국입성
부고를 듣고 중국인 남편은 한국 영사관에 급행으로 비자를 신청했다. 기적같이 하루 만에 비자가 나왔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 선교지에서 충성스럽게 사역하시다가 삶을 마친 한 여성 선교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세밀하게 일하셨다.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객들의 환송아래 선교사님은 53세를 향수하시고 영광스런 천국입성을 하셨다. 고인의 생애 마지막 5년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냈기에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여종에게 예비하신 상급이었다.

고인의 남편은 고인과의 마지막 대면에서 영어로 끝없는 사랑을 고백했다. 그 큰 덩치의 남자가 얼마나 많은 순전한 눈물을 쏟아 놓으시던지. 나는 두 분이 짧지만 별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나는 고인의 예수사랑과 영혼사랑이 그대로 남편에게 전달되었고 그를 통하여 고인이 못 다 이룬 신학교 건립 사역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수없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고인은 가장 효과적인 중국 선교를 하셨다. 고인의 유골은 고인이 전도사로 시무했던 교회 선산에 모시고 교회와 성도들이 관리하도록 결정하였다. 교회 선산에는 머지않아 복지관을 세울 계획인데, 선교사님의 묘지를 세우고 고인의 생전에 교회사역과 선교사역을 묘비에 새겨 성도들과 후세가 기념할 것이라고 했다. 성도들은 20년 전의 고인을 작은 예수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너의 친구라」의 저자 밥 존스 목사님이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목사님 보다 먼저 온 세 사람에게 단 한 가지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그 질문은 바로 “너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라는 것이다. 그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온지 10년째 되는 봄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누안치는 3월 중순에 이미 끊겼다. 이제는 전기난로도 하나 있고 몸을 지질 수 있는 옥 매트도 있지만 어깨와 무릎이 시려온다. 50대 후반의 나이를 탓 할 수 있겠지만, 서북풍이 불어대는 이곳 풍토병을 탓하고 싶다. 밤을 꼬박 새며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훗날 우리 성도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는 법을 배운 자로 기억되길 소원한다.
 

 

김룻 | 중국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