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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31  통권 121호  필자 : 김병태  |  조회 : 3301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중국 개신교 출현기(1842-1860)의 기독교 유적

산업혁명 이후 재력을 확보한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원료 공급처 또는 시장을 찾아 동방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영국이 가장 먼저 식민지를 확장해 갔다. 당시 중국은 아편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영국이 아편을 이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1838년 도광(道光)황제는 임칙서(林則徐, 1785-1850)를 파견하여 금연(禁煙)을 실시하여, 1839년 6월에 237만근(2만 상자 이상)의 아편을 호문(虎門) 해변에서 폐기하고, 영국인의 퇴거까지 명령하였다. 이것이 영국의 불만을 사서, 1839년 10월 영국 내각은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40년 6월, 50여척의 함대와 4,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영국군이 주강(珠江) 입구를 봉쇄하고 장강(長江) 하구를 거쳐 발해만의 백하(白河)까지 북상하였으며, 1841년 1월 대각(大角), 사각(沙角) 포대를 내주고 홍콩섬도 강점(强占)당하고 말았다. 이어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이 광주에서 대패한 후, 5월 30일 삼원리(三元里) 민중의 항영(抗英) 투쟁에도 불구하고 정해(定海), 진해(鎭海), 영파(寧波), 상해(上海, 6월), 진강(鎭江, 7월)을 내주었고, 처참한 토벌을 행하면서 1842년 8월, 남경성(南京城) 아래까지 진출하고 말았다. 결국남경 정해사(靜海寺)에서 3일간의 담판을 거쳐 29일, 남경 앞 양자강에 떠있는 “Cornwallis(汗華麗)”호 선상(船上)에서 중국 근대사상의 첫 번째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서명하였다.  

이어서 미국과 망하조약(望廈條約, 1844.7.3), 프랑스와 황포조약(黃?條約, 1844.10.24)을 맺었다. 그리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는 중국의 영토에 진출하였고(홍콩은 영국), 5개 항구의 개방, 2,100만 달러의 배상금 지불, 관세 협정권, 영사관 설치 및 재판권(1843.7.2)인정, 최혜국 대우권(1843.10.8, 호문조약), 내륙통항권, 5항 안의 외국인교회당 건설권(망하조약), 중국 내 천주교 보호권(황포조약,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앙자유는 그 다음해인 1845년 2월과 12월 각각 획득), 해안 토지 임대권 등을 얻어냈다. 

그리고 1856년 10월 23일 폭발한 제2차 아편전쟁은 조약 개정의 교섭(1854년 이후)과 애로우호(The Arrow) 사건(1856/10/8),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1856/2, 광서)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 결과 1858년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각각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외교관의 북경 주재, 내륙여행의 자유, 양자강 개방(南京, 漢口 등 11개 항구), 개항장 증가, 영사재판권 확대 외에 교회적으로 황포조약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내지(內地)선교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영, 프, 미, 러 4개국을 상대로 한 1860년의 북경조약에서는 배상금 증액, 구룡반도(九龍半島) 할양, 천진 개항이 결정되었고, 특히 들라마르(Delamarre, 孟振生) 신부가 개입하여, 외국의 교회가 중국 내 모든 지역에서 토지를 임대하고 땅을 구입하여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권리를 넘겨받았다(中佛 北京條約 제8항).

광주의 삼원리(三元里) 항영(抗英)기념관
삼원리 항영(抗英)사건이라 함은, 1차 아편전쟁 때인 1841년 5월 29일 영국군이 광주 북쪽 교외 삼원리에 들어 와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희롱하자, 현지의 청년농민 위소광(韋紹光)이 주도하여 영국군 8-9명을 살해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영국군의 보복에 대비해 위소광은 민중을 모았는데, 5월 30일 새벽 2천명의 의용군이 영국군 포대를 공격하였으며, 유인작전을 이용하여 200여 명의 영국군을 물리치고, 이어 31일 광주 부근 각 향(鄕)의 수 만 명이 집결하였으나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의 설득으로 자진 해산하였다. 이것은 근대사상 민간인에 의한 첫 번째 자발적인 대규모 무장 반(反) 침략투쟁에 해당한다. 기독교를 전해 준 국가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또 다른 인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남경의 정해사(靜海寺, 南京條約 史料陳列館)
남경 하관흥 중문 밖 사자산(獅子山)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원래 명대(明代) 성조(成祖) 때 정화(鄭和)의 남양(南洋) 항해를 기념하여 지어진 것인데, 1842년 남경조약이 맺어질 때 담판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남경조약 이후로 홍콩이 할양되고, 광주, 상해 등 5개 항구에 외국인이 상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상해 중심의 선교사 사회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내부의 진열실에서는 아편흡입 장면이나 조약 체결 모습, 조약 전문 등을 사진 또는 그림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남경 시내의 학교, 병원 등 선교사 관련 기관에 대한 안내 사진도 있어서 선교사 활동 시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남경조약의 담판이 진행될 때, 영국대표단의 통역으로서 조약문의 기초 작업에 참여한 선교사가 있는데, 바로 존 모리슨(John Morrison, 儒翰 馬理遜, 1814-1843, 로버트 모리슨의 아들)과 귀츨라프(Karl G?tzlaff, 郭士立, 1803-1851)이다. 존 모리슨은 아버지가 세운 말라카의 영화서원(榮華書院, Anglo-Chinese College, 1818년 창립)에서 양아발(梁亞發, 1820-1821)의 뒤를 이어 훈련을 받은(1827-1830) 후 동인도회사 통역원(1830), 상무총감독 비서(1834), 정부 통역원(1842), 홍콩 총독 비서 및 국회의원(1843) 등으로 영국정부를 위해 일하였으며, 귀츨라프는 1826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자바에 들어 온 이후 해남도, 하문(廈門), 대만을 거쳐 영국 선박을 타고 산동성(山東省), 만주지역까지 전도여행을 다녔다. 메드허스트(Walter H. Medhurst, 麥都思, 1796-1857), 존 모리슨, 브릿즈만(Elijah C. Bridgeman, 裨治文, 1801-1861) 등과 함께 신구약 한역성서(1837-1840)를 내는 등 성서번역에 크게 기여하였다.

마카오 관음당(觀音堂)의 탁자
마카오의 관음당은 17세기 초에 지어진 도교사원이다. 이곳의 관음상은 마카오 최대의 것이다. 담 벽에 새겨진 18명의 성인상(聖人像) 중에는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있다. 몇 개의 미로(迷路)를 거쳐 인내심을 가지고 찾아가다 보면 작은 정원 안에 보호막을 쳐놓은 원형 탁자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1844년 중미(中美) 통상 망하조약 체결 당시에 사용된 것이다. 망하조약에서는 파커(Peter Parker, 伯駕, 1804-1889), 브릿지만, 윌리암스(Samuel W. Williams, 衛三畏, 1812-1884) 등 세 명의 미국 선교사가 담판에 참여하였으며, 이 조약 제17조에서 5개 통상항구에 교회당을 지을 권리에 대하여 명시하였다. 그리하여 1847년 2월 상해 남문 밖 동가도(董家渡)에 주교당(主敎堂)을 짓기로 결정했고, 1851년 3월 서가휘(徐家彙) 구(舊) 천주당(天主堂) 지어졌다. 개신교로는 1831-33년경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상해에 온 적이 있는 귀츨라프에 이어 메드허스트, 록칼트(William Lockhart, ?魏林, 1811-1896) 등이 1843년경 상해에 나타나 선교했으며, 1847년 드디어 성공회의 성삼일당(聖三一堂, 1910년에 改修)이 지어졌다.

상해의 성삼일당(聖三一堂)과 목은당(沐恩堂)
성삼일당(聖三一堂)은 아편전쟁 후 최초로 1847년 상해 외탄(外灘) 부근에 정식으로 건축된 성공회 교회당인데, 당시 100명의 상해 거주 영국인들이 모두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1860년에 폭우로 파손된 후, 상해 영국인들의 지원을 받아 1869년에 홍색의 고딕식 교당으로 재건축되었다. 이 건물은 오랫동안 황포구 정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교회로 환수되어, 최근부터 중국기독교 전국 본부(全國兩會)의 새 본부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상해시 교회 본부인 목은당(沐恩堂)은 상해 중심부인 인민공원 앞 황포구 서장중로(黃浦區 西藏中路) 316호에 있는데, 이것은 미국 감리교회에서 원래 1887년에 지금 자리의 근처에 지어 중구 감리교회당(中區監理會堂)으로 이름 붙였던 것을, 기부자인 무어(Moore)를 기념하기 위해 1890년에 무어기념교회(慕爾堂)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2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미국 고딕식으로 재건하기 시작하여 1931년에 완성하였으며, 1958년에는 상해 각 교파가 연합예배를 드림으로써 함께 은혜를 입는다는 뜻의 목은당(沐恩堂)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태평양전쟁 때는 일본군의 헌병사령부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며, 개혁개방 이후 1979년 9월 2일 상해 최초로 다시 문을 연 교회당이기도 하다.  매 주일 4차례 예배가 있으며, 한 번에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상해의 인제의원(仁濟醫院)
현재 주소는 산동중로(山東中路) 145호이다. 록칼트가 애초 1844년 2월에 소남문(小南門) 밖 부근의 중국인 민가(民家)에 세웠던 진료소를 1847년 북문 밖으로 옮겨 정식으로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인제의원”(Chinese Hospital)이라고 이름을 붙여 문을 연 상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중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 된 서양식 종합병원 중의 하나이다. 메드허스트 등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이 병원 내에서 전도활동을 행하였으며, 매일 아침 7시에 입원자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고, 먹을 것을 공급하는 등 사회구제활동에도 애를 썼다. 1861년에는 런던선교회가 구입하여 쓰고 있던 산동로(山東路) 맥가권(麥家圈, 묵해서관, 천안당, 인제의원 등 런던선교회 기관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서 메드허스트의 이름을 따라 생긴 명칭) 안으로 이주하였다.

상해의 묵해서관(墨海書館, London Missionary Society Press) 
1843년 12월 말 상해에 들어 온 메드허스트가 동문 밖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인도 바타비야 섬(자카르타 소재)의 런던선교회 인쇄소(1923년에 자신이 설립)를 북문 밖 대경각(大境閣, 오늘날의 南市區 大境閣路 一帶)으로 옮겨왔다가, 1845년 말 다시 산동로(山東路) 맥가권(麥家圈) 지역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 인쇄소는 자카르타에서 당시에 이미 20여 년 이상 동안 싱가포르, 말라카의 인쇄소와 함께 남양지구(南洋地區) 3대 출판기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을 정도로 규모와 설비 면에서 일류급이었으며, 상해에 최초로 출현한 근대식 출판사였다. 1860년에 장로교의 미화서관(美華書館)이 출현하면서는 그 짐을 나눠 가졌지만, 그 전 10여 년 이상 상해 지역에서 묵해서관이 담당하였던 인쇄출판 업무가 막중하였던 것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1843년 상해로 들어 와서 1857년 사망할 때까지 묵해서관 출판물의 1/3을 담당했던 메드허스트 외에도 죠셉 엣킨스(艾約瑟, Joseph Edkins 1823-1905), 쉐르쉐프스키(施約瑟, Samuel Isaac Joseph Schereschewsky, 1831-1906)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였다. 또 “해천삼우(海天三友)”로 알려진 상해의 근대 지식인인 왕도(王韜, 1828-1897), 이선란(李善蘭, 1811-1882), 장돈복(蔣敦復, 1808-1867) 등이 이 출판사를 통해서 배양되었다. 

광주의 홍수전 고가(洪秀全 故家)와 남경의 첨원(瞻園, 太平天國歷史博物館)
홍수전은 양아발(梁亞發)로부터 전도책자인《권세양언(勸世良言)》을 넘겨받아 스스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1947년경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고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까지 발전시킨 인물이다. 광주역 부근의 장거리 버스 정거장에서 화도(花都)로 가는 버스를 한 시간 정도 타고 가면 홍수전의 고향인 옛 화현(花縣)에 도착한다. 이곳에 홍수전 기념박물관이 있고, 다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더 들어가면 홍수전의 고향에 생가와 몇몇 유적들이 복원되어 있다. 박물관 앞뜰에는 유명한 홍수전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건물 내부에는 남경의 박물관 이상으로 잘 정리된 자료실이 있어서, 기독교 또는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잘 살펴 볼 수 있다.   

남경은 태평천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다. 중국 내 유일의 태평천국 전문 역사 박물관이 첨원로(瞻園路) 첨원(瞻園, 太平天國歷史博物館) 안에 있다. 이것은 원래 당자가(堂子街)에 있던 것을 1958년 지금의 구 동왕부(舊 東王府, 태평천국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楊秀淸의 관저)로 옮겨 왔다. 최초의 중국인 목사인 양아발(梁亞發)과의 관련 부분이나 “원도성세훈(原道醒世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등 홍수전 초기 기독교 관련 저작(이 책자들은 《太平詔書》에 담겼다), 태평천국에 관련된 로버츠(I. J. Roberts, 羅孝全, 1802-1871), 린드레이(Augustus Frederick Lindley, ?唎, 1840-1873) 등의 선교사에 대해서도 살펴 볼 수 있다. 또 태평천국과 서구 열강과의 관계도 소개되어 있다.    

남경의 장강로(長江路) 292에는, 태평천국 천왕부(天王府)가 있는데, 이곳은 중화민국 총통부(總統府)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600여 년 전에 주원장(朱元璋)이 한왕부(漢王府)로 세운 것을, 청대에 양강총독아문(兩江總督衙門)으로 이용했고, 태평천국 때에 홍수전의 천왕부(天王府)로 사용되었다. 천조궁(天朝宮)으로 불리었던 태평천국 건물의 명칭 속에서 기독당(基督堂) 등 기독교적 용어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이곳은 또 손문(孫中山)이 1912년에 임시 대총통(大總統)으로 취임했던 곳이기도 했으며, 국민당 정부 시절 장개석(蔣介石)의 집무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밖에 태평천국과 관련해서 소주(蘇州)의 유명한 공원인 졸정원(拙政園) 서쪽에 충왕(忠王) 이수성(李秀成)이 사용하던 충왕부(忠王府)가 있다. 이곳에는 이수성(李秀成)뿐만 아니라, 태평천국 공동체의 유명한 예배 사진 등 태평천국과 관련된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병태 | 배재대학교 복지신학과 교수·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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