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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31  통권 121호  필자 : 빌립  |  조회 : 5435   프린트   이메일 
[소수민족선교역사]
깐쑤(甘肅)지역 티베트족(藏族) 선교역사

중국 내지선교회(內地會)의 티베트족 선교
1865년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중국 내지선교회(中國內地會, CIM)’를 세웠다. 복음을 듣지 못한 중국 내지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내지선교회의 비전은 테일러의 생전에 실현되어, 1905년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지선교회는 이미 내지의 11개 성(省)과 몽고(蒙古)뿐 아니라 만주(滿洲), 신장(新疆), 티베트(西藏) 동부, 미얀마 북부까지도 복음을 전파했다.

1876년 12월 28일 내지선교회의 선교사인 이스둔(義士頓)과 판건(潘根)이 샨시에서 깐쑤 지역으로 들어와 1877년 1월 란저우(兰州)에서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1878년 이스둔이 친저우(秦州)에 제1센터를 만들었고 최초의 여전도사인 윌슨이 깐쑤에 도착했다. 이스둔은 깐쑤 전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파했으며 6종 언어로 된 성서를 깐쑤와 이리(伊犁)지역까지 배포하였다.

1885년 란저우, 시닝(西宁), 닝샤(宁夏)에 내지선교회가 잇달아 설립되면서 티베트족, 몽고족, 한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1891년 애니 테일러(Annie Taylor)가 타오저우(洮州)에 자리를 잡으며 1892년부터 1893년 사이에는 티베트까지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티베트의 성 중심지인 라싸(拉薩)를 3일 거리에 남겨두고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깐쑤성에서 30년간 복음을 전파한 내지선교회는 10개의 본부와 1개의 지부를 설립했다.

CMA선교회(宣道會)의 티베트족 선교
내지선교회와 같이 초교파, 초국가적 모임인 CMA선교회는 다른 선교단체의 활동을 보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888년 중국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특히 시골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개척하는 일을 중시했다. 특이하게도 도시에 모여 선교하지도 않았고, 학교나 병원을 복음 전파의 첫 단계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CMA선교회에서 처음 중국으로 오게 된 선교사는 뉴욕 출신의 커쓰디(克斯第) 목사였다. 1888년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오던 그는 중국인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언어도 배우려고 함께 3등석에 올랐으나 안타깝게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중국에 다다르지도 못한 채 일본 고베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이후로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그를 기념해 묘를 찾아가 그의 희생정신을 기렸다. 그의 정신은 이후 선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와 함께 배를 탔던 광둥(广东)성 내지 사람들을 기독교도로 만드는 역사를 일으켰다. 그 후 CMA선교회는 중국의 중부, 서부, 남부, 북부에 차례로 지회를 설립했다. 

CMA선교회의 서부 구역은 깐쑤, 티베트지역이다. 깐쑤성에는 1872년 내지선교회의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란저우에 도착했고, 얼마 후 CMA선교회에서도 이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해 활동을 시작했다. CMA선교회의 활동장소는 깐쑤성 서남지역이었고, 내지선교회는 주로 깐쑤성 동부지역에서 활동했다. 그 뒤 하나님의 성회, 안식교와 천주교의 선교사도 깐쑤성으로 속속 들어왔다. 깐쑤성 내의 티베트족 거주지에는 여러 교파들의 활동이 있지만, 정작 티베트 지역에는 다른 선교단체의 활동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CMA선교회는 티베트족 선교를 주요사역으로 삼았다.

활동개괄
1894년 CMA선교회의 두 목사는 깐쑤성 타오저우(洮州)에 제1센터를 세우고 본부로 삼았다. 이 지역은 티베트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었다. 센터의 주요활동은 중국 중부로 파견되어 오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선교사들은 한족, 후이족, 티베트족에게 복음을 전하하기 위해 계속해서 지역을 넓혀갔다. 처음 두 목사가 깐쑤 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후이족 비적(匪賊)들의 난(亂)이 일어나 선교사업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난이 평정된 이후에 다시 복음을 전파했지만 미신을 굳게 믿던 티베트인들이 집단으로 반대 행동에 나섰고 심지어는 무력으로 그들을 쫓아내기도 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나눠주었다. 1894년 미국인 목사 아이즈신(艾自新)과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에 합류해 타오저우의 중국인 저우공성(周貢生)과 왕시우차이(王秀材)가 회심하였다. 

1896년 A목사는 민저우(岷州)에 제2센터를 설립했으나 1914년 허난의 비적들이 깐쑤성으로 쳐들어와 민저우성을 함락하자, 아이즈신 목사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숲으로 야반도주를 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비적이 사라진 뒤 성으로 돌아가 보니 그들이 살던 집과 가구들이 다 불살라 사라진 뒤였다. 난이 평정된 뒤 미국인 목사인 디리쓰(邸理斯)와 루청장 呂成章)이 민저우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하여 웨이전모(魏鎭魔), 펑즈신(馮自新), 멍밍스(孟名世), 리서우위엔(李壽源), 장투밍(張土明) 등 중국인 목사들이 양성되었다.

더원화(德文華), 루청장(呂成章) 선교사는 1899년 티베트와의 접경지인 바오안(報安 또는 保安)에 제3센터를 세웠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폭동이 발생해 교회의 재산들이 모두 소실되고 두 선교사마저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 후 외국 선교사와 중국인 전도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을 극복해 교회를 세웠지만 결국은 CMA의 바오안에서의 활동은 다른 선교단체로 넘어가게 되었다.

디다오(狄道)는 1902년 개척된 중요한 센터이다. 디다오에서는 초기 CMA의 주 선교사인 아이즈신 목사가 선교활동을 이끌었으며 말씀을 전하고 목회활동을 하는 외에도 학교를 지어 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한 평생 힘써 일하다 1912년 소천하였다. 중국 기독교 초기에 유명한 중국인 목사 거우러톈(苟樂天)은 온 가족과 친지를 이끌고 주님을 영접했는데, 그 40명 중 남자 다섯과 여자 셋이 전도자의 직분을 맡게 되었다. 그 뒤 영국인 모따요우(莫大猷)가 센터장과 목사를 겸임하였다. 아이밍스(艾名世)부부와 숭창런(宋昌仁)선생 부부, 허페이다오(何佩道)여사, 린(林)여사 등 여러 선교사들이 디다오에서 선교사업을 펼쳤다. 현재 본고의 CMA선교회 역사 관련 내용은 아이밍스 선생의 저작에서 인용한 것이다.

CMA선교회는 티베트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타오저우에서 특별사업을 실시한 것 외에 1902년 18개의 티베트족 부락의 중심지인 줘니(卓尼)에 센터를 세웠다. 커성우(克省悟) 목사는 타오저우에서 이 곳으로 와 현지 토속민들이 우상을 숭배하던 곳이라 부르던 빈 방을 구입해 거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 부부는 현지 티베트족 우두머리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다오허(導河)에는 일찍부터 저우타이핑(周太平) 부자가 민저우 디다오에서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했다. 양은 많으나 목자가 없다고 생각 아이즈신 목사는 이지역에 지부를 만들고 거우러톈, 펑즈신 등 신학생들과 함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본인도 가끔 와서 목회활동을 했다. 메이바오전(梅葆眞)과 왕환원(王煥文)이 다오허에서 전도자의 직분을 맡고 있었고 더원화 목사 부부도 1918년 다오허 지역으로 이사를 와 센터를 설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사 부부가 귀국하게 되면서 다오허의 CMA선교회는 하나님의 성회의 간섭을 받게 된다. 그래서 목사가 다시 다오허로 오게 되고 그로부터 교회가 조금씩 부흥하게 된다. 그러나 다오허는 후이족이 중시하는 지역이었기에 아랍어에 능숙하지 않은 전도자가 전도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라푸렁(拉卜塄)은 티베트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티베트 동북 지역 종교와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CMA선교회는 이곳에서 시장 노방전도와 숙소전도에 힘썼다. 유목민들과 라마승, 승려들이 와서 손님으로 묵어갔다. 그들은 숙소에 여러 날 묵어가면서 따뜻한 교분을 얻었을 뿐 아니라 복음도 접하게 되었다. 숙소의 객실이 먼 곳으로 향하는 복음의 통로가 된 것이다. 라푸렁에는 원래 큰 사원이 하나 있어 수천 명의 승려들이 매일 불경을 읽고 예를 드렸다. 그러나 1921년 닝하이(寧海)군에게 정복 당하면서 후이족 세력이 강해져 과거 외부인이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사원이 무너졌다. 1923년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라푸렁으로 들어와 센터를 세웠다. 그러나 이 땅에선 쌀과 보리가 나지 않아 주민들은 매일 삶은 면과 버터, 소와 양고기, 젖을 주식으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음식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그 땅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런 장벽들을 이겨냈다.

다오허의 남쪽에 위치한 헤이쭤(黑座)에는 1923년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도착해 센터를 개척했다. 이 지역은 티베트족 마을이 많이 모인 중심지역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몇 시간, 혹은 몇 일에 걸쳐 티베트족 각 마을로 전도활동을 벌였다.

복음의 확산
(1) 다즈공바(達枝龔巴)
선교사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점점 티베트족의 밀집 거주지에까지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라마 사찰이 있어 반기독교의 분위기가 더욱 강해졌다. 그 지역의 명칭은 다즈공바였는데 험한 물줄기의 타오허와 여러 험준한 산맥들이 천연의 요새를 형성했다. 복음의 순례자들은 레이 호수에서 한 치도 벗어나기가 어려운 지리적 상황에서도 결국 그 곳까지 들어갔다. 그 지역에는 중국어를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티베트어를 익히고 연습하는 데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그리하여 훗날 그 지역은 티베트족 복음의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이 되었다. 매주 주일이 되면 현지의 목사님이 지붕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주일 성수를 위해 성도들을 소집했다. 한족과 티베트족 성도들이 한데 모여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는 전혀 다른 민족을 한 가족처럼 묶어준다는 점에서 과거 자신들이 믿던 라마 불교와는 완전히 다른 복음의 능력이었다. 

(2) 민성(岷城)과 줘니(卓尼) 
1914년, 깐쑤성으로 들어온 허난의 바이랑(白狼) 비적단에게 민성이 함락당했다. 민성에 있던 선교사들은 야밤에 성을 도망쳐 숲 속으로 도망쳐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공포 속에서 생활했다. 난이 평정된 후 다시 민성으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집은 이미 불살라 사라지고 비적들에 의해 평지로 변해있었다. 옷과 가구들도 모두 사라져 다시금 충격에 빠졌다. 

린자오(臨澤, 옛 洮州)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줘니라는 지역이 있었다. 이 지역은 라마교가 우세해 큰 라마불교 사원도 있었지만 1905년 기독교를 향해 문을 열었다. 줘니성 교회의 회중들 역시 한족과 티베트족이 함께 어울려 예배를 드렸다. 이 지역의 첫 번째 라마교도였던 아구신지(Akku Sengi)가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수 차례의 난관 끝에 마침내 공개적으로 주님을 믿게 되었다.

(3) 깐쑤 본부–지우타오(舊洮)성
지우타오성은 CMA선교회의 본부 소재지로 이 곳에서부터 모든 지부가 생겨났다. 원래는 샤허(夏河)성에 예배당을 건축했었지만 회교의 세력이 너무 커 실패에 부딪혔다. 그러나 리라이스(黎萊爍) 목사의 계속되는 도전으로 티베트족 지역에 깊숙이 몇몇 기지가 생겨나면서 이곳은 이후 선교사들이 정탐 그룹을 보내 복음의 미개척지에 대한 답사를 하는 ‘비전 트립’의 출발점이 되었다. 타오저우의 옛 성에서 남하해 서쪽을 향해 들어가면 더 많은 티베트족 거주지가 있다.

(4) 타오성 주위
타오저우의 옛 성은 후에 샤허 티베트족 거주지로, 확장된 CMA선교회의 초기 개척사업의 중심지였다. 리라이숴 목사는 한동안 계속되는 선교공세를 펼쳤지만,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너무 강해 몇 년간의 휴식기를 가진 뒤 허쭤, 샤허, 바오안 등 티베트족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 활동을 다시 전개했다. 이런 활동들은 마치 마의 소굴을 정면 돌파하듯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선교의 불길은 1923년 황하 이북으로 퍼져나가며 여러 티베트족 지역에 예배당을 세웠다. 이 지역에서 많은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땅을 향해 떠나는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들은 그룹을 지어 타어저우의 복쪽, 서쪽, 남쪽을 향해 티베트족에게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떠났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순조롭지는 않았다. 좌절과 실패가 그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바오안에서의 선교사업은 폭동에 의해 파괴되어 흔적도 남지 않았고 바오안, 꾸이더(貴德) 등지의 기지는 다른 선교단체로 넘어가 명맥이 이어졌다. 타오허 상류 지역에서는 일꾼이 부족해 철수했으며 기지는 티베트족에게 불살라졌다. 결국 티베트족을 향한 기지는 세 곳 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듯 많았지만 이 과정에서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5) 샤허(夏河)와 허쭤(合作)
샤허에서의 선교사업은 192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샤허 지역은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로, 시장이 서고 사람이 많이 모여 복음을 전파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이 곳에서 노방전도에 나섰으며 숙소를 열어 외부에서 장사를 하러 오는 상인들이 묵어갈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숙소에는 유목민들을 비롯해 승려나 라마승도 찾아왔다. 여러 번 묵게 된 많은 사람들은 선교사들과 일정한 우의를 유지했고 얼마를 묵었든 모두 선교사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며 좋은 인상을 받아 갔다. 선교사들은 이를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첫걸음이라 여기고 아주 기뻐했다. 실제로 이 숙소 사업은 그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먼 곳에서 온 티베트족들은 이미 복음을 접한 적이 있어 복음을 전파했을 때 낯설게 여기지 않고 어느 정도 호감까지 가졌기 때문에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티베트족 사람들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르는 개가 아주 흉악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말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했는데 티베트족의 개는 낯선 사람을 적으로 간주해 말의 다리를 물어 뜯거나, 뛰어올라 말 위의 사람까지 물어댔다. 낯익은 이가 저편에 서 있으면 즉시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불러야 개가 잠잠해졌다. 선교사들은 티베트족과 만날 때마다 예의를 지키며 공손히 차를 대접했는데 특히 숙소에서도 이같이 행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를 대접하는 사람을 두었다. 많은 티베트족들이 이에 감동받아 선교사들을 친구로 여기고 작은 견직물 조각을 건네줬는데, 이 조각은 명함처럼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 ‘명함’을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면 다시 예로써 대우를 받고 교제하게 되어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1923년 허쭤 티베트족 지역 중심지에 기지가 세워졌다. 그리하여 중심지로부터 사방으로 포교여행이 시작되었는데, 몇 시간의 짧은 여정도 있었고 며칠간의 여정도 있었다. 티베트족 사람들은 한데 모여 얘기를 나누고 변론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그들이 모인 곳에 찾아가 노방전도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면 되었다.

1930년, 새로 지어진 성(省)과 그 부근에 기지를 세우고 약 12,000km 길이의 고산의 평원지대에 있는 티베트족 거주지에 도달했다. 그 곳에는 어디서든 천막을 칠 수 있는 장비를 가진, 야크를 동반한 티베트족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야크의 검은 털을 이용해 장막을 만들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쉬어갈 수 있었으며 유동성도 아주 높았다. 

(6) 다오허와 바오안
다오허에는 먼저 민저우에서 말씀을 듣고 영접한 현지인 저우타이핑(周太平) 부자(父子)가 있었다. 아이즈신 목사는 양이 있으나 목자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디다오(狄道)에서 건너와 포교소를 세우고 거우러톈, 펑쯔신, 싱바오뤄, 창중셩 등의 신학생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도록 했다. 그 뒤 메이바오전과 왕환원이 전도사의 사명을 갖고 다오허로 왔다. 1019년 더원화 목사가 다오허에 머물며 센터를 세웠다. 바오안은 1897년 치웨이롄(祁威廉)에 의해 개척되었으나 티베트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고 성장을 이루지 못해 철수되어 다른 교단에 넘겨졌다.

3. 맺음말

화서지역의 선교사들은 해안가에서부터 선교지로 오기까지 3개월의 시간을 거쳐 수로와 산로의 작은 길을 마다않고 위험과 고립에 맞서왔다. 긴긴 여정 때문에 과거의 선교사들은 도중에 다치기도 하고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깊은 산 속으로 피할 때도 있었으며 배고픔과 역병과 창칼의 위협 속에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을 오직 주님께 맡기며 씨를 뿌리고 양육하고, 성장시켰다. 


필자│빌립.중국 현지 사역자
번역│장유리.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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