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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27  통권 118호  필자 : 박미진  |  조회 : 3261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대만과 중국선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른 땅, 대만
-역사와 정체성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대만의 한 대학생에게 물었다. “대만을 사랑하느냐?” 그의 답은 간단했다. “능력 되면 뉴질랜드나 캐나다로 이민갈 것”이란다. 물론 모든 대만사람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대만 땅을 향한 마음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2,300만 인구, 남한 1/3 크기의 작은 섬나라 대만.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점 때문에 거주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400여 년간 통치의 주도권이 외부세력에 이양되었고, 역사의 최전방에서 오랜 격동을 지내온 대만이였다. 「아름다운 섬 대만, 슬픈 역사의 대만」. 묻고 싶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이며, 누구의 역사인지를.

21세기 선진화된 시스템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여백에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불투명한 미래, 종종 들이닥치는 태풍과 지진으로 돈과 우상에 불안감을 맡겨놓는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득찬 듯 하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이 아픔의 아우성에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른 것이다. 2007년 대만을 뜨겁게 달군 은혜의 잔치를 지나면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마음을 보았다. 중화권의 거룩한 그루터기로 사용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이었다. 상처입은 치유자 대만, 하나님만이 대안인 땅, 중화권의 롤모델이 될 대만. 

역사와 내재된 갈등 속에 화합의 무드를 지향하며,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워나가는 모습은 목적지향적인 삶으로 나간다는 청신호로써, 대만의 복음화에 함께 도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400년 주도권 지각변동, 그리고 남겨진 흔적들
유럽인들이 대만을 발견하기 전까지 대만은 남도어족, 즉 말레이-폴리네시안의 대만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포루투칼이 Ilha Formosa(아름다운 섬)인 대만을 발견하면서 원주민의 삶은 훼손되었고, 동서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한 대만은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등 열강의 할거 속에 본의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제무대로 끌려나오게 된다. 

1624년 네덜란드는 타이난(台南) 안핑(安平)을 중심으로 프로방시아(Provintia:普羅文西) 도시를 건설하고, 1626년에는 스페인이 점령한 딴수이(淡水)와 지롱(基隆)을 차지한 후, 1662년 정성공에 의해 쫓겨나기까지 총 39년동안 대만을 다스렸다. 

정성공(鄭成功)은 대만을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로 삼았고 1683년 청조에 패할 때까지 아들 정경(鄭經)과 손자 정극상(鄭克爽)이 대만을 23년 경영하는데, 이때 정씨 정권은 세력확장을 위해 약 12만 명의 한족(漢族)을 대대적으로 대만에 이주시키게 된다. 후에 정극상이 청조에 항복한 후 한때 인구가 감소했지만, 도항 금지령의 여부를 막론하고 계속되는 이민 행렬은 1906년 일본통치 초기 토착민이 16만명 일 때, 한족은 이미 2백90만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로 많은 한족이 푸젠(福建)성과 광동(??)성에서 이주해 왔으며, 푸젠성 중에도 췐저우(泉州府)와 장저우(?州府) 지역이며 객가인(客家人)이 이주해 왔다. 췐저우 사람은 해안가 평원에, 장저우 사람은 평원의 안쪽에, 객가인은 구릉과 대지에 거주하였으며, 약 200여 년간 토착원주민들은 한족과의 접촉으로 언어나 문화 등이 점차 한화(漢化)되었다. 이들이 현재 민난어(?南語, 민은 푸젠성의 약칭이며, 푸젠성 남부지칭)를 사용하는 본성인(本省人)이다. 

그 후 갑오전쟁 패배로 대만은 일본에 할양되어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 일본통치하에 놓였다. 대세를 뒤집기 위해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탕징송(唐景崧)을 중심으로 대만민주국을 선포하고 저항했지만, 이 모든 일이 역사의 뒷여백으로 채워졌다. 일본은 대만에 “식민지화”와 “근대화”라는 이중 정책을 시행했고, 때문에 철도, 우편제도, 은행 등 근대화를 가져왔고, 후반에는 황민화운동으로 일본식 의식고취와 징병, 위안부 등은 원성을 샀다. 대만인의 일본에 대해 복잡하게 뒤얽힌 감정, 즉 긍정과 부정의 모든 입장은 바로 이 이중정책 때문이다.  

중화민국이 대만을 이양 받으면서 1945년 이후 대만은 중화민국으로 편승되었고, 장제스(蔣介石)을 중심으로한 국민당 정부 통치권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이때 1947년 발생한 228사건은 본성인과 외성인(外省人, 1945년부터 49년까지 이주한 한족)간의 가장 큰 충돌이며, 역사적 아픔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구상에 대만 땅 만큼이나 축구공 채이듯 외부에 의해 좌지우지된 나라가 또 있을까?

대만 곳곳에는 역사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고, 상실된 자주권과 밟혀진 아픔은 그들의 속내에 침전되어져, 대만 각 족군(族群)내 자리잡고 있다. 현재 대만은 1947년이후 본성인(75%), 외성인(13%), 객가인(10%), 원주민(2%)로 크게 네 계층으로 분류되어 왔다.

갈등의 벼랑 끝에 선 대만인
이런 족군간의 가장 극명한 갈등과 더불어 대만은 양안관계와 국제사회에서의 한계에도 우겨싸여 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이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첫째는 본성인과 외성인간의 갈등인데, 평상시에는 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선거철이 되면 첨예하게 나타난다. 2004년 5월 남색(藍色, 국민당)과 녹색(綠色, 민진당)의 치열한 선거전이 한창일 때 일이다. 교회 내에서 개인적으로라도 투표대상을 언급하거나 물어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당시만하더라도 외성인은 외성인 후보, 본성인은 본성인 후보를 투표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묻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물론 2008년 5월 현 마잉주(馬英九)때는 천수이볜(陳水扁)의 부패로 사뭇 분위기에 변화는 있지만, 큰 구조적 틀 안에서는 여전했다. 또 최근에야 비로소 주민증에 본성, 외성 등의 호적 기입난을 없앴다.    

원주민을 대상으로는 원주민구제기금회가 조성되어 직업과 기타 지원 단체가 운영되고 있었다. 즉 사회 약소 계층으로 인식되어 있다는 것이고, 사회내에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정권의 임기 중에 중정기념관의 대중지정(大中至正) 현판을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교체할때도 국민당과 민진당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이때 장가(將家) 4대인 장요우보(將友柏)는 핑궈(?果)일보 2007년 12월 26일자에서 현판교체를 찬성하며, 장가를 토템(totem)화 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장가시대는 이미 끝났으며, 반장(反將)이나 친장(親將) 모두 자신의 정치적 이익 때문이라는 발표를 통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마치 한국의 영?호남이 종종 정치판의 단골메뉴가 되어 결과적으로 지역세로 인한 분열을 자아내듯 대만의 선거후보들도 종종 이 카드를 사용하지만 대의가 아닌 당이나 개인의 사욕 때문인 것이다.

둘째는 양안관계이다. 항상 긴장과 화해를 유지해야 하는 뜨거운 감자이다.  양안의 화해 분위기는 2009년 3통 협정인 통상(通商)?통항(通航)?통우(通郵)에 이어, 올해 2월 동남단의 섬 핑탄다오(平潭島)에서 대만의 정보기술(IT)단지 신주(新竹)까지 해저 126Km를 연결하는 해저터널 건설에 합의했다. 양안은 하나의 중국과 자주적 입지라는 정치적 입장에는 양측 모두 팽팽하게 대립하지만 경제무역 협력과 교류라는 자국 발전을 위해서는 상호협력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이 부상하면서 1972년 중국의 국제연합에 가입과 더불어 대만은 탈퇴했다. 이때부터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역량은 감소되었고, 외교적 난항을 겪게 된다. 최근에는 대만에 무기수출로 인해 중국은 미국에 항의함으로 중미의 갈등관계를 볼 수 있다. 중국은 계속해서 대만과 해외세력 간의 협력이나 교류에 압력을 넣고 있다. 결국 양안은 이중노선의 구조 속에서 긴장과 협력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하는 대만인, 또 하나의 난제, ‘정체성’
계층간의 갈등, 대내?외적인 난제를 안고 있는 대만은 이제 오늘을 딛고 내일을 향해 날아오르고자 힘겨운 날개 짓을 시작했다. 과거 역사가 뒤집어 씌운 철 날개를 벗겨내는 중이다.  

즉, 국가의 정체성과 이를 둘러싼 통일과 독립의 갈등 문제로써, 통일을 지지하든, 독립을 지지하든 혹은 둘다 찬성하지 않든 간에 대만을 주체로 하는 사고방식과 관념이 대만 사회내에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만은 하나의 국가이면서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지만, 그 내부의 많은 제도와 조직은 모두 대만을 하나의 정치 실체로 삼는 경계를 긋고 있다.

이런 이유로 총통인 마잉주(馬英九)는 총선때마다 10년 전에는 신대만인, 5년전에는 대만인이며 중국인, 지금은 대만인이라고 말을 바꿨으나, 2008년 10월 17일 대만문화기념일을 기념하지 않은 마총통을 향해 ‘대만 사랑은 구호뿐’ 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대만의 자주적 문화를 통한 대만인의 정체성 확립을 중시하는 일례이다.

또 외성인의 대만 입성이 반세기를 넘으면서 “토란감자(芋仔番薯)"란 신조어가 생긴지 오래이다. 즉 본성인(고구마)과 외성인(토란)의 통혼으로 인한 자녀를 일컫는 말인데, 최근에는 동남아신부, 중국국적의 배우자 등도 가세하고 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들이 대만의 차세대 주역들이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현재 젊은이들은 족군이나 양안관계로 규정된 것이 아닌 대만인이라 불려지길 원한다. 다시말해 정치와 역사와 문화를 구분해서 정치는 자유민주제도이고, 역사와 문화는 대만자체 역사와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만 문화를 “중국화(中國化)”해서는 안되며, 대만 문화의 특색은 과거 접해왔던 중국, 일본, 네덜란드 문화의 장점을 수용한 대만만의 독창적 문화를 창출 유지한다는 것이다.  

대만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打不死(맞아도 죽지않는)”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있는 대만인들. 400여 년 동안 대만을 거쳐 간 통치자들은 하나같이 대만을 점령하면서 희망을 품었다. 예를 들면 네덜란드는 동인도공사를 통한 경제발전을, 정성공은 반청복명을, 청의 위용허(郁永河)는 유황채취의 희망을, 일본은 건설식민지 꿈의 실현을, 국민당은 반공중국의 기치를 건 것이다. 1987년 계엄해제 이후 정치의 민주화를, 동시에 소위 대만본토 정권 건설 시대를 열었다. 혹자는 약자의 변명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대만은 매 시대 전열을 가다듬는 재기의 땅이였던 것이다. 

약소국가인 대만, 그 험난한 역사를 지나 오늘 21세기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남은자(remnant)를 생각했다. 하나님의 계획속에 남겨진 자들. 그렇다. 그 모진 시간을 뚫고 나온 지금 대만 땅에 발딛고 있는 대만인은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자들이다.

대만에 불어온 부흥의 바람, 성령의 바람
2007년 대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다. 신디 제이콥스를 비롯하여 프랭크리 빌리함, 조용기 목사, 온누리의 러브타이완, 삼일교회의 10여 년에 걸친 단기선교 등 이외에도 개교회의 단기선교와 현지교회의 크고 작은 집회는 대만을 은혜로 달구었다.  

뿐만 아니라 대만 내에도 교파를 초월한 대만교회 연합기도회가 매년 회를 거듭할수록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대만 땅에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변화하고 있는 대만교회의 모습이다.

약 10년을 전후하여 조성된 기도의 열망, 부흥의 소망함을 개교회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해외 교회와 연계하면서 대만교회는 점차 뜨거운 기도의 체험을 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소그룹 모임의 활성화와 정착은 링량탕(靈量堂)이나 쩐리탕(?理堂)을 중심으로 대만에 적합한 교회 모델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작은 섬에 지나지 않고, 역사적으로 피통치 하에 400여 년을 이어왔으며, 계층간에 화합무드를 조성하지만 여전히 심화된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대만이 과연 그들 스스로나 화교권이나 혹은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인가? 국민소득이 18,000달러인 그 땅에 선교사가 필요한가? 

대만은 한국보다 약 20여년 앞서 복음이 들어갔다. 또 그곳에서도 부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흥의 불씨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그라들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퇴보현상을 보인 것이다. 

현재 대만은 도교, 불교, 일관도가 따로 혹은 혼합된 양상의 종교 사찰이 있으며 그것을 숭배하는 대만인은 기본적으로 90%를 육박한다. 당연 이들은 여러 우상들과 조상신을 기본적으로 섬기고 있다. 또 섬이라는 특성상 민간신앙이 발달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혼탁한 가운데 기독교는 천주교 포함하여 3%라는 저조한 비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관습과 민간신앙에 잡혀서 21세기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만은 지역적으로는 선진국 형이지만, 영적으로는 복음증거지역인 것이다. 어쩌면 관습과 발달된 경제로 인해 피폐해진 영혼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접해야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접근이 필요한 영적 전쟁터이다.

자신의 족군에 대한 애착과 완전히 융화되지 못하고 피해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화합을 위한 유일한 대안은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만이 모든 문화와 가치관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복음화는 물질만능의 화교세계에 물질의 소유가치를 사용가치로 전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물론 중국이라는 거대한 물적, 인적 자원 때문에 대만의 영향력이 평가절하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통 중국문화와 화교세계의 정신적 위안은 대만이 나름 그 의미와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대만이 중화권 내에 모든 상황에서 복음화의 모델을 제시할 때, 이는 화교권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만은 작지만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설 때 그 앞에 펼쳐질 지경은 중국과 동남아와 전 세계 화교가 놓여 있다.

 

 

* 참고자료 *
- 蕭新煌外,《台灣新典範》(台北: 群策會李登煇學校, 2006)
- 陳儀深外,《台灣的社會 》(台北: 群策會李登煇學校, 2004)
- 院銘,《台彎?年.看未來》(台北: 玉山社, 2008)
- 李智仁,《台彎的基督?會與祖先崇拜》(台南, 人光出版社,1995)
- 주완요,《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서울: 신구출판사, 2003) 





박미진 | 대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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