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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는 근대 중국선교 역사에 최초로 순교한 로리에 목사(Rev. Walter Macon Lowrie)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로리에 선교사의 집안은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아들 로리에를 중국으로 보내 선교 일선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결국 로리에는 해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근대 중국선교의 최초 순교자가 되었지만, 그의 부친은 오히려 로리에의 동생까지 중국에 선교사로 보내게 된다.
로리에 상원의원과 미화서관(美華書館)
로리에는 1819년 2월 18일 미국 펜실바니아주(Pennsylvania)의 버틀러(Butler)에서 태어났다. 1829년에 로리에의 부친이 뉴저지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자, 일가족은 미국의 수도인 워싱톤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미국북장로회 소속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해외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먼저 로리에의 부친에 대한 소개를 하겠다.
그의 부친은 1837년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성립되자 모두가 부러워하는 상원의원직을 사직하고, 해외선교부의 초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특히 중국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은 문호가 개방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사람을 통해 프랑스 파리에서 중국어 활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개방되면 곧바로 인쇄소를 설치하여 문서선교 활동을 착수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1844년 미북장로회는 마카오에 “미화서관(美華書館)”을 설립하였다. 이 인쇄소는 그 이듬해에 닝뽀(寧波)로 이전하여 활동하다가 1860년에 상하이(上海)로 옮겨 출판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미화서관은 19세기 하반기에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인쇄소로 성장하였다. 청말에 2백여 명의 인쇄공을 고용할 정도였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미화서관은 광학회(廣學會)에서 출판하는 모든 서적과 잡지들을 인쇄하였고, 그밖에 기독교 서적 이외의 많은 서적들을 인쇄하였다.
1896년 청나라는 중국인들이 직접 경영하는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을 설립하여, 외국인들이 주로 진행하던 출판사업을 직접 주도하고자 하였다. 상무인서관의 창립 회원의 대부분은 미화서관에서 기술을 배양한 직원들이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 때문에 상무인서관의 초기 약관에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서적이나 잡지를 출판하지 않기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처음으로 일요일을 휴일로 정하고 직원들이 예배에 참석 할 수 있도록 배려한 회사가 되었다. 상무인서관이 중국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은 자타가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미화서관이 상무인서관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미화서관의 문서선교를 통해 중국근대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자신의 두 아들을 중국선교를 위해 헌신케 한 것은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준다.
로리에 목사의 중국선교
로리에 목사(Rev. Walter Macon Lowrie, 婁理華)는 삼형제 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아래 수학, 지리학, 고대사와 근대사 등 학업의 기초를 철저히 연마하였다. 13세에 제퍼슨 학교(Jefferson College)의 예비학교에 입학 후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그 이듬해 정식학생이 되었다. 로리에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갖게 된다. 이 때부터 자기의 신앙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여 마침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제퍼슨 학교를 졸업 후, 바로 프리스턴신학교(Theological Seminary at Princeton, New Jersey)에 입학하여 선교사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당시는 아프리카를 품고 아프리카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을 하였는데, 선교부의 위원들은 그에게 중국선교를 권유하였다. 당시 중국은 선교의 도전이 상당히 강한 지역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일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마침내 그 권고를 받아드려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1842년 1월 9일, 로리에는 미국북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42년 1월 19일, 그는 헌트리스호(Huntress)를 타고 중국선교의 비전을 품고 중국을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에 불과했다. 로리에 목사가 중국에 도착했을 당시는 아편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마카오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 그는 마카오에 도착하여 전쟁이 끝날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얼마후 아편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중국은 영국과 난징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고,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뽀(寧波), 상하이(上海) 등 5개 항구를 개방한다. 또한 홍콩(香港)을 영국에 할양하고 중국근대 역사에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동서양의 정치외교, 무역과 문화교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중국선교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중국근대 최초의 중국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은 1807년에 중국에 왔었지만, 당시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지 않은 상황때문에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선교 활동을 해야했다. 모리슨 이후의 선교사들 또한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이 열리길 기다리며 간접적인 선교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편전쟁 후 중국이 5개 항구를 개방하게 되자, 동남아 지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교사들이 홍콩을 비롯해 개방된 지역으로 옮겨오게 된다. 비록 부분적이지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중국선교가 홍콩과 개방된 5개 항구를 중심으로 진행하게 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로리에 목사도 동남아와 개방된 항구 등을 답사 한 후, 1845년 4월 11일 최종적으로 닝뽀에 정착하여 미국북장로교의 중국선교 기지를 확보하였다.
로리에 목사의 순교
이와같이 중국선교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보기에 적합한 성경번역에 대한 필요를 인식하고, 모리슨이 번역했던 번역본을 다시 번역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공감한다. 이에 1843년 8월에 영미선교사 12명이 홍콩에 모여 성경번역 문제를 상의하고 이 번역본을「대표역본」혹은「위판본(Delegates’ Version)」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한 곳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5개 항구에서 각자 번역한 것을 기타 다른 지역에 돌려가며 교정을 실시하고, 마지막으로 5개 항구의 대표들이 모여서 최종적으로 통일된 번역본을 결정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로리에 목사는 언어연구에 남다른 흥미와 능력을 갖추어, 닝뽀 지역의 대표로 선출되어 이 성경번역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모든 대표 중에서 가장 연소한 대표였다. 이 성경번역의 총본부가 상하이에 있었기때문에 로리에 목사는 상하이와 닝뽀를 자주 왕래해야 했다. 1847년 8월 19일, 로리에 목사는 상하이에서 성경번역 회의에 참석하고, 닝뽀로 돌아가는 뱃길에 해적을 만나게 된다. 해적들은 로리에의 물건을 빼앗고, 그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후환이 두려워 그를 바다에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후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뜻밖의 순교로 인해「대표역본」 번역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선교에도 많은 손실을 가져왔다. 닝뽀장로교회는 비록 그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닝뽀장로교 공원묘지에 묘비를 세워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한 로리에 목사를 기념하였다. 그의 부친은 그가 순교한지 4년만에 로리에 목사의 설교 원고를 편집하여 미국에서 설교집을 출판하였다. 그의 설교집 마지막 원고는 닝뽀의 방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로리에 목사의 현지언어 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리에 목사의 중국선교
로리에 목사가 28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에서 순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부친의 중국선교에 대한 사명과 열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중국을 사랑하여 로리에 목사의 동생 로리레 목사(Reuben Lowrie,婁理瑞)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과거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는 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로리에 목사는 형보다 8살 아래였는데, 중국에 오기 전에 그는 벌써 미국 내의 인디안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1854년 로리레 목사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중국에 도착하였다. 이때가 형 로리에 목사가 순교한 지 7년이 되는 해였다. 그는 형의 기업을 이어서 중국선교에 참여하였는데, 선교사역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일본에 가서 휴양해야 했다. 휴양을 마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을 했지만,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서 1860년 상하이에서 소천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3세에 불과하였다. 그의 묘지는 상하이의 장로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는 형과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동생 로리레 목사는 중국에서 6년간 사역하면서 중국어로 세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가 과로로 소천한 이유도 가히 짐작이 된다. 그 중에 한 권은 상하이 방언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책 이름은「마태복음 주해(馬太福音 書注解)」였다. 두 형제가 중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했지만, 또한 이렇게 짧은 기간에 현지어로 설교하고, 책을 출판할 정도로 중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은 현재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에게 큰 도전을 준다.
로리에 목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북장로회는 상하이에 청심당(淸心堂)이라는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판함 목사(Rev. John M.W. Farnham, 范約翰)를 이 교회 담임목사로 임명하였다. 판함 목사가 묵고있던 곳이 바로 로리에 목사가 거주했던 주택이었다. 판함 목사는 당시 중국사회가 매우 혼란하여 많은 고아들이 집도없이 방황하는 것을 보고 고아들을 자기집에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판함 목사는 미국에 있는 로리에 목사의 사모에게 모금을 부탁하여 로리에 목사가 거주했던 주택에 고아들을 중심으로 청심학교(淸心學敎)와 청심여학교(淸心女學敎)를 세웠다. 마침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해외선교비가 삭감되자 판함 목사는 청심학교를 원예와 인쇄기술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로 전향하였다. 이 직업학교를 통해 많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직업훈련을 받고, 사회에 나가서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새로운 현대화 첨단기술인 인쇄술을 배우는 것은 물론 영어까지 능통하여, 서양인들이 경영하는 인쇄소와 출판사에 대거 등용되어 동서문화의 교류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또한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상무인서관까지 영향을 미쳐서 중국근대 인쇄술의 현대화에도 지대한 공헌을 세우게 되었다.
2천여 년 전 아기 예수가 이 땅의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한알의 사랑의 밀알을 뿌리신 것처럼, 두 형제가 중국의 많은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광활한 중국 땅에 한 알의 복음의 밀알을 뿌리고 묵묵히 사라졌지만, 그 복음의 열매가 오늘날까지 풍성하게 맺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 중국선교 사명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해 본다.
강인규│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미화서관에서 인쇄한 「中外紀聞」.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