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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통권 116호  필자 : 정민영  |  조회 : 1555   프린트   이메일 
[선교일언]
관중석에서 무대로


선교하는 교회에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지도자는 열심인데 성도들은 무관심인 교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성도들은 선교의 불이 붙었는데 지도자는 시큰둥한 교회도 있고, 지도자와 성도가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선교에 매진하는 교회도 있다. 물론 마지막 유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첫 번째나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아예 선교에 대한 관심도 없고 참여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이 두 번째 유형의 교회에도 개선해야 할 부분은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성향
우리는 문화적으로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적 특성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오랜 기간 지속된 왕조체제와 그 사상적 지주역할을 해온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토양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좀처럼 착근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봉건체제라는 중간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수의 봉건영주들에 의해 권력이 분할·분산되는 중간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장기간 일인·일당 독재에만 길들여진 백성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이 도래했다고 하루아침에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논리이다. 최근 성남, 광주, 하남을 한 행정구역으로 통합하려는 시도와 맞물려 여기저기서 통합의 움직임이 활발한데, 거대 지방자치 행정구역들의 출현이 현대판 봉건시대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 참다운 풀뿌리민주주의 시대를 도래시킬 서곡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도 들린다. 일리 있는 말이다.

군(君)과 신(臣), 주(主)와 종(從), 지도자와 추종자의 구분이 유별나고 분명한 게 바로 우리네 전통문화인 셈인데, 그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른이나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는 우리네 문화가 갖는 소중한 유산들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 성향이 빚어내는 역기능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매사를 어른이나 지도자에게만 맡기는 의존심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지도자가 매사를 독점한다는 문제도 포함된다.

민주주의를 한다면서도 탁월한 지도자를 세워놓고, 또는 평범한 지도자에게 ‘탁월성’을 부여하고, 민초(民草)는 지도자의 모노드라마를 구경하며 기껏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독재를 싫다고 하면서도 정작 강력한 지도자가 없어지면, 그래서 국민의 책임 있는 역할이 요구될 때, 불안해하는 모순이 우리네 사회에서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는 없고, 그저 군사독재냐 문민독재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푸념도 들린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좀처럼 밀실 보스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이 지도자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돌을 던지는 모습이 바로 그 증상인 것이다.

대표선수와 관중
정치뿐 아니라 매사가 그렇다. 사람들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을 부담스러워 하면서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대표자를 세우고 대리만족을 취하려 한다. ‘대표선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운동을 해도 직접 뛰기보다는 대표선수를 뽑아 출전시키고 자신은 관중석에 앉아 구경하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네 스포츠 열기를 분석해 보면 참여자보다 관중이 되기를 더 좋아하고, 직접 뛰기보다 관람을 더 즐기는 성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학예회나 음악회, 전시회도 마찬가지이다. 무대 위에는 으레 보통사람이 엄두도 못 낼 엄청난 실력을 갖춘 달인(達人)이 등장해 연주하기 마련이다. 무대에 올라가 참여한다는 것은 일반인은 꿈도 못 꿀 일이며, 자기뿐 아니라 남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범인(凡人)이 용기를 내어 무대 위로 올라갈라치면 사방으로부터 곱지 않은 눈총과 야유를 한 몸에 받기 십상이다. 

서양인들은 우리보다 참여적인 경향이 강하다. 언젠가 서양학교의 연주회에 갔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남들보다 별로 뛰어나지 않은 학생들이 나와 노래도 하고 악기도 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네 경우와 비교되면서 ‘이 나라에 정말 인물 없구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경하는 제 얼굴이 오히려 화끈거릴 정도로 수준이 낮은 연주에 놀랍게도 청중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었다. 보통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그들의 태도는 분명 우리네 관행과는 다른 면모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지어 기업도 대표선수를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국민 모두가 뛰는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나가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오죽하면 ‘재벌’이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통하는 전문용어가 되었을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모양새 반듯한 기업을 만들어 내세우는 일에 정부도 국민도 온통 한 마음이다. 그래서 세계굴지의 대기업들이 즐비한 우리네 경제현실에 많은 사람들은 가슴 뿌듯한 긍지를 느끼는 것 같다. 비록 내부적으로는 그들의 불의와 전횡에 불만을 토하면서도 말이다.

교회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견된다. 우리네 교회에서 목회자나 전임사역자들은 일종의 대표선수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관중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당이라는 ‘공연장’에 몰려와 강단이라는 ‘무대’ 위에서 외치는 목회자의 설교를 감상하며 즐긴다. 그리고는 평점을 매긴다. ‘아무개 목사는 백 점, 아무개는 오십 점, 아무개는 안 되겠어...’ 백 점짜리 ‘공연’을 본 날은 기분이 좋다. 그날 ‘투자’한 가치가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주일에는 어떤 새로운 공연이 펼쳐질 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공연장을 떠난다. 일단 교회당을 떠난 후에는 무대도 공연도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겨운 일상이 있을 뿐이다.

관중석에서 무대로
좀 지나친 비약일까? 필자도 이것이 과장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성도들이 항상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관성에 머문다면 분명 심각한 문제이다. 전도도, 양육도, 선교도 모두 목회자나 선교사의 책임이고 성도는 관중일 뿐이라면 말이다.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 성도는 끊임없이 받는 역할이고 목회자는 끊임없이 공급하는 역할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야한다. 어느 특정계층의 책임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반드시 풀어야 할 공동과제인 것이다. 관행과 타성에 더 이상 매어 있지 말고 성경적인 가치와 모델로 과감히 변신해야 한다. 민주주의 시대가 엄연히 시작되었는데도 왕을 세우고 그 통치 아래 무릎을 꿇는 모습을 겸양지덕으로 미화할 수 없듯이, 개혁자들이 피 흘려 회복한 성도의 역할과 위상을 자진 반납한 우리네 현실은 분명 다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 지도자도 성도도 의식과 행동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우리 각자가 속한 단체와 교회가 혹 그러한 덫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지도자 몇 사람의 열기로 유지되는 선교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선교는 교회에게 부여하신 공동체적 사명이기 때문에, 세계선교라는 엄청난 무게의 짐을 지는 데 모든 성도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어깨를 든든히 대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동역자’라 칭했듯, 성도 모두가 책임 있는 선교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풀뿌리선교운동, 즉 모든 성도들의 헌신적 기도와 동역 없이 세계선교라는 영적전쟁의 승산은 희박하다.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자. 관중석에 앉아 구경이나 하고 박수만 치지 말고 무대 위로 올라와 함께 뛰자. 선교사도, 성도들도 세계를 함께 품어야 한다. 가든지, 보내든지, 중보하든지, 동원하든지 각자의 달란트와 상황에 따른 역할을 찾아 실속 있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세계선교의 남은 과업을 완수할 것으로 기대되는 21세기를 맞아 한국교회에 풀뿌리선교운동이 산불처럼 번지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정민영 선교사 |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부(G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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