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陳凱歌)는 중국의 5세대 감독으로 ‘투게더’와 ‘무극’을 제작하였고, ‘패왕별희’는 199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여 세계적인 거장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2009년 경극 배우를 소재로 한 ‘매란방(梅蘭芳)’을 선보였다. 경극은 200년 동안 중국의 대중공연예술로 사랑을 받아왔고 노래, 연기, 춤, 대사, 무술이 어우러진 공연예술이다. 세계 최고의 경극 배우 메이란팡은 매력적인 노래, 여역 연기, 분장으로 창의적인 무대예술을 표현하여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란방’과 ‘패왕별희’ “‘패왕별희’가 내 자신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 _천카이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극에 인생의 희노애락을 반영하여 인생은 연극과 같다고 한다. 중국영화 중에 전통극을 소재를 한 것 중에 주목받았던 영화는 1993년 대만 허우샤오셴(侯孝贤) 감독의 ‘희몽인생(戏夢人生)’이다. 이 영화는 전통 인형극(布袋戏)의 대가인 리톈루(李天禄)의 인생역정을 표현하였다.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活着)’은 그림자극을 공연하는 주인공 푸궤이의 삶을 시대별로 다루었다.
2009년 천카이거 감독은 중화민국 초기 경극계 제일의 여역 배우(女役俳優) ‘메이란팡’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였다. 메이란팡(매란방 梅蘭芳 1894-1961)은 여자배역 연기의 최고로 손꼽히며 극중의 여배우인 멍샤오둥(맹소동 孟小東 1907-1977)은 충직한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 경극에서는 남성이 여성역을 맡았고, 여성이 남성역을 맡았는데 무대예술에서 이러한 성(性)의 교차현상은 보편적이었다.
천카이거 감독은 ‘패왕별희’가 내 자신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늘 그것을 능가하려 초월하려 생각했다면 이 영화(‘매란방’)는 촬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극중 주인공의 인물을 비교하여 “‘패왕별희’에 나오는 청뎨이(정첩의 程蝶衣 장궈룽분)는 주변인물이지만 메이란팡은 주류이고, 청뎨이는 반항적인 인물이지만 메이란팡은 강인한 인물이다... ”라고 비교하였다. 일반적으로 ‘패왕별희’의 스케일은 웅장한 반면 ‘매란방’은 인물묘사에 치중하였고 대중 친화적인 영화로 평가된다.
재미 대만학자이며 작가인 바이셴융(백선용 白先勇)은 매란방을 경극 배우 중에 가장 추앙하는 인물로 꼽았다. 그는 9살 때 매란방의 ‘모란정’가운데 ‘유원경몽’ 공연을 관람한 후 60년이 지나서 명대 탕현조의 ‘모란정’을 각색하여 ‘청춘버전 모란정’을 제작하여 곤곡(崑曲)의 전도사가 되었다.
중국은 2008년 북경올림픽에서 유구한 중화문화의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고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힘을 기울이며 중화민족의 자존감을 고양시키데 전력을 다했다. 영화 ‘매란방’ 역시 중국 전통문화예술의 세계화에 기여하였다.
경극, 새 인물이 새 시대를 열다 “너의 시대가 도래했다.” _ 츄루바이(구여백 邱如白)가 메이란팡에게 하는 말
메이란팡은 1894년 경극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메이란팡의 조부 메이챠오링(매교령 梅巧玲)은 궁중에서 여인역을 맡았다. 청말시대 배우는 창기(娼妓)같은 대우를 받아 백부가 메이란팡에게 종이 수갑에 관한 일화 한 가지를 들려줬다. 궁정에서 배우가 실수를 저지르면 손에 종이 수갑을 차고 두 손으로 물그릇을 들어 올리게 하여 종이 수갑이 찢어지면 매질을 당해 죽었다. 이는 전통사회에서 대중 연예인이 당하는 수모와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영화에서 어린 메이란팡이 공연을 마치고 예쁘장한 사춘 형이 메이란팡한테 할아버지 무릎에 앉으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하자 따귀를 때렸다. 이 장면은 젊은 배우가 술시중을 드는 당시 보편적인 상황을 반영했다. 당시 대중예술인 대표인 메이란팡은 경극 배우의 지위향상을 위해서 분투하고자 결심하였다.
메이란팡은 스싼옌(十三燕)과 관객동원을 걸고 3일간 승부를 펼쳤다. 이 대결은 경극에서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늙은 경극 배우인 스싼옌은 궁정 배우 출신으로 젊은 메이란팡이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메이란팡은 첫 번째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사람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창의적인 작품을 선보여 새 시대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중화민국초기 1913년 메이란팡은 19살에 상해에서 공연을 치렀고, 1916년에 당시 유명한 사대 여역배우(四大名旦)중에서 최고가 되었다. 근대 희곡사에서 메이란팡은 새로운 극작품을 선보였고 음악과 표현예술을 개혁하였다.
사랑보다 고독의 길을 떠나는 예술가 “누가 메이란팡의 고독을 허물면 그 사람은 바로 메이란팡을 허무는 사람이 됩니다.” _츄루바이(邱如白)가 멍샤오둥한테 메이란팡 곁에서 떠나줄 것을 부탁하며
쾌활하고 호탕한 멍샤오둥과의 만남을 통해 메이란팡은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리고 함께 무대에서 ‘유룡희봉(遊龍戏鳳)’을 공연하였는데 한 쌍의 용과 봉황과 같았다. 메이란팡의 처 푸즈팡(복지방 福芝芳)은 멍샤오둥에게 메이란팡은 당신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소유도 아니며 관객의 소유라고 말해 예술가의 아내로서 남편의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였다. 메이란팡의 매니저인 츄루바이(邱如白)는 멍샤오둥한테 메이란팡의 고독을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열정적인 멍샤오둥은 내심 메이란팡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접었지만 메이란팡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느 날 공연장에 자칭 멍샤오둥의 연인이라는 괴한이 나타나 총을 쏘고 난동을 부려 군경에 의해 피격된 후 멍샤오둥은 종이 제비와 미소를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났다. 메이란팡은 복잡하고 우울한 심정을 해결하지 못한 채 1930년 1월 중국인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천녀산화(天女散花)’곡을 불렀다. 당시 메이란팡은 동양 여성의 비창과 희열을 담아 대 공항으로 고통 받는 미국인에게 감동을 선사하였다. 뉴욕공연 첫 날 저녁 메이란팡은 츄루바이가 자객을 동원해서 멍샤오둥으로 하여금 떠나게 한 진상을 알고 분노했다. 메이란팡은 눈발이 치는 하늘에 멍샤오둥이 주었던 종이 제비를 날려 상실의 고통을 떨쳐버리고 자유를 갈구하였다.
영화에서 메이란팡과 이별한 이후 멍샤오둥의 행적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멍샤오둥은 노쇠한 두웨성(두월생 杜月笙)과 결혼하여 1949년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갔다. 1967년 그녀는 대만에 정착하여 말년을 보내고 중국대륙으로 귀국을 종용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연인과 이별하고 조국을 떠난 여배우의 애달픈 삶을 엿볼 수 있다.
부부와 연인의 사랑마저 거부하고 상실과 고독으로 점철된 메이란팡의 영혼은 오직 관객을 위하여 예술혼을 불태웠다. 천카이거 감독은 예술가의 헌신적 자세를 종교인처럼 숭고하게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위해 중보하지 못하고 예수님 혼자 하나님을 독대하고 철저한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선택하셨다.
세계를 가슴에 품은 경극 배우 “메이란팡을 정복해야 중국문화를 정복할 수 있다.” _일본군 소좌 다나카 류이치
천카이거 감독은 영화에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 메이란팡의 항일의식을 부각시켰다. 1931년 9.18 만주사변 후 매니저인 츄루바이는 메이란팡이 북평에 남아 공연을 계속할 것을 종용했지만 메이란팡은 상해로 가서 정착하려고 했다. 일본군은 메이란팡을 설복시키려고 했지만 메이란팡은 공연을 거절하여 일본군과 동료의 설득에도 굴하지 않는 애국지사의 면모를 보여줬다. 메이란팡을 위해 죽은 일본군관이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인이 메이란팡을 구금한 기록이 없고 오히려 일본인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맺었다. 1919년 일본으로 해외 첫 공연을 떠났고 1923년 북평에서 일본의 관동 대지진을 위로하기 위해 공연을 열만큼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면모를 드러냈다.
메이란팡은 일본에서 1919년, 1924년, 1956년 세 차례 공연을 했다. 1919년 메이란팡은 일본공연을 계기로 해외공연의 길이 열려 1930년에는 미국에서, 1935년과 1952년에는 소련에서 공연을 하였다. 영화에서는 미국의 뉴욕 공연만을 부각시켰고 미국대학이 메이란팡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영화에서는 생략되었다. 세계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메이란팡의 팬을 자처하고 미국 대통령이 공연축하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중국인은 메이란팡이 일본, 미국, 소련의 해외공연으로 국위를 선양하였다고 자부하였다.
메이란팡이 곤곡인 탕현조의 ‘모란정 · 경몽’을 공연할 때 혁신파인 채원배와 수구파 총통인 원세개가 관람하였다. 그는 학자, 정치인을 포함한 신구 세력을 모두 매료시켰다. 50년대 메이란팡의 공연비는 모택동 주석의 월급보다 5배를 넘었으니 공산국가가 된 신 중국 초기에도 메이란팡의 인기가 여전했음을 반증한다. 메이란팡은 중국이 적화된 후 10년 동안 고민하다가 1959년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천카이거 감독은 쾌락보다는 효용론적인 입장에서 예술을 해석했다. 중국 지식인은 전통적인 유가 입장에서 메이란팡을 헌신적인 예술가, 고매한 애국지사, 국위선양자로 그렸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예술의 ‘교화(敎化)’ 작용을 중시했다. 예술을 백성들을 교화시켜 국가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도구로 인식했다. 메이란팡은 전통 공연극에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생명력을 주입시켜 전범(典範)이 되었다. 천카이거 감독의 ‘매란방’은 중국문화의 정수, 경극의 핵심인물 그리고 당대 중국지식인의 예술관에 대한 사색을 불러 일으켰다.
김영철│가톨릭대학교 중국언어문화전공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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