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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8.30  통권 115호  필자 : 김경훈  |  조회 : 1629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사회문화영역 안에서 Empathy와 Sympathy적 선교의 구조적 시각

<미션>(1986, The Mission)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젊고 어렸던 필자는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영화를 보았다. 사랑의 질투에 눈먼 형의 동생 살해, 인디오노예, 그리고 헌신적인 복음전도, 그리고 속죄, 끝으로 죽음으로의 결말. 이것이 내가 느낀 감상이었다. 그 때는 필자가 선교가 무엇인지, 스스로가 선교사로 나갈 것이 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 영화를 수 년 전에 다시 보게 되었다. 필자의 선교지인 대만에서는 이 영화제목을 <敎會>로 번역했는데, 대만은 외국영화의 제목들을 중국어로 직역보다는 의미번역을 많이 한다. 필자는 몇 가지의 의문이 생겼다. 한국에서도 외국영화제목을 직역이나 의미번역을 하는데, 왜 영어제목을 한글발음으로 표기하고 대만에서는 The Mission이라는 영어를 왜 宣敎로 번역하지 않고 "敎會" 로 번역했는가?
  선교지인 대만에서 다시 본 영화 미션은 필자에게 차원 다른 느낌과 교감, 공감을 주었고 또한 자기 반성의 기회와 다양한 선교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필자가 느낀 다른 차원은 무엇이며 자기반성의 내용, 다양한 선교 시각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 각 지역에서 지금도 열심히 선교에 힘쓰시는 모든 선교사님의 노고와 아픔을 아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기도한다.

영화 속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기독교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교황체제와 로마카톨릭의 커다란 위협으로 발전하였다.
마침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를 개최하고 내부결속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1541년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는 예수회(Societas Iesu)를 조직하고 유럽 외의 신세계(신대륙)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현지 토착화라는 선교방법을 채택하고 현지인에게 다가갔지만 예수회는 교황의 절대적 충성을 다짐하는 조직이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영화 미션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과 교황체제와 로마카톨릭의 절대적 지지 세력인 스페인왕국과 포르투갈왕국간의 식민지쟁탈과정 그리고 예수회 신부들과 교황청간의 입장을 잘 그려내고 있다. 식민지 지도상에 서양제국들의 이익을 위해 분할과 할애 그리고 뒤 따르는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식민지 민중의 운명. 예수회나 교황청으로 대표되는 선교사 신부들은 영화에서 나오는 과라니족의 노예화와 제국의 식민자들의 살육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했다.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누구를 위한 宣敎(Mission)인가? 누구를 위한 任務(Mission)인가???를 반문했다. 과거 서구기독교는 서구식민제국주의 충실한 안내자와 협조자로의 선교와 임무를 하지 않았던 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일본의 36년간 식민지의 아픈 기억과 고통이 아직도 남아있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問題意識을 갖기를 바라는 필자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남미의 과라니족이 겪었던 과정과 상황은 다르겠지만 과거 선교지 朝鮮半島에서도 모두는 아니더라도 서구기독교 선교사들의 제국적이고 식민지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예로 미국 선교사들간의  신사협정으로 이야기 되는 미국장로교와 미국감리교 간의 입장은 영화 미션 식민지경쟁을 벌이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반도에서 나타난 미국장로교, 감리교간의 이단시비를 떠나 선교의 대상이 되는 조선 민중의 입장보다는 자신들의 선교 편리성을 위해 선교지 분할은 영화에서 나오는 과라니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선교 대상이 되는 민중은 언제나 피동적이고 정복되어야 할 대상인가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불고있는 소위 中華思想, 中華主義 속에서 중국 기독교를 단순히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살펴보았으면 한다. 중국 내의 55개의 소수민족들과 漢族들, 기독교 간의 긴장문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 또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식민지 제국주의든 중화주의든 간에 그 속이 숨어있는 지배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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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athy 와 Sympathy

Empathy와 Sympathy는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영어의 표현이다. 또한 서구의 이성적 관념적 기독교의 한계와 다양한 선교를 위해 새로운 대안으로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기독교로 나아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나온 용어들이다.
  Empathy는 심리적 용어로 사용 가능하며, 감정이입(感情移入) 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개념일 것이다. 필자는 이 뜻을 각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을 다른 개인이 공감하는 성격이 강한 느낌을 받는다. 필자의 글을 읽고 각 개인들이 필자의 느낌이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면 그것이 Empathy가 아닌가 생각한다.
  Sympathy는 사회적 공감대 영역 안에서 각 개인이 느끼는 감정들을 이해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동정이나 공감의 뜻을 의미하지 않나 생각한다.
  영화 미션은 이 두 개념이 공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의 죄를 상징하는 과거의 갑옷과 무기를 끌고 가는 멘도자. 그 줄을 잘라내는 과라니족를 위해 기꺼이 무기를 드는 멘도자의 느낌과 감정. 예수회 수도사의 길을 가는 그가 교황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과라니족에 대한 개인의 Empathy로 무기를 들고 과라니족을 제거하려는 포루트갈 군대와 맞서 싸운다. 그러나 영화 미션의 또 다른 주인공인 가브리엘 신부는 과라니족의 대한 Empathy뿐만 아니라 예수회의 입장과 교황청의 공감대(Sympathy)를 이해하고 무기대신 십자가를 들고 나서지만 포루트갈 정복군대에 죽음을 맞는다.
  필자는 Sympathy의 형성에 관심을 갖고 Sympathy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했다. Sympathy는 Empathy의 확대와 축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는 구조적 시각으로 접근하고 싶다. 아래의 그림은 필자가 이해한 Empathy와 Sympathy의 관계를 표현해보았다. 

  필자는 선교란 각각의 사회문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또한 선교는 개인과 개인, 사회문화 속의 큰 조직들간의 交感과 共感 그리고 느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Sympathy와 Empathy를 따로따로 볼 것이 아니라 전체적 틀과 구조적 시각 안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중국선교의 어려운 점이 바로 중국이라는 사회와 문화 가운데 존재하는 Empathy와 Sympathy가 다양하다는데 있다. 선교지 민중을 바라보는 시각이 단순한 연민(憐憫), 동정, 공감으로만 끝나고 더 큰 틀의 구조적 입장과 Sympathy영역 속의 각 개인의 Empathy한 점을 두루 살피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적 장벽이 존재하면 Empathy와 Sympathy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 되고 만다. 普通話를 Sympathy로 대응하고 중국 내 각각의 방언이나 소수민족 언어를 Empathy으로 대응하면 다른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선교지 상황과 선교사와 선교 대상간의 Empathy와 Sympathy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Empathy와 Sympathy로 느끼는 하나님과 선교사 본인의 감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교감과 공감은 각 개인마다 달리 하는 것이다. 누구는 Sympathy하신 하나님을 느끼고 누구는 Empathy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의 다양한 측면의 번역
21세기 세계각국은 저마다 글로벌시대에 주도권을 잡고자 힘쓰고 있다. 특히 서구의 소위 기독교문명 또한 사활을 걸고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21세기 선교 또한 새로운 세대에 걸 맞는 선교 패러다임을 위해 노력을 경주한다. 물량으로는 한국선교사의 수가 많지만 서구기독교 선교패러다임은 오늘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세계선교, 중국선교에서 우리는 물량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남의 것을 모방, 답습하고 있는 모양이다.
  선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선교는 다양한 사회문화 가운데 있는 Sympathy한 감정적 Mission과 Empathy한 감정적 Mission의 측면을 보았으면 한다. 선교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선교는 사람이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Sympathy와 Empathy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또 이 과정에서 필연적인 인격적 Sympathy와 Empathy한 Mission이 존재한다. 선교중심에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영화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고 그 구조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영화 The Mission을 영화 자체의 Empathy한 감정 부분에 강조점을 두어서 한글로 미션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또한 서구 종속적인 문화구조의 표현으로 대만에서는 The Mission 영화를 대만사회에서 이해하기 쉬운 기독교적 표상과 Sympathy한 느낌으로 이해하기 敎會했던 자기 중심적 문화구조에서 붙였을 것이다. 이는 각 국가나 민족들에게서 나타나는 감정이나 교감, 공감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고 문화구조 역시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다른 대상체(The Mission)에 대한 또 다른 대상체(한국과 대만)가 느끼는 감정의 구조적 측면의 표현인 것이다. 누구를 위한 선교(Mission)인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인간적 감성인 Sympathy와 Empathy로 학습이나 일방적 전달이 아닌 선교지 민중간의 감성적 교감과 공감을 유발하고 함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며, 누구를 위한 임무(Mission)는 선교사 자신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감과 공감을 통해 사회와 문화영역 안에서 선교지 민중과 하나님간의 Sympathy와 Empathy한 관계를 이해하고 돕는 선교사 자신과 사회와 문화영역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경험되고 느끼는 Mission이 필요한 때이다.

김경훈 | 대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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