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소설을 꼽는다면 단연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라 부르는 <삼국지연의>는 14세기 나관중(羅貫中)이 쓴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4세기 이전 송나라부터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강사(講史)세계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삼국지가 이미 대중들이 돈을 내고 들을 만큼 상업성을 지녔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상업영화는 항상 대중성에 관심이 있으며, 그것은 세상과 소통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수호지를 최고의 소설로 꼽기도 하지만 <삼국지연의>는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판본으로 전해져 내려올 만큼 새롭게 해석되어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로부터 민초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삶은 물론 정치관과 처세술 등 폭넓은 영향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단연 앞선다. <중국의 붉은 별>을 지은 에드가 스노는 마오쩌둥(毛澤東)도 어렸을 때 교과서 밑에 <삼국지연의>를 감춰두고 읽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후에 마오쩌둥은 그<삼국지연의>를 전략의 모범으로 삼고 자신의 책에 즐겨 인용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교토대학의 김문경 교수가 쓴 <삼국지의 영광>에 따르면 중국의 현대 역사가들은 지금도 중국은 <삼국지>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즉 중국 대륙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 그리고 해외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중국인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화교 집단’이 오늘날의 삼국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삼국지연의>가 주는 역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현실가치를 반영하는 일로서 마치 우리가 성경을 과거의 역사로만 보지 않고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듯이 중국인에게 <삼국지연의>는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게 하는 텍스트인 셈이다.

최고의 문학을 영화에 담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대중적이고 인생의 지혜와 삶의 전략이 녹아있는 ‘삼국지’를 영화화 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이는 또한 큰 부담을 갖게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의 마음을 녹인 영웅들의 활약상과 천하를 호령하며 야망을 불태우던 인물이 빚어내는 인생들을 그려내는 일은 영화감독으로서 한번쯤 해보고 싶은 큰 유혹이다. 잘하면 삼국지만큼이나 유명해질 수도 있다. 아니 영상의 시대를 맞이해서 장편의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보다 영화로 삼국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후대에 끼칠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1980년대 나관중의 삼국지 보다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를 통해 삼국지의 영웅 캐릭터를 이해했던 사람들이 더 많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책임이 따르는 문제다. 삼국지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면서도 보다 분명히 드러낸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기대에 어긋난다면 사람들의 혹평은 물론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다. 오우삼의 판단은 현명했다. 그는 삼국지 전체가 아닌 오직 적벽대전만을 다루었다. 가장 중요하면서도 상징적인 전쟁을 통해 삼국지 전체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다.

‘적벽대전’이 빠진 삼국지를 생각할 수 있을까? 서양에 ‘트로이 전쟁’이 있다면 동양에는 ‘적벽대전’이 있다. 비록 단일 싸움으로는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 만큼의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규모와 장엄함 그리고 전략에 있어서 ‘적벽대전’은 ‘트로이 전쟁’에 못지않다.

삼국지의 긴 퍼레이드에서 ‘적벽대전’은 하이라이트 중의 하이라이트이고 삼국지의 성격과 본질을 가장 압축해서 보여주는 핵심이다.
 
영화 <적벽대전>의 가치
<영웅본색(英雄本色)>으로부터 <미션 임파서블2>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액션영화를 주저 없이 만들었던 오우삼(吳宇森) 감독의 <적벽대전>을 이해하는 방식이란 그저 스케일이 큰 중국의 전쟁영화를 만들었다는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일까? 즉 그의 대중취향의 영화 만들기 방법이 다시 한 번 재현된 영화로 평가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물론 <적벽대전>는 홍콩의 유명배우들과 그 배우들 이상으로 지명도가 있는 유명 감독, 그리고 거대한 인적 물적 규모가 빛나는 블록버스터 영화인만큼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 상업영화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적벽대전>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서서 예술적이며 인간사의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가치 지향적 성격을 아울러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영화 <적벽대전>의 가치가 영화감독의 역량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원작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시도해볼 수 있지만, 그것은 별 소용이 없는 일이다. 훌륭한 영화란 그것을 가능케 만든 훌륭한 생각(원작)이 있었기 때문이고, 아무리 원작이 훌륭해도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들에게 영화적 감흥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원작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영화 <적벽대전>을 보면서 마음을 빼앗는 거대한 영상의 힘을 경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과 자연에 대한 훌륭한 생각들을 할 수 있다면 오우삼 감독에게도 공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내 딸아이와 <적벽대전>을 두 번이나 보았다. 그리고 딸아이는 그 후 DVD로 몇 번을 더 보았다. 딸아이의 영화에 대한 평가로부터 나는 누구나 삼국지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전쟁의 지략과 영웅의 리더십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딸아이는 나관중의 <삼국지>나 이문열의 <삼국지>, 심지어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 조차 읽어 본적이 없다. 즉 우리 딸은 ‘오우삼의 삼국지’를 읽은 셈이다. 오우삼 감독의 영화화 작업은 일부분 원작과 다른 점이 보이지만 원작을 훼손했다는 원초적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어 보인다. 어쩌면 원작과 다른 점이야말로 감독의 삼국지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독특한 입장을 대변하는 일인 만큼 영화의 가치를 제공하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는 오우삼의 <적벽대전>은 두 가지 면에서 기존의 내용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첫째는 오직 독자의 개별적 상상에 의지했던 적벽대전의 영상미를 실현시킨 점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과 다른 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의 미학
훌륭한 시각예술의 역량은 물과 불을 다룰 줄 아는데서 비롯된다. 물과 불은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내재된 인간 본성의 근원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물과 불의 형태를 빌려 표현할 수 있다. 차가움과 뜨거움, 밑으로 내려가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는 것, 영생과 소멸 등 물과 불의 이미지는 예술가의 상상력의 원천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홍해와 요단강과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물이 어떠한 의미와 이미지로 우리의 신앙에 작용하는지를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바라 본 떨기나무에 붙은 불과 엘리야의 불수레, 등불의 비유를 익히 들어왔다. 성경이 얼마나 시각적 예술성을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물과 불을 잘 묘사할 줄 아는 예술가의 작품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적벽대전2>은 물위에서 벌어진 불의 전쟁이다. 물의 향연 속에 불이 춤추고, 불의 계략에 인간의 마음이 녹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화 <적벽대전>에 나타난 중국인 오우삼의 세계관
<적벽대전>에서 관객들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제갈량이 천지운행을 감지하는 가운데 드러내는 천재적인 전술이었다. 오나라 장수 주유와 화살 10만개를 걸고 한 내기를 보면 제갈량이 얼마나 자연의 운행에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3일 전에 강에 짙은 안개가 낄 것을 미리 알고 목숨을 건 내기를 벌인다. 짚풀더미로 위장한 배를 띠워 조조의 군사들 앞을 유유히 지나가자, 오나라의 공격인양 놀란 조조의 군사들은 비오듯 화살을 퍼붓는 바람에 약속대로 10만개의 화살을 거뜬히 모아오는 장면은 유쾌하면서도 자연을 보고 세상을 판단하는 중국인의 전통적 사고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일찍이 원전에서 제갈량은 ‘장수인자가 천문에 능통하지 못하고 지리를 알지 못하며 기이한 진을 벌일 줄도 모르고 음양을 헤아리지 못하며 진의 형태를 볼 줄 모르고 병세(兵勢)에 밝지 않다면 용렬할 따름이다.’ 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중국인은 자연의 이치를 읽고 그것을 수행하는 삶에서 인생의 행할 바를 읽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영화와 원전 사이에서 논란이 될 만한 중요한 사항이 있다. 제갈량이 화공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남풍을 예견하는 대목이다. 당시 북서풍이 불어 화공전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던 오나라군은 제갈량의 계획에 따라 거꾸로 화공전을 모의한다. 

그런데 원래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칠성단을 쌓고 술법을 부려 동남풍을 불게 만들었다. 즉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줄 알았다는 뜻이다. 자연의 운행이치를 알고 그것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과 자연을 마음먹은 대로 부리는 것 사이에는 세계관의 큰 차이가 있다. 자연을 부린 다는 뜻은 자연 보다 큰 초자연적 능력의 실재를 인정하는 일이며 그것은 바로 유신론적이거나 강한 주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어 바다에 큰 광풍이 불어 배가 위험하게 되자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고 말씀하셨고 바람은 예수님 말씀에 따라 아주 잔잔하여 졌다(막4:39). 기독교는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가지고 있고 그 유일신은 천지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하나님인 까닭에 자연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세계관은 무엇이었고 오우삼은 왜 그것을 바꾼 것일까?

원작에서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쌓은 칠성단은 도교의 칠성신, 즉 북두칠성신을 말하며, 오랫동안 한국과 중국의 민간에서는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어 왔다. 즉 제갈량은 칠성신(七星神)의 힘을 빌려 바람의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제갈량은 단지 바람이 방향이 바뀌는 때를 알고 이를 전술에 사용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이유는 오우삼 감독이 가진 기독교 신앙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기자들에게 일부러 밝히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이기도 한 비둘기의 등장을 묻는 질문에서 만큼은 그의 신앙관을 소개하기도 한다.

2008년 6월, 800억여 원을 들인 아시아 최고의 프로젝트 <적벽대전>의 개봉을 앞두고 그의 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비둘기의 정체에 대해서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내가 기독교 신자라 비둘기를 사랑한다. 비둘기를 봤을 때 평화를 느낀다. 영화에 비둘기를 등장시키는 이유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다. 영화에는 감독의 성향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영화에 비둘기를 등장시킬 것이다.”

오우삼 감독의 초기 작품인 <첩혈쌍웅>등에서 교회와 십자가 등 기독교 색채가 풍기는 이미지가 등장했던 것은 단순히 멋진 장면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감독의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감독의 세계관이 기독교임이 드러날 때 <적벽대전>의 주제는 바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주유와 제갈량과의 우정이다. 이 역시 <삼국지연의> 원본과 다른 점이다. 원본에서 제갈량과 주유는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오우삼 감독은 그의 다른 영화들처럼 영웅들의 속 깊은 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우정이라는 가치가 기독교적으로 매우 의미 있으며 보편적이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감독의 기독교적 성향은 위대한 <적벽대전>의 원전을 바꾸면서까지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강진구│고신대 컴퓨터영상선교학과,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