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호에 미국선교사로 제일 처음 중국에 온 미국외방선교회 소속의 브리즈맨(Rev. Elijah Coleman Bridgman, 裨治文, 1801-1861)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는 중국 근대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파커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중국 근대에 최초의 의사이며 목사로 중국 근대의 의료선교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파커선교사는 후일에 외교관으로도 활약하여 초기 중미(中美) 양국의 교류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파커선교사의 생애
파커선교사(Dr. Peter Parker, 1804-1888)는 마세츄세츠주의 프레밍함(Fremingham Massachusetts)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부였지만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파커는 원래 2명의 형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갓난아이 시절에 요절하여, 누나 2명과 여동생 1명의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농장, 학교, 교회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는 집안에서 유일한 남자였기에 농장 일을 많이 돌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진학시기를 놓쳐, 23세에 암허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입학하여 학교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 되었다. 기독교 분위기가 농후한 이 대학에서 3년을 공부한 후, 예일 대학(Yale Collage)으로 편입하였다. 예일 대학에서는 암허스트 대학의 학점을 모두 인정해 주어 1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1830년, 그가 예일 대학에서 공부할 때, 가장 중시한것은 학교성적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성결한 생활을 추구하고자 항상 자기 자신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해외선교에 헌신할 것을 생각하면서, 의료사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가 예일 대학을 졸업한 그 이듬해 4월 미국외방선교회(美部会) 소속의 안더슨(Rufus Anderson, 安路福) 목사가 예일 대학에 와서 선교집회를 연일동안 인도하였다. 파커는 이 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침내 해외선교사로 헌신할 것을 결단하고, 미국외방선교회 미국외방선교회에 해외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하였다. 미국외방선교회는 그를 소속선교사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에게 예일 대학에 돌아가 신학과 의학공부를 하도록 건의하였다. 파커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예일 대학에 돌아가 열심히 의료선교사로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원래는 4년 과정이었지만, 어느 선박회사가 무료탑승권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이 배를 타기위해 더욱 분발하여 3년 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고, 1834년 3월에 의사고시에 무사히 합격하고, 5월 16일 펜실바니아시의 제일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6월 4일 모리슨(Morrison)호를 타고 뉴욕을 출발하여, 10월 26일 겨우 광저우(广州)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는 중국 근대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광저우에 도착하여 중국에서 의료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하였다.
박제의원(The Canton Hospital, 博济医院)
그는 먼저 광저우에서 1년 동안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그후 1835년 12월 14일, 싱가포르에 가서, 그 이듬해 1월 1일 그곳에 거주하는 화교들을 위해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13항의 상인 대표 오돈원(伍敦元)의 찬조를 받아 외국 상인들만 거주하고 상거래 하는 광저우 13행에 3층 건물을 연 500위안(元)에 임대하고, 11월 14일 정식으로 병원을 설립하였다. 병원 이름을 박제의원(The Canton Hospital, 博济医院) 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박애정신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돌보겠다는 설립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이 병원은 100여 명의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는 진료실과 40여 개의 침대, 그리고 최신형 병원 시설을 갖춘 현대식 병원이었다. 중국내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중국의료의 발전에 새로운 역사를 장식하였을 뿐 아니라, 동방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위대한 혁명가 국부 손문(孙文)선생의 모교가 되기도 하였다.
파커선교사는 안과 전문의 이었는데, 개원 당일에 병원 밖에 무료진료라는 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환자도 오지 않았다. 이튿날, 눈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해왔던 한 부인이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시험 삼아 들어와 진료를 받아서, 중국 근대의 의료 활동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로는 파커의 뛰어난 의술과 친절한 섬김을 통해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병원 활동을 원활히 운영해 갔다. 기록에 의하면 개원 후 17일 동안 240명의 환자가 진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중에 소수 관원들이 포함된 것을 보면 중국인들이 그에 대한 태도가 많이 개선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병원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었는데, 첫째는 안과로 유명하였다. 두번째는 중국인으로 최초의 목사이며,「권세양언(劝世良言)」을 저서하여, 후에 태평천국의 홍수전에게 큰 영향을 끼친 양발(梁发)이 파커와 친분이 있어 이 병원의 전도사로 초빙되어 환자들에게 전도를 한 것이다. 이로써 의료와 복음이 적절히 결합한 명실상부한 기독교 병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근대 중국에서 외국인들은 거의 연안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대부분 마약판매와 무력으로 약탈 등을 일삼아 중국인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 중국인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고아원, 병원과 학교 등이 선의의 뜻에서 세워지고 경영되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쉽게 신임할 수는 없는 상황이였다.그리고 기독교의 여러 가지 의식과 습관들이 너무 생소하여 일반사람들은 사교(邪敎)정도로 이해하여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이토록 배외감정이 농후한 상황 속에서도 파커선교사는 그의 특출한 의술과 온화한 성품으로 많은 중국인들의 신뢰를 얻고, 그를 찾아와 치료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많은 환자들은 감히 낮에 오지 못하고 밤을 이용하여 병원을 찾아와 치료를 받았다.
개원 후 얼마 되지 않아 파커선교사는 중환자를 수술을 해야 했다.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2월 27일, 병력446호, 이름은 아치(阿齐, 나이 13세, 병명은 육류(肉瘤, 소위 말하는 ‘혹’). 그날 나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아버지가 딸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병원으로 들어왔다. 이 소녀는 태양혈이 있는 곳에서부터 큰 혹이 턱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 마치 두개의 뇌가 대롱거리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마취제가 없어, 수술 전 여자아이에게 아편을 먹여 고통을 덜하게 한 후, 눈을 가리고, 손과 발을 수술대에 묶어 놓고, 8분 만에 직경이 10여촌(寸), 무게 500g의 혹을 도려내었다. 그날이 바로 1936년 1월 19일이었다. 비록 수술은 성공했지만, 마취를 하지 않아서 환자는 극심한 통증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우리는 당시 중국인들의 위생환경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고, 또한 파커선교사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의료사역을 감당하였는지 알 수 있다. 10년 후 1946년 미국병원에서 처음으로 마취제를 발명하여 사용하였다. 그 이듬해 미국인 의사가 이 새로운 마취제를 파커에게 보내와 사용하도록 했다. 파커는 이를 35세의 남자환자가 오른쪽 어깨 위의 혹을 떼 내는 수술을 할 때 사용하였다. 이로써 중미양국 간의 의료교류와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서양의학의 ‘외과’라는 개념은 금시초문이었다.특히 중국인들은 “신체와 피부는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어서 이를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전통 관념이 강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수술과 같은 서양의학의 외과의술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더욱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해부하여 조사하는 행위는 전통중국의술에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기괴한 일이었다.이러한 외과와 시체 해부 등의 개념은 중국과 서양사회에 너무 많은 문화적 차이가 있어서 항상 많은 논란과 충돌을 일으켜 왔다.푸젠성(福建省)의 한 관리가 불란서 외무부에 보내는 공문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칼을 사용하여 시술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않아서 중국인들이 쉽게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후에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환자 자신이 자원서를 쓰고,그 가족이 이를 증명할 때에만 비로소 수술을 실시한다.그러나 시신을 해부하는 것은 해괴망측한 일이니 영원히 금지한다.”
파커선교사가 병자들을 치료할 때, 환자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들로 생각하고 치료해주어 환자들로 하여금 큰 환심을 사기도 하였다. 그의 일기에는 항상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내 일생동안 별로 선한 일을 한 기억이 없지만, 하나님의 종들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자 한다. 이들을 최고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맡긴다.”이것으로 보아 파커의 의료 활동이 단순한 의료 활동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광저우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그의 의료 활동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 쟈딘(W. Jardine, 贾丁)은 동인도회사 소속의 의사직을 사임하고, 파커의 조수로 활약하였다.
비록 동서간의 문화적인 차이와 개념상의 격차가 심해 파커의 의료사역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쳐야 했지만,그의 뛰어난 의술과 환자들을 사랑하는 친절한 태도는 점점 중국인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파커의 보고에 의하면 개원3개월 동안 925명의 환자를 치료했고,1년 후에는 2천 명이 넘었다.그리고 1939년 말까지 이 병원에서 치료한 환자수가 7천 명이 넘었다.물론 대부분의 환자는 일반 대중이었지만,소수의 관리들도 와서 치료를 받았다.그 중에 유명한 사람은 아편전쟁의 주역인 양광총독 린져슈(林则徐)였다. 그는 마침 산병(疝病)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었다. 특히 피로가 겹치면서 만성병이 재발하여, 심히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린총독은 파커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병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중국 고위 관리의 신분으로 외국인 의사에게 병을 보이기가 곤란하였다. 파커는 그를 위해 특별히 6565호라는 병력 기록카드 번호를 만들어, 린져슈의 병 치료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린져슈가 특별히 파커에게 스위스인 바텔(Emeric de Vattel, 滑达尔)이 쓴《각국율례(各国律例)》를 번역해 줄 것을 부탁한 일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린져슈는 아편이 인체에 미치는 해로움과 아편중독을 치료하는 방법들을 파커에게 자세히 물어왔다. 린져슈는 의도적으로 파커와 접촉하여, 아편에 대해 더 이해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금지시키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였던 것 같다. 파커는 요청대로 각국율례를 기꺼이 번역하기로 응답하고, 지도, 지리서와 지구의를 린져슈에게 선물하였다. 파커는 각국율례 중에서 서방 각국이 아편을 어떻게 규제하고 있는 부분만을 번역한 것으로 린져슈의 아편에 대한 대외정책에 많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 최초의 국제법 책이 되었다. 청나라 고위관리 중에 린져슈 외에 그의 후임 양광총독 치잉(耆英)도 피부병을 파커에게 치료받고, 이에 감사해 친필로 “妙手回春,寿世济人”라는 글을 써서 파커선교사에게 기증하고, 기회만 있으면 파커의 의술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파커선교사는 의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수단 뿐 아니라 정계인사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맺는 매개가 되어서 후에 외교 활동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박제의원은 중국에서 최초로 편도선(1836)을 제거하고, 최초로 결석(结石,1844)을 제거하고, 처음으로 마취제(1847)를 사용하는 등, 의학에 관한 거의 많은 부분에서 신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파커는 특별히 화가에게 부탁하여 모든 수술과정과 의학기계들을 그림으로 남겨놓아 중산대학교 제2병원에 지금까지 귀중한 자료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파커는 중국에서의 의료 활동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그 책을「재화시의외과수술의 경험(在华施行外科手术之经验)」이라고 명명하였다.
파커는 서양의학이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반드시 중국인을 가르쳐야 한다고 실감하여 1836년 파커는 관아두(关亚杜)외에 두 명의 청년을 조수로 채용하였다. 관아두는 책임감이 강하고, 총명하여 파커의 지휘아래 간단한 수술들을 곧잘 해냈다. 이 후부터 박제의원은 중국의 저명의사들을 배출하는 중요한 요람지로 발전하였다. 씨에즈광(谢志光), 천신타오(陈心陶), 조쏘카이(周寿恺), 마오원수(毛文书), 천야오전(陈耀真)등 중국의 유명한 의사나 의학자들이 모두 이 병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다. 특히 국부 손문 선생는 1886년, 20세 때 “이시엔(逸仙)”의 이름으로 1년 동안 이곳에서 공부하여,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이 병원을 “쑨이시엔기념병원(孙逸仙纪念医院)"으로 개명하였다.
중국박의회(中国博医会)
1838년 파커는 브리즈맨(E. C. Bridgman, 裨治文)과 콜리즈(Thomas R. Colledge, 郭雷枢1796-1879) 등과 광저우에「중국박의회(中国博医会, The Medical Missionary Society in China)」를 조직하고, 회장에 콜리즈를 부회장에 파커를 추대 임명하였다. 그것을 성립한 주된 목적은 각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실시하고,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 홍콩, 닝뽀(宁波)와 샤먼(厦门)등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학에 관한 서적들을 출판하며, 장차 우수한 의료진들을 배양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중화의약회(中华医学会)가 성립되기 전까지 중국박의회는 중국에서 서양의 의약지식을 전파하는 책임을 훌륭히 감당하였다. 그리고 1887년에「박의회지(博医会志, China Medical Missionary Journal)」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중국에서 발행된 가장 최초이며 오래된 과학잡지가 되었다.
파커선교사 이후의 많은 선교사들도 역시 의료선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2년 전국의 선교대회에 의료선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의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4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1. 의료선교 중에서 복음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의료선교를 계속 유지하며 발전시킨다. 3. 의료선교와 교회의 다른 사역들을 긴밀하게 유대 발전시킨다. 4. 의료 활동을 통해 중국 기독교 지도자를 배출시킨다.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의학교육의 수준을 높여, 진정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충성된 주의 종들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중국박의회는 중국 근대 의료 활동을 주도하며, 중국 근대 의학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파커선교사가 중국 근대 최초의 병원을 세운 후 중화민국이 성립된 1911년까지 78년 동안 병원 264곳, 진료소 215곳, 의학교 13곳, 남학생 429명, 여학생 12명으로 질과 양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그리고 의학교육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의학교를 더 증설하지 않고 기존 의학교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데 주력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해외에서 중국에 파송되어온 기독교 의사나 간호사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서, 의술은 물론 복음전파에 깊은 관심과 부담을 갖고 있어 중국 동역자들의 좋은 귀감이 되었다.
중국인들의 기독교 병원에 대한 태도도 많이 개선되고 환자수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파커선교사의 일기에 의하면 그가 중국에 와서 22년 동안 의료선교에 종사하면서 53,000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연평균 2,400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하루 평균 6-7명 정도의 환자를 치료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당시에는 중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실적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파커의 의술이 뛰어나고, 서양의학이 중국 전통의학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중국인들이 피부로 느껴서, 점점 기독교 병원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1912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국의 기독교 병원에서 치료한 환자수가 2,122,774명이었고, 입원환자수가 126,788명이 되었다. 전국에 기독교 병원과 진료소가 모두 479곳이어서, 한 병원에서 매년평균 4,446명을 치료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파커 시대에 비해 연평균 환자수가 배로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박의회소속의 의료선교사들은 의학교육 뿐 아니라 서양의학서적 번역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중에 홉슨선교사(B. Hobson, 1816-1873, 合信)의 역할은 대단히 주목 할만 하였다. 그는「전체신론(全体新论)」,「서의략론(西医略论)」,「내과신설(內科新说)」,「부영신설(妇婴新说)」과「중영의학자휘(中英医学字汇)」등을 번역출판하였다. 미국외방전도회 소속의 켈선교사(John Glasgow Kerr, 1824-1901, 嘉约翰)도 이 방면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체질궁원(体质穷源)」,「체용십장(体用十章)」,「할증전서(割症全书)」,「담증신론(炎症新论)」,「과찰신법(裹扎新法)」,「내과전서(內科全书)」,「내과천미(內科阐微)」,「서약략설(西药略释)」,「안과촬요(眼科撮要)」,「부과정온(妇科精蕴)」,「화류지미(花柳指迷)」,「피부신편(皮肤新篇)」,「위생요지(衛生要旨)」와「영한병명표(英汉病名表)」등 10여종의 의학서적을 번역하였다. 그 이외도 많은 의료선교사들이 의학서적을 번역하고 저술하여 중국 근대 의학의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외교관적생애(外交官的生涯)
1840년 중국과 영국이 아편무역이 도화선이 되어 중영전쟁이 폭발하였다. 파커선교사는 그해 7월 5일 뉴욕으로 돌아가 워싱톤, 뉴욕, 보스톤 등의 대도시 교회에서 중국에서의 의료선교에 대해 설명하고 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1841년 3월 29일 웨스터(Miss Harriet Coldy Wester)양과 결혼하고, 이듬해 6월 처와 함께 미국을 떠나 10월 4일 광저우에 돌아와 박제의원의 업무를 재개하였다.
1844년 미국공사 쿠싱(Caleb Cushing)이 광저우에 부임하여 중국과 교섭을 진행할 때, 파커와 브리즈맨은 쿠싱의 비서로 초빙되어, 쿠싱의 대중국과의 교섭에 통역과 조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1844년 7월 3일, 중국과 미국사이에 마침내 망하조약(望厦条约)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쿠싱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1845년, 미국정부는 파커를 미국대리공사로 임명하였다. 1855년, 파커선교사가 병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세 번 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미국정부는 그를 미국공사(American Commissioner and Minister)로 임명하여, 다시 중국에 돌아와 전문 외교관의 신분으로 2년 동안 활약하였다. 이때 그는 미국정부에 영국과 불란서와 연합하여 대만을 점령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미국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57년 2년 동안의 전문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톤에 거주하면서, 미국복음련회(美国福音联会, American Evangelical Ailliance)와 스미스박물관(Smith ? Sonian Instiution)에서 봉사하다가 1888년 1월 10일 84세로 소천하였다.
맺는말
파커선교사는 미국외방전도회 소속으로 중국근대에 최초로 의료 활동을 통해 선교하였던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중국에서 23년 동안 의사로 목사로 그리고 외교관으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며 선교에 종사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중국 근대 의료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고, 의료 활동을 통하여 복음을 중국인들에게 전하는 의료선교의 기초를 건립하고, 또 중국의 의료기술의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그가 중국에서 최초로 설립한 박제의원은 현재 중산대학교 제2병원으로 발전되었지만, 청말 근대 중국의학 발전의 요람지는 물론이고, 국부 손문 선생이 1년 동안 공부하기도 한 혁명의 요람지가 되기도 하였다.
강인규|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