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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거인 삼손의 패배
성경 속 인물로서 우리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면서도 아쉬움과 깊은 탄식을 자아내게 한 삼손, 그는 암울했던 시대, 난공불락처럼 버티어선 블레셋의 세력 앞에서, 이스라엘 동족의 협조 하나 없이 홀로 그러나 너무도 통쾌하게 적을 두려워 떨게 했던 영적거인이었다! 초월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세운바 된 나실인 삼손에게는 인간의 숫자나 능력은 결코 대적이 될 수 없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삼손을 통해 혼미한 사사시대를 비추이는 등대와도 같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의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 그것만이 절망의 시대를 사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살길 이었다. 그 희망의 복음이 나실인 삼손을 통해 나타났고 오직 한 길, 하나님께로만. 복음만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임을 깨닫고 붙잡아야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인 영적 거인을 괴인 삼손으로 만든 것은 대단한 적의 능력이나 지혜가 아니었다.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결박할 수 없었던 신적 능력의 소유자 삼손을 무력케 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마음을 빼앗은 음녀 들릴라였다. 장자의 명분(거룩한 기업)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꾼 에서의 망령은 나실인의 부름을 받았으나 육체의 정욕을 덜미 잡은 창녀에게 전심의 사랑을 바친 삼손에게 역사했다. 눈알이 뽑혀지고 원수 앞에 조롱당하며 다곤 신전에서 재주부리게 된 삼손의 처량한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난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과도 같았다. 완전한 패배이고 절망이었다.
버려진 십자가 복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6: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그의 몸된 교회에게 위임한 권세이다. 사탄에게 속한 이 세상의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당할 수 없는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주셨다. 이 복음을 가진 살아있는 교회를 흔들자는 결코 없었다.
이 복음은 역사상 어떤 권력이나 힘에 굴복 당한 적이 없으며, 정치적 국경의 벽이나 철학이나 사상의 늪에도 화려한 유혹이나 다수의 횡포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환난이나 질고, 가난이나 위험, 투옥이나 죽음도 복음의 생명력을 막을 수가 없었고 또한 사망이나, 생명, 천사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 높음이나 깊음, 그 외의 어떤 피조물도 복음을 막아 설 수 없었다. 이 엄청난 복음을 가졌다고 하는 교회인 우리에게는 이 복음의 영광, 복음의 능력, 복음의 축복이 어디에서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나의 복음은 어떤 것인가? 우리의 탄식 속에 나 하나 변화시킬 수 없는 무기력한 복음, 세속적 가치도 바꿀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복음, 실제가 될 수 없는 이론뿐인 서류보관용 복음, 화려한 세상의 경영이론, 심리학, 오락 앞에 퇴색한 신학교리가 되어버린 낡아빠진 복음 우리의 현실을 따라 급조한 조각난 복음, 죄책감을 떨어내기에 급급한 죄책감 쓰레기 하치장용 복음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결코 그럴 수는 없는데 머리 깎인 삼손처럼 적어도 현실 앞에 서 있는 현재의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 속에 복음은 그렇지 아니한가? 초대교회의 복음은 그토록 역동적이며 실제적인데, 더 많은 이론으로 무장하고, 예리한 방법을 소유한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째서 복음의 권능은 왜 나타나지 않는가? 대적의 강하고 견고함 때문인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인가? 현대의 엄청난 시대적 요구 때문인가?
영적 거인을 괴인으로 추락하게 한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버림이었듯 우리의 화려한 인간적 방법, 사람의 지혜, 현실적 세속의 가치로 바꾸어서 내어버린, 십자가 복음 때문에는 아닐까?
진정한 승리자
이제, 비참한 실패자 삼손의 마지막을 보자! “주 여호와여 구하오니 나를 생각하소서. 내가 블레셋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삿 16:28~30)” 자신이 내어버렸던 ‘부르심’을 되찾고 괴인 삼손의 죽음을 구한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분명 그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주님 안에서 죽음으로 승리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한다. 잡다한 방법 중 하나가 아닌 무엇을 더 확인해야할까? 괴인 삼손의 비참한 결과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를 복음의 본질에서 떠나가게 했던 들릴라 같은 ‘음녀’ 세상에 뿌리를 둔 인간의 지혜, 능력과 함께 나의 병든 자아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받아들이고 종말은 고해야한다. 나의 실패만이 아닌 ‘내가’ 함께 죽어야 한다. 가련한 삼손, 아쉬운 자, 더러운 실패자 삼손이 세상과 함께 죽고(갈6:14) 오직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가 되시는(갈 2:20) 진정한 승리자로 설 것이다. 이 세상이 들어야 하고 우리가 외치고 그 가운데 서야할 복음은 승리의 복음, 곧 십자가 복음뿐이다(고전 1:18~25) 눈물겨운 최선의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이 전부가 된 자, 십자가 복음이 실제가 된 자, 그가 진정한 승리자이다.
김용의 선교사 | 순회선교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