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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8.30  통권 109호  필자 : 정바울  |  조회 : 4756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신장의 네스토리안(경교) 전파와 그 영향

기독교 역사상 드물게 광활한 지역으로 신속하게 전파된 경교의 역사는 복음을 곳곳에 편만케 하기를 염원하는 전도자들의 마음에 호기심과 도전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신속, 광범위하게 전파된 과정과 원동력 그리고 그들의 선교전략들은 경교가 훑어 지나간 종교 문화권별로 교훈 삼을 내용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극하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특별히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권 영역인 신장에서의 경교 역사와 영향을 다루고자 한다. 중국내지의 경교 역사에 대해서는 본지 제 74권에서 강인규 교수가 다룬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신장의 경교를 주로 고찰하려고 한다. 신장에서의 경교 선교는 신장과 중앙아시아 선교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소중한 선교적 통찰력을 갖게 할 것이다. 신장에 경교가 전파 확산된 계기, 그들의 선교전략, 경교도들이 16세기 이후 경교가 소멸된 이유 등과 그것이 현재 이 지역 선교에 주는 교훈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경교의 유래와 특징
경교(景敎)는 네스토리아학파에 속한 기독교의 일파이다. 창립자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서기 380년 수리아 안디옥(Antich)에서 출생하여 48세인 428년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박식한 학문을 겸비하고, 언변이 좋은 기독교인으로 안디옥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당시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알렉산드리아파와 안디옥파로 크게 나뉘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파와 안디옥파는 특별히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해 크게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파는 예수는 출생 때부터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안디옥파를 대표하는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로부터 출생한 예수가 인성만 갖고 있었는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면서 신성과 인성이 우의적으로 결합하였다는 ‘우의결합론(友誼結合論)’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성모화 하여 숭배하는 것을 반대할 뿐 아니라, 성상숭배(聖像崇拜)도 반대하여 예배당 안에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연옥설과 성찬식의 화체설 등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사후 속죄설인 연옥설을 반대하는 대신 조상제사를 허용했으며 화체설을 부정하는 대신 성찬식 때 예수의 실재적 임재설을 주장했다. 

이 같은 신학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은 431년 에베소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네스토리우스의 학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의 주교직를 파면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추종자 17명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페르시아 왕의 보호와 지지를 받으면서 기독교를 발전시켰다. 451년 네스토리우스가 71세의 나이에 사망한 후 경교는 498년 기독교와 정식 분리하여 스스로 ‘앗수르 기독교’라고 자칭하였다. 이들이 이후 당나라 때 중국에 전래되면서 경교라고 불리웠다. 경교란‘광명정대의 종교’라는 뜻이다.

교직자는 8직급인 교무대총관, 총주교, 주교(사제), 승정, 부승정(집사), 조제, 좌제원, 독경사 등으로 구분하였고 사제(주교) 이하의 5직급의 교직자들은 결혼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지역별 차이가 있어 중국 경교의 경우에는 총주교 또한 결혼을 하여 독신주의를 강용하지 않았다. 

매일 동트기 전, 동틀 때, 오전 7-9시 경, 오전 11-오후 1시 경, 한낮 후, 해질 무렵, 저녁 9-11시 경 등 7번 정한 시간에 예배를 하였다. 당시 기독교가 통상 갖던 하루 3 차례의 집회보다 4차례 더 모인 것이다.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 그들의 예배에 대한 특심을 기뻐하셨으리라. 

최고 교직자인 교무대총관은 채식을 주로하며 육식을 금하였다. 경교경전은 주로 수리아 문자가 사용되었고 다른 문자사용도 허용하여 중국내지의 경전은 한자로 번역하여 사용되었다. 중앙아시아 각지의 경전에는 수리아 문자를 비롯하여 소그드문자, 페르시아문자, 고대 위구르 문자인 회골문자 등도 사용되었다.

신장 경교의 전파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경교비(景敎碑)를 참고로 중국내지로의 경교 전파시기를 통상 635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들을 근거로 학자들은 신장에 이미 5-6세기 경 페르시아와 수리아 경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6세기경 경교는 이미 중앙아시아와 전파되는 소그드인과 투르크 민족 가운데 믿는 자들이 있었고 점차 발전하여 714-728년 사이에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싸마르칸트에 대주 교구를 설립할 정도가 되어 신장과 중국내지를 향한 본격적인 선교의 발판이 구축되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은 실크로드의 활발한 무역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무역을 통한 문화 전파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신장과 중국내지에 경교 교리와 문화를 전파한 장본인이 바로 소그드인들이었다. 6세기 중국에 해당하는 고대 문헌에 의하면 경교가 당대 이전에 이미 고창(지금의 투루판) 지역에 유향하고 있었고 소그드어로 번역된 경전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장에 전파된 경교는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아 신속하게 발전하여 주로 민간에 유행하였다. 또한 경교 전파의 주역인 소그드 무역상들의 활동 범위인 실크로드상의 무역 관문도시들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경교도의 구성원으로는 소그드인, 수리아인, 페르시아인 그리고 소수의 현지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불교도와 배화교들 사이에 섞여 카스(喀什), 허티엔(和田), 쿠처(庫車), 샨샨(善), 투루판(吐番) 지역들에 퍼져 살았다. 

그들로 시작된 신장 기독교의 과거 천년의 역사는 신장의 약 1천 년의 불교 역사와 역시 약 1천 년의 이슬람 역사에 묻혀 가려져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위구르족이 경교 전파와 영향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 제국을 이루고 살던 위구르인들은 840년 제국의 붕괴와 함께 크게 3갈래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들 중 투루판과 카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로 유입된 위구르족이 각각 투루판의 고창(高昌) 회골(回骨)과 카스 중심의 카라한 왕조를 건설하였다. 마니교를 국교로 하던 위구르족과 이주 전 이미 신장에 수백 년 전에 들어와 유행하고 있던 경교와의 본격적인 접촉은 9세기 중엽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위구르족인 회골인의 경교와의 접촉은 이미 6세기 중엽부터라고 학자들이 주장한다.

당대 통치자의 지지로 급속히 발전한 내지의 경교는 845년 당무종의 불교 말살정책에 의해 외래 종교로서 함께 철퇴를 맞아 세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반면에 고창의 경교는 여전히 관대한 정책에 힘입어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고 8세기 이슬람 세력에 밀려 중앙아시아로부터 유입된 경교도와 중국내지의 핍박을 피해 모여든 경교도들에 의해 고창(투루판)은 경교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선교중심 기지가 된다. 특별히 중국의 송대(宋代)와 원대(元代)를 거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관대한 종교정책은 곧 타 종교와의 화목한 동거를 의미했다. 고창은 당시에 경교도 뿐만 아니라 불교도, 배화교도(拜火敎徒) 그리고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도들이 혼합되어 살았다. 따라서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경교의 경우 벽화 예술을 통해서 특별히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짐작케 한다.

위구르족 무슬림의 자존심, 마음의 고향이라고 하는 남부의 카스 또한 당시에는 경교의 중심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12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카스는 경교 제 19교구였으며 총주교로부터 주교가 임명 파견되었다. 이 때 카스는 이미 이슬람권이었으나 서요와 원대 몽골의 관대한 종교 정책에 힘입어 선교가 가능했으며 천산이남 대부분의 지역에 전파되었다. 과거 많은 탐험가들이 기록을 통해 카스, 허티엔, 사처(莎車), 쿠처, 투루판, 하미(哈密) 등지에서 모두 경교도들을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특히 마르코폴로는 신장 각지에서 경교도, 불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섞여 사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탐험가들에 의하며 당시 경교도와 무슬림간의 종교 신앙에 대한 변론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경교도가 이슬람의 종교적 습관의 영향을 같이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예배 시에 하체를 정결케 하며 매주 금요일 집회를 가지며 육식을 했다고 한다. 이는 경교 선교 전략상 현지 환경에 맞도록 예배 환경을 조정, 동질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신장의 천산 북부는 남부에 비해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교 대교회당과 주교가 별도로 있기도 했다. 특별히 몽골족과 투르크 유목민 가운데 상당수의 경교도가 생겨남으로써 유목민 안에 경교의 위상이 매우 높았다. 유목민 활동 무대인 이리 지역을 중심으로 원대의 대량의 경교도 묘석과 각석이 출토되어 유목민 가운데 경교의 영향력을 가름하게 한다.

송대까지만 해도 경교의 주 세력이 투루판에 한정되었던 것이 원대에 경교가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남신장 전반에 걸쳐 퍼지게 되었고 경교도 가운데 역사상 영향력 있는 위구르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렇게 왕성했던 경교가 14세기 중엽 이후 신장 전체에서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다. 1349년 새로 제작 되었던 경교 25개 교구 편성표에서 경교 선교의 중심지 중 하나인 제 19교구 카스가 제외되었다. 이는 당시 카스에서 경교가 이미 소멸되었음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경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투루판 또한 14세기 말에 이르러 완전히 이슬람권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신장을 통해서 투루판을 강점하고 거류민에게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신장을 통치하던 몽골 통치자가 이슬람교 확장 정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전쟁을 통해서 투루판을 강점하고 거류민에게 강제로 이슬람으로 개종하도록 했다. 이로써 천산 남부 자락에서 이슬람을 제외한 경교와 기타 종교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북신장에서는 이슬람과 불교가 동시에 유행하면서 경교 또한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이리 지역과 투루판 주변 지역들에서는 여전히 수리아어로 예배를 드리는 소수의 경교도들이 남아 있었다. 19세기 중기에 이르러 제정 러시아가 이리를 점령하여 당시 남아 있던 3-4백 명의 경교도들을 강제로 경교 신앙을 버리거나 동정방교로 개종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하였고 이후에 신장의 경교는 역사에서 사리지게 되었다.

신장 경교의 선교전략 진단
5-6세기에 전파된 신장 경교가 16세기까지 약 천 년 동안 그 명맥을 이어오는 중에 결국 소멸하게 된 것은 외적으로 종교 정치적인 원인이 있었으나 경교 내부의 선교 전략상의 결정적인 함정도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토착화의 실패로 인한 복음 그 자체의 생명력 약화와 상실’로 정리할 수 있다. 몇 가지 세부적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 과도한 타 종교와의 타협
완전히 이슬람화 되기 전까지 신장은 경교, 불교 그리고 이슬람의 공존 시대를 보내었다. 이 때 경교도들은 불교도 뿐 아니라 무슬림과도 통혼을 하였다. 이는 당시 경교가 나름대로 유행하기는 했으나 불교와 이슬람의 세력에 미치지 못하여 타협을 했던 예라 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경교도들이 북쪽을 향하여 예배를 하며 합장한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손바닥 위에 닿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 형식을 그대로 본받은 것이다. 주체성을 지키지 못한 경교는 두 종교의 심각한 영향 하에 놓였고 원대에는 이미 교리와 형식상 경교의 특징을 상실하여 점진적인 변질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정통 기독교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 서역을 여행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소한 종교 형식에서 위구르인 가운데 경교도들을 식별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경교의 불교로부터 받은 심각한 영향은 경전 번역에서도 나타난다. 즉 위구르어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불교도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서 많은 수의 불교 용어들이 경교경전 가운데 사용되었다. 더 나아가 경교도와 불교도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불경을 번역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시안에서 발견된 경교비문의 저자 경쟁(景爭)은 바로 불교 승려와 공동으로 불경의 하나인 [육바라밀경]을 번역하였다.

영국인 탐험가 스타인은 보살을 숭배하는 경교도로 간주된 인물 화상을 발견했다. 이것이 경교도의 인물 화상으로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십자가 무늬를 가진 머리에 쓴 관과 가슴에 있는 십자무늬 때문이었다. 당시 십자무늬를 사용한 종교는 경교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초상화를 불교의 보살을 빌려 표현한 것이다. 경교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근거들이다.

진리로서의 독보적인 구별됨을 부각시키기보다는 기존 종교 세력과의 유사점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노력으로 보인다. 과도한 형식상의 모방을 통한 토착화가 오히려 사수해야 할 진리를 퇴색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슬람권 선교에서도 무슬림에 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형식의 상황화에 관해 선교사들 간의 견해차가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기존의 무슬림 공동체에서 확연히 구별되지 않도록 형식상 여전히 무슬림의 형식을 유지시키자는 의견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리라고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그룹이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부분이다. 진리는 예식을 낳고 예식을 통해서 진리를 투영하게 마련이라면 토착화 과정의 형식적 과도한 개방은 심각한 후유증을 동반할 수 있다. 우리는 한 세대만을 구가하는 목전의 양적 결실만 보는 근시안이 아니라 믿음의 대를 유지할 실제적인 생명력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성경적 토착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지속적인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 통치권 의존적 선교
경교의 신속한 발전에는 정치권의 지지가 배후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 주듯 이러한 구조속의 경교는 역으로 정치적 환경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왔다. 정치권의 운명이 경교의 운명과 결탁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도 오늘날 우리들에게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전하는 것이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본질을 지키는 것은 비록 속도감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제한된 시대의 유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그 생명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디지만 뿌리 깊은 신앙의 나무를 심어야 할 것이다.

- 현지인 지도자 양성 부재와 선교사 의존적 선교
중국내지의 경우 경교비문이나 그 밖의 자료들 속에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은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현지인 경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경교는 당에서 200여년  동안 활동하면서 현지 지도자들을 양성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외래 종교가 현지인들의 참여 없이 외국 선교사 의존적 체제로 운영될 때 그 발전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위구르족 경교의 경우는 경교도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자들이 적지 않게 배출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인 분야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선교사가 주동적으로 훈련하여 배출한 종교적 지도자들이었는지는 불투명하다. 선교사 의존적 선교는 결국 당시 실크로드의 변화무쌍한 정변으로 인해 지속적인 선교사 파송이 어려워지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선교사 파송의 난관이 곧 경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이다.

맺는말
신장에서의 경교 역사를 얕은 지식으로나마 살펴보면서 오늘날 신장의 기독교 선교 방향을 황무지 개척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이미 있던 지역교회의 재건과 부흥으로 잡아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는가에 따라서 선교전략은 물론 선교사 개인의 시대적 부르심의 정체성 확립과 불가분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대 신장 선교의 부르심은 추수보다는 씨 뿌림에 있다고 본다. 주님의 때에 부흥의 역사를 예비하는 복음의 파종자로서의 부르심이 오늘날 우리들의 주 사명이라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혀 추수의 역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류를 말하는 것이고 시대적 부르심이 그렇다는 것이다. 비록 경교의 선교가 있었으나 위에서 살펴 본대로 소멸된 지 오래이다. 근대 스웨덴 선교회의 비교적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선교가 있었으나 이도 1938년 모든 선교사가 추방되기까지 당시 위구르족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모두가 감옥에서 순교 당했다. 

이렇게 신장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그 명맥이 지속성을 갖추지 못한 고난의 역사였다. 과거 선교 역사의 영향력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늘날 새롭게 부름 받은 사역자들은 온갖 지혜와 믿음의 인내 그리고 교리적 전도보다는 그들의 생사고락을 송두리째 부둥켜안기 위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을 구하며 대대적인 추수의 그 날을 예비하고 대망하기 위해 씨 뿌림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지속적으로 시대적 부르심을 겸손히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주님을 시험한 것처럼 선교사 개인의 영웅적 역량을 보여 달라고 유혹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사역자가 시대적 부르심의 정체성으로 무장되지 않는다면 부르심에 충실하기보다 패배주의에 시달려 현지와 현지인에 대한 애착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결국 집중되고 열정적인 마음이 아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산만한 심령이 될 것이다. 근대 선교에서 이미 위구르족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이 땅 가운데 부흥의 역사를 예비하는 자로 부르심에 감사와 더불어 시대적 부르심에 충성된 일꾼이 되어 이 땅에 진리의 터를 바로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바울|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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