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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30  통권 108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5241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중국 근대 출판사업의 태두(泰斗) 메더스트(麦都思)


지난 호에 우리는 남양선교 선구자 밀렌(William Milne, 1785-1822, 米憐)목사에 대해 살펴보았다. 모리슨에 이어 근대 중국기독교의 두 번째 선교사인 밀렌은 비록 중국 본토에서 거주할 수 없어 남양지역에서만 활동했지만, 명실공히 남양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다. 밀렌에 이어 중국에 온 런던선교회 소속인 메더스트(Rev . Walter Henry Medhurst, 麦都思, 1796-1857)선교사는 출판사업을 전문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14세에 인쇄소에 들어가 인쇄기술을 배운 전문 인쇄공으로 중국에 파송되어 밀렌을 도와 출판사역에 참여하였다. 아편전쟁으로 광저우(廣州), 닝뽀(寧波), 샤먼(厦門), 푸저우(福州)와 상하이(上海)등 5개 항구가 개방되자 상하이에 제일 처음 상륙하여 묵해서관(墨海書館)을 설립하였다. 묵해서관은 근대 중국 본토에 세운 최초의 인쇄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당시 가장 중요한 출판 인쇄소가 되었다.

메더스트의 남양선교
메더스트는 1796년 런던에서 출생하여 성바울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14세때 그로우세스터(Gloucester)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인쇄소에 들어가 인쇄공 우드(Wood)의 조수가 되어 인쇄기술을 배우면서 그의 출판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런던선교회는 밀렌을 마육갑(馬六甲)에 파송하여 중국 최초의 근대식학교인 영화서원(英華書院, Anglo Chinese College)을 세워 화교 자녀들을 교육하고 학교 안에 근대식 인쇄소를 세우고, 중문성경과 종교서적들을 발행하는 중국선교의 전초기지를 구축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위해 런던선교회는 밀렌을 도와 마육갑에서 출판 인쇄에 종사할 출판전문인을 파송하고자 물색하던 중에, 이 소식을 접한 메더스트는 선교회에 자원하였고, 선교회는 이를 기꺼이 받아드려 그를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1816년 메더스트가 20세가 되는 해에, 런던선교회의 출판을 담당하는 출판전문인 선교사가 되었다. 1816년 9월 영국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10일 인도에 도착하여, 몇 개월 머무는 동안 인도의 관리 브라운(Browne)씨의 딸 마틴(Elizabeth Martin) 여사와 결혼하고, 그 이듬해 6월 12일 메더스트는 결혼한 처와 함께 마육갑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중국어를 배웠고, 중문 인쇄술을 연마하여 밀렌 선교사의 중요한 선교 동역자가 되었다. 밀렌은 그에게 중국어 중에서 복건어(福建語)를 배우도록 권고하였다. 왜냐하면 마육갑의 중국인들은 대부분 복건인들이 많아 복건어는 마육갑의 중요한 언어였기 때문이다. 메더스트는 복건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의 중국선교는 복건인들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1819년 4월 27일, 목사안수를 받은 메더스트는, 1820년, 페낭(penang)으로 파견되어 학교를 세워 독립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다시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인도네시아 수도 쟈카르타)로 파송되어 인도네시아 선교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부터 바타비아는 항하외방선교(恒河外邦宣敎)의 중요한 선교기지가 되었다. 그는 바타비아에 학교를 세우고, 또 인쇄소를 설립하여 출판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842년 중국이 개방되기까지 이 인쇄소는 마육갑과 싱가포르의 인쇄소와 더불어 남양지역의 3대 출판기지의 하나로 성장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822년 밀렌이 과로로 소천하면서 마육갑의 출판사역이 점점 쇠퇴하자 바타비아의 출판사업은 당시 남양지역의 출판 선교기지로 막대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19년 그는《지리편동약전(地理便童略傳)》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중문 출판물이 되었다. 메더스트는 선교지를 바타비아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출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823년에 그는 바타비아성에서「상덕자(尚德者)」의 필명으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위해《삼자경(三字經)》을 출판하였다. 이 전도 소책자는 수 십년 동안 성행하다가 1851년 닝뽀의 미화서관(美華書館)에서 재출판하였다. 1823년부터 1842년까지 그가 바타비아에서 출판한 중국어 서적은 무려 30종에 달하였다. 메더스트는 출판 전문인이었고, 또 각종 선전품을 출판하는데 매우 능숙했다. 그가 20여 년간 남양선교를 하면서 단독으로 출판한 중문서적이 30여종에 달하였는데, 그 중에 비교적 중요한 것은《예수속죄지론(耶穌贖罪 之論)》,《복음조합(福音調合)》,《양심신시(養心神詩)》등의 종교 선전품과《지리편동략전(地理便童略傳)》,《동서사기화합(東西史記和合)》등의 지식성이 농후한 도서들을 출판하여 근대 지리지식과 역사지식을 중국에 소개하여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넓히고자 노력하였다.

그 외에도 1837년 메더스트는 마카오에서「복건방언자전(福建方言字典, A Dictionary of the Hok-keen Dialect of the Chinese Language)」을 출판하였다. 이 자전은 860페이지에 12,000자를 수록하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알파벳을 이용하여 복건어를 표기한 최초의 자전이었고, 복건선교의 기초 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그의 출판물은 비록 지식을 소개하는 도서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순수한 종교도서들이 대부분이어서 그의 출판인쇄 사역의 목적이 복음 전파에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었다.

메더스트와 묵해서관(墨海書館, London Missionary Press)
1843년 12월말, 메더스트는 동료선교사 록하트(Dr. William Lockhart, 雒魏林)와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여 선교기지를 구축하고, 바타비아의 인쇄소를 상하이로 옮겨와 묵해서관을 설립하였다. 이 묵해서관은 중국에서 최초의 현대식 인쇄기술로 세워진 인쇄소였다. 메더스트는 중국어가 유창하고, 인쇄 경험이 풍부하여, 묵해서관이 설립하자마자 곧 바로 출판활동을 전개하여, 1844년 1년에 4,000권을 발행하였다. 출판물은 대부분 설교문과 기독교 서적들이었다. 그들은 집회시에 청중들에게 설교문을 배포하고, 그 내용대로 설교하여, 청중들이 눈으로 읽고, 귀로 듣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청중들이 집중하여 설교를 들어서 질서유지에도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방어, 상하이어와 복건어 등 복잡한 언어를 극복하는데도 도움이 되어 일거다득의 효과를 얻었다. 그들이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그들의 처소에서 예배를 들였는데,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도들이 증가하여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메더스트는 산동로(山東路) 부근에 토지를 구입하여 런던선교회의 상하이 선교중심을 설립하였다. 사람들은 이 지역을“맥가권(麥家圈)”이라 불렀다. 메더스트는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1846년에 묵해서관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묵해서관이 설립하면서부터 1846년까지 처음 3년동안은 메더스트 단독으로 출판사업을 추진하였지만, 1846년부터 선교 진용이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동역자들은 밀렌의 아들 찰스밀렌(W. C. Milne, 美魏茶), 뮤헤드(W.Muirhead, 慕維廉),사우드웰(B. Southwell, 撒得爾), 위리에(A. Wylie, 偉烈亞力), 스토나크(J. Stronach, 施敦力約翰), 에드킨스(J. Edkins, 艾約瑟) 등의 타 선교회 파송선교사들이 대거 묵해서관 출판사역에 참여하였다. 이들 외국선교사들 이외에도 왕도(王韜), 이선란(李善蘭), 관사복(管嗣復)과 장복희(張福僖) 등의 다수의 중국인들이 묵해서관의 출판사업에 참여하여 출판물의 내용과 질을 높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중에 왕도와 그의 부친 왕창계(王昌桂)는 부자가 함께 묵해서관의 출판사업에 참석하였다. 왕도는 1849년부터 묵해서관에서 선교사들을 도와 출판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수재(秀才)의 신분이어서 중문실력이 빼어나고 우아하여 위판본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와 기독교 교리책들을 출판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13년동안 선교사들을 도와 묵해서관에서 출판사역에 참석하면서 기독교를 접하여, 1854년 8월 24일 다른 3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선란은 근대 중국의 수학가였다. 그는 위리에를 도와 「속기하원본(續幾何原本)」, 「담천(談天)」, 「대수(代數)」, 「미적(微積)」, 「중학(重學)」과 「식물학(植物學)」 등을 번역하였다. 그는 근대중국의 저명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후에 국립학교 동문관(同文館)의 수학 총교습(總敎習)을 지냈다. 

묵해서관이 설립되었을때는 바타비아에서 사용하던 소형 인쇄기로 인쇄를 했지만, 1847년, 대영 성서공회에서 성경출판을 촉진하기위해 묵해서관에 현대식 대형 인쇄기 1대를 기증하였다. 이 현대식 인쇄기는 규모가 크고, 또 동력엔진(Power Engine)을 사용하여 인쇄효과가 뛰어났다. 이처럼 묵해서관은 중국에서 최초로 서양식 중문 연인(鉛印) 활자를 구비한 현대식 출판 인쇄소가 되었다. 그러나 1860년에 이르러 묵해서관의 역할이 점점 빈약하여 출판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주요한 이유는 최신 인쇄기술을 도입한 미국장로회 소속의 감블(William Gamble, 姜別利)선교사가 녕파에 미화서관을 설립하여 묵해서관의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고, 또 1860년에 이르러 묵해서관의 출판팀이 거의 해체된 상태였다. 묵해서관의 영혼인물인 메더스트는 1857년 1월 23일 40년의 중국선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 그 이튿날 소천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선교사들도 영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선교지로 옮겨 상하이의 선교활동이 대폭 축소되었다. 

1843년에서 1860년까지 중국에서 서방선교사들이 출판한 출판물이 무려 434종에 달하였다. 그중에 묵해서관에서 발행한 출판물이 171종에 달하여 전체의 39.4%에 달하였다. 그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묵해서관의 발행량은 다른 어느 출판사를 훨씬 능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발행된 과학 등 지식서적은 전체의 434종에서 106종에 달하였는데, 전체서적의 24.4%에 달하였다. 그러나 묵해서관의 종교서적과 일반 지식서적의 비율은 80.7%와 19.3%으로 일반 지식서적의 비율이 다른 출판사에 비해 낮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묵해서관의 출판업무는 복음전파가 최우선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겠다. 

묵해서관에서 발행된 대표적인 종교서적은「성교요리(聖敎要理)」,「야소교약(耶穌教 略)」,「야소강세전(耶穌降世傳)」,「천제종지론(天帝宗旨論)」,「장원양우론(張遠兩友論)」,「효사천부론(孝事天父論)」,「석교정류(釋教正謬)」,「찬주시가(讚主詩歌)」,「교회성가(教會聖歌)」등으로 설교집, 교리서, 전도책자와 찬송가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러한 종교서적 이외에도 「아편속개칠계문(鴉片速改七戒文)」을 수정 출판하여, 당시 아편문제가 심각한 사회현상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서양과학 지식을 소개한 책들 중에 대표적인 것은「수학계몽(數學啟蒙)」,「속기하원본(續幾何原本)」,「대수학(代數學)」,「대미적십급(代微積拾級)」,「지리전지(地理全志)」,「대영국지(大英國志)」,「식물학(植物學)」등이 유명했다. 의학서적도 빼놓을 수 없는 출판물이 되었다. 홉손(合信,Benjamin Hobson, 1816-1873)이 번역한「서의약론(西醫略論)」,「부영신설(婦嬰新說)과「내과신지(內科新志)」등이 있었다. 비록 묵해서관의 설립목적이 복음전파에 있었지만, 중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서구 과학지식들을 소개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메더스트는 중국 근대 신문사업의 태두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가 평생 동안 발행한 신문은 다음과 같다. 1823년에서 1826년까지 바타비아에서「특선촬요(特選撮要)」를 창간하였다. 1853년에는 홍콩에서「하이관진(遐邇貫珍)」을 발행하였다. 1857년 1월에 상하이에서「육합총담(六合叢談, Shanghae Serial)」을 창간하였다. 이는 월간잡지로, 비록 이듬해 2월에 정간이 되었지만 과학, 문학, 신문과 종교 등 매우 다양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었다.  

메더스트와 위판역본(委辦譯本 혹은 대표역본(代表譯本), Delegates Version)
1843년 중영난징조약(中英南京條約)이 체결되면서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광저우, 닝뽀, 샤먼, 푸저우와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개방되면서 중국선교역사에 새로운 국면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국면에 봉착한 서방선교사들은 성경번역의 시급함을 절감하였다. 1843년 8월 22일에서 9월 4일까지, 메더스트는 몇몇 선교단체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홍콩에서 회의를 개최하고,「위판역본위원회(委辦譯本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그 중요한 위원은 메더스트를 비롯해 로우리에(Walter Macon Lowrie,盧維, 1819-1847), 부네(William Jones Boone, 文惠廉, 1811-1864), 스토나크(John Stronach, 施敦力, 1810-1888), 브리즈(Elijah Coleman Bridge, 裨治文, 1801-1861), 쿨버손(Michael Simpson Culbertson, 克陛存, 1819-1862), 리그 (James Legge, 理雅各, 1814-1897)와 밀렌의 아들 찰스밀렌 등 12명으로 구성되었다. 

메더스트는 이 위원회를 조직하고 성경번역 사업을 주도하여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물론 위판역본이 출판되기 전에 모리슨이 1823년 마육갑에서 《신천성서(神天聖書)》라고 이름한 중문성경을 번역하였었다. 이 성경은 처음으로 완정된 기독교 교리를 중국에 소개한 책이어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았다. 1827년 모리슨에 이어 구츨라프(郭實臘)는 모리슨 성경을 재 수정하여 출판하였는데, 구약을《구약견조성서(舊譴詔聖書)》, 신약을《구세주예수신견조성서(救世主耶穌新譴詔聖書)》로 이름하여 출판하였다. 이 두 성경은 당시 중국이 금교(禁敎)상태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공개적으로 선교할 수 없는 상태여서, 주로 남양지역과 마카오와 광저우 일대에 부분적으로 전파되었을 뿐이었다. 또 이 두 성경은 외국선교사 단독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중국어 능력이 한계가 있어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정확하고 유창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흠이 있었다. 이러한 흠이 기독교가 중국지식인들에게 전파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메더스트는 26년동안 남양에서 선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중국어성경의 번역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절감하고, 중국 내륙선교가 개방되기 훨씬 전부터 기독교가 중국에 널리 전파되도록 읽기 쉬운 중국어성경을 번역하기위한 계획을 추진하여 왔다. 마침 상하이 선교사역이 점점 안정되면서 이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성경번역이 진행하는 중에 불행히도 위원들 사이에 전문용어 번역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쟁론이 계속되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첫째, 우주만물의 주재이신 “God”을「신(神)」, 혹은「상제(上帝)」로 번역할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둘째, 침례회는 다른 선교사 단체들이 “Baptism”에 대한 번역에 불만을 품고, 이에 의의를 제기하였다. 천주교는 일찍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16세기 중국에 래화한 예수회 선교사들은《사기봉선서(史記封禪書)》의 기록에 의해「천주(天主)」로 결정하고, 1704년 교황 클레멘트11세에 의해 정식 인가하여 확정하였다. 그러나 신교에서는 이를 받아드리지 않고,「신(神)」으로 할지, 혹은「상제(上帝)」로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1920년까지 이에 대한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1920년대까지 대부분 신교단체들은「상제(上帝)」를 채택하여 사용했다. 

이러한 쟁론이 계속되면서 침례회 대표가 먼저 번역위원회에서 탈퇴하고, 이어서 공리회 대표도 탈퇴하였다. 1847년 메더스트는 그를 중심으로 5인 번역위원회를 재조직하고 성경번역을 계속 추진하였다. 그들은 미국 성공회 소속의 부네, 밀렌의 아들 찰스밀렌, 스톤나크, 로우리에 등이었는데 모두 상하이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1847년 6월부터 매일 저녁 메더스트의 처소에서 성경을 번역하였다. 비록 메더스트와 다른 선교사들은 중문을 모두 이해하고, 중국어 회화도 상당한 실력에 이르렀지만 번역한 내용은 아무래도 외국인 냄새가 나고 서툴기만 했다. 이러한 내용의 종교서적은 중국민중과 특히 지식인들의 반감을 쉽게 불러 일으켜 복음의 효과를 나타내기는 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메더스트는 왕도 등 중국인 조교들을 채용하여 그들의 조예 깊은 중문실력으로 선교사들이 번역한 문장을 다시 윤색(潤色)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번역한 성경내용은 문장이 유창하고, 문학적 색채가 비교적 강한 특색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6년에 걸쳐 성경번역을 완성하여 1850년 신약전서를 완성하고 1852년에 출판하였다.

1853년에는 구약전서를 완성하고 그 이듬해 구약전서를 출판하게 되었다. 그들이 번역한 성경을「위판역본」, 혹은「대표역본」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 번역본은“God”을“상제”로 번역하고, 문필이 이전 것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 큰 특색이었다. 특히 신약전서는 대영 성서공회에서 모범 번역본으로 추대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1859년까지 이 번역본은 무려 10차례나 출판했으니, 민중의 호응도를 익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이토록 이 번역본은 1920년대까지 중국 전역에 널리 전파되어, 청말에 중국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성경이 되었다. 메더스트는 이 성경번역 사역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였고, 또 번역 조직팀을 인도하여 왔기 때문에 이 위판역본의 작품은 대부분 메더스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번역본은 전체적인 문장의 표현에 너무 관심을 갖다보니 자연히 원문의 정확한 의의를 소홀히 하고, 또 많은 명사(名辭)들이 중국 철학상의 방법으로 다루어져, 기독교 교의의 견해를 소홀히 한 오류도 없지 않아 있었다. 

결론
메더스트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1817년 6월 12일에 마육갑에 도착하여, 1857년 1월 23일 영국에 도착하기까지 꼭 40년 동안 남양지역과 중국에서 출판선교를 전문으로 활동한 출판전문인 선교사였다. 그가 활동한 선교지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처음에는 1817년에서 1843년까지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에서 활동하였고, 아편전쟁으로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1843년에 그 선교지를 상하이로 옮겨 상하이 선교를 개척하고 묵해서원을 세워 중국선교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는 출판전문인 선교사로 40년 동안 출판한 책이 중문이 59권에 달하고, 말레이어 7권, 영어 28권에 달하였으니 명실상부한 출판 전문인 선교사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선교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는 박식하고 해박한 학문지식과 풍부한 언어 능력으로 중국선교가 시작되는 개척시기에 중국선교의 기초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57년 1월 23일, 그는 40년의 중국선교를 마무리하고 영국에 도착한 그 이튿날 소천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중국을 떠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강인규 ∣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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