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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6.30  통권 108호  필자 : 정바울  |  조회 : 3685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신장의 기독교 선교 역사

언제나 선배들의 사역 경험은 후배들에게 무더위의 시원한 청량음료와 같다. 그들의 역사를 접하면서 함께 고통과 애환 그리고 환희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이 땅에도 그러한 역사가 남아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여겨진다. 신장의 기독교 선교 역사는 크게 고대, 근대 그리고 현대로 나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고대와 근대를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고대(7세기~14세기)
신장에서의 최초 기독교 선교는 네스토리안(景敎)으로 대표된다. 네스토리안은 당시 기독교 공의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교파로서 신장에서는 비교적 긴 세월 전성기를 누린 후 소멸 되어 지금은 그 유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남겨진 문서들을 통해서 당시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신장에서의 네스토리안의 영향력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세계 이슬람권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가 깊이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를 고려할 때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연구 과제이다.

네스토리안은 7세기인 635년 실크로드를 통해서 신장에 전파되어 소멸되기 전까지 그 영향력이 지대했는데 중국 내지의 경우 무종(武宗)의 탄압으로 9세기 중엽 쇠퇴해 갔지만 신장에서는 14세기까지 곳곳에 네스토리안 교회가 성행했다고 한다. 13세기 마르코폴로가 신장을 거처 여행 하면서 기록한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신장 곳곳에 교회가 여전히 유행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환경과 비교 하면 꿈같은 이야기이다. 지금은 공개된 교회로 참된 종교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주님의 때에 교회의 영광이 이 땅에서 재현될 것이다.

 

근대(1892년~1939년)

 
종교, 사상적 배경
20세기 초 신장 위구르족 사이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종교는 샤머니즘적 요소가 강한 민속 이슬람이었고 가장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상으로는 ‘범 이슬람주의’와 ‘범 투르크주의’ 등의 팽창주의였다. 이 사상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금도 중국으로부터의 민족 독립에 대한 갈망으로 남아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다.

 

사회적 배경
당시 계속 되는 전쟁과 도적 행위로 사회불안이 조성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이러한 재난들이 무슬림에게는 모두 귀신이 수시로 둔갑해서 일으키는 일들로 이해됐고 축귀만이 해결의 방법이라고 이해했다. 그들의 이러한 이해는 또한 마자(성인 묘) 숭배 신앙으로 발전하여 지금도 그 영향력이 깊이 남아 있다.

 

정치적 배경
고대 이후 단절되었던 기독교 선교가 신장에서 재개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은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유럽 열강들 특히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들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어진 중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힘입어 가능했다. 그로인한 현지인과 외국인 사이의 민감한 대립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오늘날도 유사하다. 근대 신장의 선교 환경도 당시 서양 사역자들에게는 지금과 비교해도 더 나을 것이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당시 그들의 헌신과 노고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든다.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의 사역을 살펴보자.

 

◎ 천주교

대표되는 선교 단체


벨기에 성모성심회(圣母圣心会)

- 1878년부터 1922년까지 신장의 한족 그리스도인 교구를 관할했다.

독일의 성언회(圣言会)

- 벨기에의 선교 단체를 이어 후임으로 1922년부터 신장 교구를 관할했다.

 

주요 선교 대상
당시 신장 천주교 사역자의 주요 선교 대상은 북부 신장의 한족이었다.

 

◎ 개신교

 특징

-당시 두 대표적 서구 선교 단체 간의 북부와 남부로 구분되는 지역 분할, 북부의 한족   및 카작족 중심 사역과 남부의 위구르족 중심 사역의 전략적 민족 분할 사역이 이루어졌    다. 한국에서의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지역 분할 정책과 유사하다.
-서구 선교사에 의해 주도된 선교였다.
-신장 사역의 동기는 이미 진행하고 있던 중국 사역의 연장선상에서의 개척을 위한 재배치 내지는 국경을 초월하는 네트워크 사역 구축을 위한 전략적인 개척 사역이었다. 그들의 전 략적 현지 접근이 인상적이다. 이것이 후에 장기적이고 인내심을 갖춘 광범위한 투자와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오늘날 범하기 쉬운 유행에 따르는 단발적이고 전략부재의 접근과는 거리가 있다.

 

선교 단체 

중국 내지 선교회(CIM)

1906년부터 1939년까지 27년간 사역 했다. 27년 동안 모두 13명의 장‧단기 사역자가 거쳐 갔다. 주 사역 범위는 북부 신장 지역이었다. 그들은 주로 7종 문자 즉 한족, 만주족, 장족, 위구르족, 카작족, 키르키즈족 등의 문자로 된 전도 책자와 성경들을 가지고 순회하며 판매 전도를 수행했다고 한다. 1933년 청나라 정부 휘하의 무슬림 군대가 우루무치를 공격했을 때 적십자 활동에 동참하여 환자를 치료하던 중 두 명의 선교사가 순교하여 현지에 묻히게 되었는데 지금은 애초의 안장지에서 우루무치 근교의 동산 공동묘지(东山公墓)에 이장되었다. 그들의 헌신을 기념하기 위해 매 년 청명절 전후로 우루무치 현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잠든 곳을 찾아와 사랑과 헌신을 기념하며 존경을 표하고 있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현지에 묻히며 후에 믿음의 후손들에게 길이 기억되는 일은 사역자에게 금 같은 면류관이리라.

 

스웨덴 선교회
1892년 답사를 위해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894년 7월 1차 선발대가 카스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됐다. 이들은 스웨덴 기독교 공회 파송단체 소속이며 루터파에 속한 단체이다. 다국적 사역자들로 구성된 내지회와 달리 그들은 단일 국적으로 구성된 선교단체였다. 그들은 사역 가운데 팀 결속력이 집중되는 강점을 누렸다.

 

본회의 신장 사역 동기
당시 본 선교 단체의 주 사역지는 러시아의 Caucasus와 중국의 허베이성(河北省)이었다. 차후에 두 지역에 각각 한 곳씩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두 지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카스에 베이스를 두어 신장 사역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사역은 1892년부터 1938년까지 46년간 계속되었다.

 

주 사역 지역 범위
사역 중심 지역은 카스(喀什), 사처(沙車), 잉지사(英吉沙) 등 남신장의 3 지역 캠프였다. 카스에 1차 캠프를 설립한 후 사역 범위를 점차 동쪽 허티엔(和田) 방향으로 확장해 나갔다. 신장에 이슬람이 도입 확장되어 나간 경로를 추적하여 캠프를 쳤던 것이다. 역시 그들의 전략적인 포석을 엿볼 수 있다. 이슬람이 깔아 놓은 우상의 돌다리를 걷어내며 전진하는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남긴 사역을 이어받은 영광을 누리고 있다.

 

카스 중심의 캠프 규모
1938년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병원 2곳, 예배당 1곳, 인쇄소 1곳, 공동체 구내 숙사 2곳, 옥외의 선교사 숙사 2곳, 부속 병원 1곳, 부설 인쇄소 1곳, 정원 2곳, 내부 학교 2곳, 직원 숙사, 다수의 창고, 작은 화원 2곳 등이 있었다. 캠프마다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웠으며 수러(疏勒)현(县)의 경우는 1897년 교회당을, 1908년 2월 1일 영통귀(榮通貴) 등 복음학당을 건립하였고 한자 교사로 유보(兪宝)가 있었다. 100여 명의 학생이 3개 반으로 편성된 미션 스쿨이었다. 그 중 2개 반은 남학생 반이었다. 교사진으로 4명의 스웨덴 선교사, 위구르족 교사 3명, 한족 교사가 1명 있었다. 학제는 초등에서 고등 과정까지로 평상시는 수업을 하고 주일에는 성경을 읽게 했다. 시설 규모는 2층 건물이 1곳, 예배당 1곳, 학교 2곳, 약국 1곳, 직원 숙사, 창고, 화원 1곳을 갖추고 있었다. 구만리를 멀다 않고 찾아와 그들이 펼쳤던 천국 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들의 민족을 초월한 아름다운 협력을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셨을 것이다.

 

사역의 열매

- 성경 번역

당시 사회가 매우 혼란한 시기였고 선교사는 언제라도 추방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선교회는 선교사가 떠나고 설교자가 없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스스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중심인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이 시작되었다. 1939년 추방되기 전에 신‧구약 성경 중 일부를 번역, 카스에서 인쇄 출판했고 나머지 부분은 추방되어 인도로 철수한 후 히브리어, 헬라어, 아랍어, 투르크어에 능통했던 선교사 알버트(Ahlbert), 허만슨(Hermanson) 등 두 사람이 번역을 마치게 되었다. 사역 54년 만인 1946년 마침내 위구르어로 된 신‧구약 성경 전체 번역을 완수, 영국 성서 공회의 공인을 받아 1950년에 출판되었다. 아쉬운 것은 당시의 위구르 문자와 지금의 문자가 달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위구르어 성경은 구약의 창세기, 출애굽기와 신약 전체가 번역 출판되어 사용되고 있다.

 

-교회 개척
사역을 시작한지 15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4명의 위구르 무슬림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20년만인 1912년 3곳의 도시에 13-14명의 성도가 생겨났고 3명의 위구르인 사역자들이 세워졌다. 선교 초창기부터 현지인 지도자 중심의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30년만인 1922년 39명의 위구르 신자가 생겼다. 이듬해인 1923년 59명의 신자 외에 다른 50명의 신자가 제자 훈련을 받고 세례 받을 준비를 하던 중 무슬림들의 박해로 무산됐다. 사역 36년만인 1928년부터 32년까지 세례 신자가 135명에 달했다고 한다. 1933년 4월 사처에서 박해가 시작되면서 몇 사람이 순교를 당했고, 1939년 사처 지역에 어린이 500명과 어른 200명 그리고 30명의 스웨덴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중국 무슬림 군대가 지역을 장악하면서 반기독교 정책으로 인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체포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당했다. 당시 체포된 그리스도인은 대부분이 순교 당했다고 한다. 수확이 더딘 것 같은 이 땅에도 교회의 씨앗인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사역의 특징
사회 구원의 간접 복음 전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이었다. 기독교가 서양의 중국 침략의 앞잡이 내지는 중국에 대한 문화 침략이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시각을 바꾸기 위해서 사회 속에서 공헌을 하고 좋은 이미지를 주기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했다. 직접적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폭넓은 문화 사역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그들은 복음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평소에는 현지인들처럼 각기 받은 은사대로 일을 하면서 살았다. 오늘날의 전문인 사역과 같은 형태이다.

 

강점
본부의 주도적인 리더십 아래 개인의 기능과 소명의 엄격한 점검으로 구성원을 파송하였고 현장에서의 화목한 협력을 바탕으로 전체 구성원 각자의 역할과 책임이 강조된 형태였다. 각자의 전문성과 분명한 소명을 바탕으로 한 책임감이 돋보인 사역이었다.

 

현지인에 대한 영향력
현지인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면서 장기적이며 깊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별히 그들의 현지인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이 큰 영향력을 끼쳤다. 위구르족 가운데 선교사간의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와 화목함에 감동받아 주께 돌아온 영혼도 있었다고 한다. 스웨덴 선교회가 삶의 나눔을 통한 사역을 강조한 것은 위구르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관심은 “무엇을 믿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 임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통찰력은 적중했다. 게다가 현지인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을 통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이들의 전도로 회심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말의 복음’ 보다 삶으로 보여 주는 ‘행위의 복음’ 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맺는말
신장의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서 선배들의 사역과 충성된 헌신 그리고 열정적인 사랑에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지금의 사역이 개척이라고는 하나 전혀 황무지를 개척함도 아님을 깨달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릴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개척이라는 말보다는 묵은 땅을 기경하고 이 땅에서의 과거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고 재건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역사적 부르심을 깨닫게 된다. 신장의 기독교 선교 역사를 통해서 낯설어 보이던 험한 길에 먼저 그 길을 갔던 귀한 분들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우리들이 그 역사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이 남겨 놓은 거룩한 짐과 고난을 의연하게 지고 갈 온유하면서도 강력한 영성을 갈망한다.








 

정바울 | 중국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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