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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8  통권 106호  필자 : 유관지  |  조회 : 4292   프린트   이메일 
[특집] - 특집/ 베이징올림픽과 중국선교
세계는 베이징으로 복음은 세계로

 
베이징올림픽이 다섯 달 앞으로 다가왔다. 안타까운 것은 베이징올림픽과 선교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 “베이징올림픽과 선교”라고 입력해 놓고 검색해 보아도 신통한 내용은 없다.”기독교관련 신문이나 교계지들을 정밀하게 훑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쯤은 최소한 베이징올림픽선교협의회 같은 기구가 조직되고 준비기도회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을주께로」의 이 특집이 계기가 되어 베이징올림픽 선교 준비가 구체화되기를 희망한다.

베이징올림픽은 세계 선교의 기회이다
2008올림픽이 중국에서 열리기 때문에 베이징올림픽과 선교라고 할 때 우선 중국선교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중국선교 전문지인 「중국을주께로」가 이 특집을 꾸미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베이징올림픽이 중국선교의 좋은 기회인 것은 사실이다.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베이징은 일차적인 선교집중대상지역이 될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면 관광을 위해 중국 전역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는 중국 전역이 선교의 무대가 된다. 베이징올림픽이 이렇게 중국선교의 황금기회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다음,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는 세계에서 베이징에 모여든 선수, 임원, 보도진, 응원진, 참관단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베이징을 세계의 축소판으로 삼아야 한다. 선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선교지 개념 파괴를 이야기해 왔다. 찾아가는 선교도 중요하지만 모여 있는 사람, 와 있는 사람에게 선교하는 것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땅 끝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베이징올림픽은 이런 점에서 천재일우의 호기이다. 

이 글의 제목 “세계는 베이징으로 복음은 세계로”는 20년 전 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 극동방송 올림픽 특집 프로그램의 제목에서 “서울”을 “베이징”으로 바꾼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세계는 베이징으로 복음은 세계로”로 할까, 아니면 “성령의 불길을 온 세계로!”라고 할까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이 망설였다. “성령의 불길을 온 세계로!”는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8월 15일부터 4일 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88세계복음화대성회(총재 김창인 목사, 대표대회장 신현균 목사)의 표어였다. 필자는 기획홍보단장으로 이 대회를 섬겼는데 대회는 한국교회가 여의도광장에서 가진 마지막 대형집회였다. 중국이 지금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라는 것은 자타공인의 사실인데 그 성령의 불길이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더 강하게 타오르고 세계로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이 표어에 미련을 가졌던 것이다. “세계는 베이징으로 복음은 세계로”나 “성령의 불길을 온 세계로!”나 모두 베이징올림픽이 세계선교의 활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오순절 때 천하 각국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가 성령체험을 한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들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고 전도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이어서 성령역사의 중심이 된 로마교회도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행 2:10)들이 이 때 복음을 듣고 로마로 돌아가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88서울올림픽 때는 한 교회가 한 나라를 담당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가나는 강남성결교회, 감비아는 송파제일교회, 괌은 영복교회 등 이렇게 64개국에 자매후원교회가 배정되었는데 이런 방법을 다시 한 번 동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을 통한 선교는 2008년 8월이 다시 한 번 오순절이 되고, 베이징이 제2의 예루살렘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88의 추억
꼭 20년 전인 1988년에 88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 한국교회는 손에 손을 잡고 선교에 힘썼다. 88서울올림픽을 정점으로 해서 한국교회는 4년 동안 네 차례의 올림픽선교활동을 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올림픽에 이어 열린 장애인 올림픽, 그리고 90베이징아시안게임을 통한 선교활동이다. 필자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선교활동을 현장요원(선수촌 기독교관 채플린)으로 섬겼기에 그 때의 열기를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사무실과 집을 옮기면서 상당량의 자료들을 폐기했는데 이 때의 자료들은 소중하게 챙겼다. 그 때 그 일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복된 일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86아시안게임 당시 선수촌 종교관 요원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이슬람의 세력이 이렇게 강한가?”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선수촌 도처에서 기도 시간이 되면 엎드려 절하는 이슬람교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약한가?” 하면서, 한편으로는 의기소침해지고 한편으로는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당시는 중국은 우리에게 서먹한 존재로서 한 중앙일간지가 “서울 하늘에 오성홍기가 휘날려도 좋은가?”는 사설을 게재할 정도였고 따라서 중국선수들의 행동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중국 선수나 임원들은 처음에는 종교관에 오지 않다가 중간 이후에 조심스럽게 다녀가기 시작했다. 그 때 종교관 기독교예배실에서는 열두 대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상영하는 멀티 슬라이드 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중국선수와 임원들은 그것을 본다며 자주 왔다. 종교관 운영요원 가운데 중국어에 능통한 송병권(宋炳權) 목사가 있었는데 이 분이 중국 선수, 임원들과 흉허물 없는 교제를 나누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분을 통해서 예배드리러 간다고 하는 것보다 새로운 영상물을 보러 간다고 하는 것이 탈이 적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와서 예배에도 살짝 참석하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8서울올림픽 때의 선교 열기는 중앙일간지들의 집중취재대상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뜨거웠다. 1988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는 “개신교: 선교올림픽 채비 한창”, 8월 7일 자 「한국일보」는 “올림픽을 세계선교디딤돌로”, 「서울신문」은(스크랩에 일자를 적어 놓지 않아 13396호라는 호수만 알 수 있음) “세계의 복음 서울의 共鳴, 9월, 선교올림픽 열린다”라는 제목으로 각기 올림픽선교 준비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스크랩이 보관되어 있지 않지만 올림픽 기간 중에 「중앙일보」에 “종교관 Ⅰ은 문전성시, 종교관 Ⅱ는 개점휴업”이라는 가십성 기사가 실렸던 것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기사의 전말은 이렇다. 선수촌운영위원회에서는 선수촌 후면의 외진 곳에 있는 한 학교의 신축건물을 종교관으로 배정하였다. 종교관에는 기독교·천주교·이슬람·불교·그리스정교·유대교 여섯 종교의 예배실과 명상실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개신교 운영요원들은 “멀어서 선수와 임원들이 오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종교는 문화와 생활의 중심인데 이렇게 뒤에 배정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결국 개신교는 선수촌 입구에 있는 현장 프레스 센터(지금의 오륜초등학교) 4층 한 개 층을 따로 배정 받았고 나머지 다섯 종교는 기존의 뒤편 건물을 사용하였다. 위치의 유리함과 이런 열심 때문인지 개신교관(종교관Ⅰ)에는 올림픽 기간 중에 예배 상담, 영화관람 모두 합해 7,697명의 인원이 찾아왔고 총 12,237권의 성경과 31,000부의 전도지가 이곳을 통해 배포되었다. 가끔 종교관 Ⅱ를 찾아가 보았는데 정말 한산하였다.「중앙일보」의 기사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중국선수와 임원들은 86 아시안게임 때보다 훨씬 여유 있는 태도를 보여 주었는데  개신교관을 찾은 중국 선수와 임원은 모두 244명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기독교”, “예수”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  Y라는 축구선수는 86 아시안게임 때 성경을 여러 권 가지고 갔는데 친척들이 서로 달라고 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더 많은 성경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기독교인인 그는 주님이 자기의 앞길을 친히 인도해 주실 것과 중국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88서울 올림픽의 선교활동은 종교관 영어 채플린인 성공회의 앤드류 딕비(Andrew Digby) 신부의 다음과 같은 소감이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시작한 올림픽선수촌 기독교관을 통한 세계선교는 20세기말에 있어서 세계선교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만한 중요한 사역이다.”  88서울올림픽전도협의회 회장이었던 조종남 목사는 한 모임에서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주도적 세계선교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라고 말한 일이 있는데 돌이켜 보면 이 말은 하나의 예언처럼 되었다. 묵은 기록에서 이 말을 찾아내 읽으면서 베이징 올림픽이 중국교회가 주도적 세계선교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게 해 달라고 잠시 머리 숙여 기도하였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 한국교회는 적지 않은 규모의 전도단을 파송하였다, 당시 이 일을 주도한 분은 체육인교회 담임 이광훈 목사였다. 이 전도단은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많은 전도활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이들이 선물로 사용한 스카프에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 대만의 국기가 인쇄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었다. 올림픽선수촌 운영규정에 따라 선수촌 안에 종교활동장소가 마련되었으나 크게 활발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극동방송에서 방송팀을 파견했는데 이들이 프레스센터의 배정 받은 부스에서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부른 것이 작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는 한중수교 이전으로 한국인의 중국여행이 쉽지 않을 때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시안게임을 참관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성령이여, 다시 한 번!
이 네 차례에 걸친 선교활동, 특히 88서울올림픽을 통한 선교활동에서 느낀 것은 성령의 강한 임재였다. 성령이 앞장서서 준비하셨고, 성령이 모두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셨고, 성령이 열심을 주셨고, 성령이 많은 열매가 있게 하셨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秘史)가 하나 있다. 1983년의 일인데 국제스포츠선교회라는 기구에서 당시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극동방송으로 초청장을 보내왔다. 홍콩에서 국제스포츠선교대회가 열리는데 왕복항공료와 체재비를 모두 부담할 테니 대표단을 구성해서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국제스포츠선교회가 어떤 단체인지 몰랐지만 당시 홍콩에 가면 중국 관계 일을 하는데 편리해서 기회만 있으면 드나들 때라 ‘잘 되었다!’ 하고서 팀을 짜서 공항에 나갔는데 공항에서 서울신학대학장을 역임한 조종남(趙鍾男)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인사를 드리는데 조 박사님도 같은 대회에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제스포츠선교회가 어떤 기구인지 아시냐고 했더니 모르신다면서 ‘혹시 통일교 단체는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 때는 통일교가 무료 해외여행 같은 것을 잘 제공하던 때였다. 국제스포츠선교회 대표인 에디 왁서라는 분이 보내는 뉴스 레터는 전부터 받고 있어서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국제스포츠선교대회에 이렇게 해서 한국대표들이 참석한 것이 한국교회가 스포츠선교회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서 한국스포츠선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한국스포츠선교회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의 선수촌기독교관 운영기구로 지정 받아 큰 역할을 하였고 이를 모체로 해서 스포츠 선교를 위한 여러 기구들이 조직되었다.

필자는 이 일도 성령의 인도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 한국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조종남 박사님이 당시 시간 여유가 있어서 이 일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세밀한 인도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조 박사님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서울신학대학장으로 재부임하셨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의 선교활동에 대해 차단장치를 강화하고 있다. 태풍 5호 작전의 실체는 이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는 성경을 휴대할 수 없고 복장에 종교적 색채를 띠는 문자나 부호를 금지한다는 조치도 발표되었다(본지 1·2월호 “차이나 윈도우 참고). 다른 글에서 언급될 것으로 여겨져서 여기에서 이런 장애요인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것들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면 중국선교에 전반이 그러하듯이 그런 것들이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 때는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 한국이었고 지금 성령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중국에서 강하게 역사하고 있다. 그 성령께서 베이징올림픽 선교활동을 강하게 이끌어주시기를 함께 간구하자! 

한국교회는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때 연합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힘을 모아 “올림픽 역사상 선교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대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88서울올림픽선교활동은 한국교회의 “최후의 영광”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한국교회는 숫자를 비롯해서 모든 면에서 둔화 내지 감소의 길을 걷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선교활동은 초원의 빛처럼 그 영광을 다시 한 번 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유관지 | 감리교북한교회연구원(NCRC) 원장.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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