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티베트 사람들은 50년 이후의 티베트의 역사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때 이미 멸망한 나라에 무슨 다시 쓸 역사가 있겠느냐는 자조적 표현이다. 이제 티베트 역사에 대한 여섯 번의 글을 끝내면서 티베트인들이 언급을 꺼려하는 그 ‘50년 이후의 티베트’ 에 대해 쓰려고 한다.
티베트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중국 내에서 출판된(이 말은 ‘출판이 허가된’이라는 뜻) 자료는 정부의 통치의도로 착색되어 있어 신뢰성이 떨어진다. 중국 내의 티베트인들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기록으로 남겼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라 쓸 수도 없다. 중국 밖의 티베트 자료를 통해서는 달라이라마 14대의 자서전(《티벳, 나의 조국이여》, 정신세계사)에서 우리는 59년까지의 상황을 알 수 있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인도에 있는 망명정부 쪽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지난 호부터 소개한 김한규의 책 《티베트와 중국》에는 양쪽의 입장이 다 나와 있다. 양측의 입장 차이 때문에 서술한 내용들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중국에 살면서 티베트인들로부터 들은 증언들이 어느 자료가 사실인지 뒷받침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티베트 침략 이후 중국 내외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인들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중국 내의 티베트인들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티베트 인명의 손실
김한규의 책에 의하면 1950년 10월 초에 중공의 장궈화 장군이 인솔한 4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참도를 공격하여 19일에 점령하였다고 한다(292쪽). 그 2주 동안 4천여 명의 티베트군이 사망하였다. 그 뒤로 중국이 라싸를 점령하였고 곳곳에서 티베트군은 유격전을 펼친다. 결국 1959년 3월 라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한다. 이 때 8만 7천 명의 티베트인이 죽음을 당하였다(김한규, 342쪽). 그 뒤로도 적어도 1974년까지 유격전이 50회 이상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 이후 1백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양측의 논란이 있는데 당연 중국측에서는 이런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인구조사통계 (www.china.com)를 보면 판단에 참고할 수 있다. 1953년에 1차 인구조사를 하였는데 이때 티베트족이 277만 5,622명이라고 발표했다. 1964년 2차 조사 때의 통계에서는 티베트족이 250만 1,174명으로 10년 동안 27만 명 이상 줄었다. 이 수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른 민족들과 비교해 보자. 같은 기간에 조선족은 112만 명에서 134만 명으로, 위구르족은 364만 명에서 399만 명으로, 한족은 5억 4,728만 명에서 6억 5,129만 명으로 증가한다. 이 통계에 의하면 10년 동안 한족은 20%, 조선족도 20%, 위구르족은 10%씩 인구가 증가했다. 만약 티베트족이 같은 비율인 최소한 10%가 증가했더라도 2차 조사 때 305만 명이 되어야 정상적인 인구증가이다. 그런데 오히려 10% 가 줄어 정상적인 인구증가 예상수치와 실제 인구 사이에 50만 명 이상의 차이가 나니 전쟁 등 외부적 요인이 있었던 것임이 드러난다. 사실 그 당시 티베트족이 277만 명이 아니라 5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티베트인들은 말한다. 정부의 왜곡 축소된 자료라고 여겨지는데도 이런 인구감소의 확연한 결과가 드러난 것이다. 통계 자체가 의문이지만 아무리 숨기려 해도 더 이상 티베트족의 인구감소를 감추지 못한 것이다.
어떤 티베트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의 고향 칭하이성의 통더(同德)라는 곳에서는 49년부터 59년 사이에 마을의 모든 남자들은 다 죽었다고 한다. 시쳇말로 남자는 씨가 말랐다는 표현을 한다. 자신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 성인 남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자라면서 들었다고 한다. 그곳은 전통적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무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골로그와 가까워서 신체적 조건이 좋은 무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족 공산정부에 조직적인 대항이 있어서 그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때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격전과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공개적인 항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희생이 있었으니, 49년 이후 이제까지 인명손실을 다 계산하면 자연사나 질병이 아닌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사망자가 100만 명(혹자는 120만 명)이라는 설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중국인에 의한 티베트 사회의 개조
사원 중심의 경제체제를 바꾸고 신분을 바꾸고 승려들을 강제 환속시키는 일등에 대해 말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공산당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달라이라마로 대표되는 종래의 기득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자 한 것은 지배를 위한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1951년 5월 23일에 흔히 ‘17조 협의’ 라 일컬어지는 ‘티베트 평화 해방을 위한 협의’를 중국의 압력에 의해 체결하게 된다. 이 불평등조약은 그나마 중국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다. 강제로 티베트사회를 개조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중국은 티베트지역을 여러 개로 나누어 중국의 성에 편입시키며(쓰촨성, 윈난성, 간쑤성, 칭하이성 등) 티베트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티베트의 외교권 박탈, 국방권의 장악이 이루어지고 중국 인민은행이 세워지고 티베트 경제가 중국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중국이 점령한 지 9개월이 되지 않아 인민해방군이 수천 톤의 보리 등 식량을 유용하자 티베트인들이 저항하기도 했다(김한규, 327쪽). 또한 수천 명의 티베트 어린아이들을 중국으로 유학 보내어 사상을 개조시키는 세뇌교육을 행하기도 하였다.
사상적인 면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문화대혁명이었다고 본다. 문화대혁명 때 티베트지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당시 60만 명이었던 승려 가운데 많은 수가 죽었고 25만 명이 환속당했다(김한규, 377쪽). 6,259개의 사찰은 8개만 남고 모두 파괴되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외부적 공격이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의 개조이다. 공산사상에 물들어 버린 티베트 젊은이들이 내지의 한족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승려들과 자신의 선생님들을 포승줄에 묶어 수치심을 주며 동네를 돌았다는 티베트인의 증언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그때 티베트 사람들이 한족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공산사상에 영향을 받았거나,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족 공산정부에 가입하여 자기 민족을 지배함으로 티베트를 한족에 종속시키는 것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정부는 티베트족 관료들을 이용하였다. 한족이 많이 사는 지역 출신으로, 비교적 중국어를 잘 구사하는 학생들을 데려다 경찰학교에 보내 경찰이 되게 한 뒤 한족이 들어가기 어려운 티베트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티베트의 깊숙한 지역에 배치되어 중국 정부의 시녀 노릇을 하며 자기 민족을 지배한다. 한족이 경찰로 갔다가는 혹 반감을 품은 티베트 사람들이 죽이는 일이 많아 같은 민족인 티베트 경찰을 보내 그들의 언어로 지배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공산당원인 그 경찰은 이미 한족에 속한 사람이나 다름없다. 한족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게 하면서도 소수민족 관리 목적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중국공산 정부의 고도의 전술이다. 중국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외교전술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오랑캐로 다스린다)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충성을 다해도 진급에는 한계가 있다. 점차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괴로워한다. 한번은 명절을 같이 보내면서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토로하며 슬퍼하는 티베트인을 보기도 했다. 이것이 중국 내 티베트인들의 현실이다. 이런 경험이 나로 하여금 중국 측의 사료를 대할 때 사고의 여과작용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였다.
또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학교에서 티베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아예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때 학창시절을 보낸 40대의 한 티베트인은 말은 할 줄 알았지만 티베트 문자를 몰랐고 대학에 와서야 배웠다고 한다. 어느 지역이든 정부의 우두머리는 티베트족이 맡지만 공산당 당서기는 한족이 하는데 중국의 정치체제에서는 당서기가 행정부처장의 위에 있기 때문에 실권은 언제나 한족의 손에 있어 티베트족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이런 현실이 지속되면서 결국 그들 스스로 분열하게 되고 독립에 대해 포기하게 만들어 가고 있으며 한족정부는 친 중국적인 티베트인들을 요직에 배치하여 그들을 통해 티베트 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사회개조의 여파로 이제 중국 내의 티베트인들은 누구도 독립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가 오랫동안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소위 ‘민족 대가정’에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편입된 것이다.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인들
잠시 밖으로 눈을 돌려 보자. 59년 이후 인도로 넘어간 티베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59년에 달라이라마가 망명한 뒤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히말라야산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중 상당수는 중국국경수비대에 의해 사살 당하거나 체포되어 압송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다람살라에 갔다가 고향 마을에 되돌아오는 청년도 보았다. 쓰촨성 랑무쓰라는 절에 갔다가 거기서 영어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티베트 청년을 만났는데 무용담 하듯 자신의 중국 탈출에 대해, 또 같은 방법으로 국경을 넘어 고향으로 되돌아온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었다.
인도에는 다람살라뿐 아니라 데라뚠이라는 곳에도 난민촌이 있으며 티베트 난민들이 인도의 서북부에 상당히 많이 있고 그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티베트 난민들이 나름대로 세력 형성을 하여 사회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인도 정부는 그들 일부를 남부 방갈로레라는 지역으로 흩어 보냈는데 약 40만 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산악 지대를 개척하고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을 위한 외국 사역자가 두 가정이 있다고 한다. 이 정보는 데라둔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을 통해서 들은 것이다.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인도로 망명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망명한 사람들은 달라이라마의 추종자여서 고향을 떠나기도 했겠지만 더 이상 중국의 억압가운데 살고 싶지 않다는 저항의 몸부림이라고 보여 진다. 50년 이후 고향을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티베트인들이 생겼지만 이들은 중국정부의 압력 때문에 난민의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행정구역의 개편
중국은 그 뒤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지금 중국의 행정구역에 서장자치구가 있다. 1965년에 서장자치구를 설립했는데 그 전까지는 ‘서강성’(西康省)과 ‘서장지방’이라고 나누어 불러왔었다. 서장자치구라는 단어는 상당한 역사적 무게를 가지고 있다. 또 그만큼 무거운 중국의 음모도 있다. 이는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조선족 문제나 고구려사 문제와 그 목적의 궤를 같이 하는 중국공산정부의 계획된 음모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혹 다음에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술하기로 하고 서장자치구라는 명칭과 행정구획이 59년 이후에 티베트의 원활한 통치와 계획된 음모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침략 이후 티베트의 황폐화
티베트의 황폐화 현상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핵실험으로 인한 것이다. 중국 정부는 1958년 칭하이성 시닝에서 100km 떨어진 곳에(지금의 西海?) 핵기지를 만들었다. 그곳은 원래 ‘진인탄’(금색 은색의 모래사장) 으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초원이었으며 티베트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해발 3100m의 이곳에 약 1000명의 티베트인들이 양을 치며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은 이곳의 티베트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그곳에 핵 공장을 세우고 40회의 핵실험을 진행하였으며 1964년 첫 원자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외부적으로는 ‘국영221공장’ 이나 ‘칭하이광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고 외국의 첩보에 걸린 다음에는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핵기지를 옮긴 것으로 들었다. 1995년에 중국 정부는 이곳이 핵기지였음을 정식으로 선포하였고 지금은 자국의 핵 실력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개발하였다. 이제는 쫓아냈던 티베트인들을 다시 되돌아오게 하여 살게 한다. 핵 쓰레기를 잘 처리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주민들은 늘 공포스럽지 않을까? 그들을 데려 오고 정부는 제법 현대식 건물을 지어서 이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과거의 잘못을 무마시키려 한다. 2005년 현재 약 200명의 티베트인들이 목축하고 있다는 정부관계자의 증언을 들은 적이 있다.
또 하나 심각한 것이 삼림자원의 황폐화이다. 이런 황폐화를 가속시키는 정책이 최근 나왔는데 그것이 곧 ‘서부대개발’ 정책이다. 이 정책에서 겉으로는 티베트 역의 사회 기초시설을 건설하여 서부지역 경제를 향상시키겠다고 하고 도로건설과 철도건설에 집중했는데 실제로는 그 수송망을 통해 티베트 지역의 상당한 지하자원을 한족지역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책이 시작되고 나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칭하이성에 와서 인민폐 120억을 주고 갔다는 보도가 있었고 이듬해에 비공식적으로 500억을 추가로 지원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시닝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비밀’ 이었다. 정부가 서부 대개발 정책을 세우면서 칭하이성에게 준 주된 과업은 교통망 확충이었다. 그래서 칭하이성의 경우 서쪽의 티베트지역으로 가는 도로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잘 아는 대로 꺼얼무에 멈추어 있던 칭짱철도를 라싸까지 연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관광객이나 한족의 이주를 돕는 것은 물론 화물열차와 화물트럭을 통해 티베트의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을 한족지역으로 운송하는 것을 쉽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족의 이주 문제에 대해서는 소문에 의하면 1억 명의 한족을 서북지방의 소수민족 지역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만약 그중 2,000만 명을 2000년 현재 518만 명의 인구가 있는 칭하이성으로 이주시킨다면 그 안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 140만 명은 그야말로 소수민족이 되는 것이다. 지금 암도 지역에 해당하는 칭하이성이나 간쑤성의 전통 티베트지역이 한족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많은 한족이 칭하이성 곳곳으로 들어가 섞여 살게 된다면 머지않아 그 땅 전체가 본래 한족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만약 1,000만 명의 한족이 서장자치구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이곳은 원래 한족 지역이었다고 해도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강대국의 힘으로 세계 모든 지도 위에 ‘티베트고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작업도 병행할 것이다. 백두산이 창바이산(長百山)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이런 미래를 계획하며 한족정부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대로 착착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이러한 한족 공산 정부의 반 티베트정책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1986에 중국 티베트연구센터(연구원이 2000여 명)를 세웠는데 이것을 통해 티베트의 역사를 왜곡하는 소위 ‘서남공정(西南工程)’이 진행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사실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침공과 59년 달라이라마의 망명 때부터 이미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족 공산 정부는 이런 작업을 통해 과거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던 티베트의 역사를 왜곡, 축소하고 중국의 지방 정부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번 호에서 이야기한 이런 티베트의 현대 역사에 대해서 그들은 철저히 왜곡시켜 교육하였다. 그 교육의 결과로 지금 한족들은 티베트사람들이 정부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으로 이렇게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왜 반정부적이며 한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느냐며 말을 듣지 않느냐며 티베트족에 대해 더 반감을 갖는다.
연재를 마치며
이번 호에서 중국의 티베트 침략 이후의 중국 내에 있는 티베트인들에 게 나타난 상황들을 살펴보았다. 당연 지금의 이런 상황들은 모두 이제까지 6회에 걸쳐 서술해 온 그들의 중요한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섯 번의 연재를 마치면서 현실의 이 티베트의 슬픔과 절망, 그 배후에 불교가 있다는 말을 꼭 강조하고 싶다.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티베트 친구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어김없이 그들 스스로도 불교가 우리를 망쳤다고 한다. 불교 때문에 그 강했던 민족이 이렇게 나라 빼앗긴 초라한 모습이 되었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거추장스럽고 잘못된 불교라는 옷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불편해 보이지만 여전히 입고 있는 그들의 전통복장처럼.
이미 티베트인들은 정치적으로 공산사상에 물들어 보았다. 불교가 아닌 다른 사상에 접해 본 사람들, 최근 젊은이들은 외국의 문물, 인터넷 등을 접하며 상당히 혼란스러워 한다. 그들이 선대와 달리 새로운 것을 접하는 것에 익숙해 있고 또 스스로를 바꿀 수도 있다. 이때 이들이 가치관의 혼란으로 영혼이 더 피폐되지 않도록 다른 나라의 쓰레기 문화가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이들이 속히 잘못된 옷을 벗어 던지고 성령의 새사람으로 덧입기를 기도한다.
통권 99호부터 티베트 역사에 대한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야기식으로 쓰겠다고 운을 떼었는데 영 재미없는 딱딱한 글이 되고 말았다. 본인의 실력이 이것뿐임을 한탄 할 따름이다. 또한 여섯 편의 글이 긴 시간에 나눠 쓰이다 보니 역사를 통전적으로 서술하지 못했다. 그래도 써 내려간 것은 이 글들이 조금이나마 티베트 복음화에 힘을 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아직 티베트선교는 초기단계에 있다고 본다. 그동안 티베트에서 서양선교사들이 해 온 소중한 업적들을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그들에 비해 우리가 이해가 더 깊다는 사실이다.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면서 서양 선배 선교사들의 연구결과에만 매인다면 티베트선교는 더욱 더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 보내신 것은 같은 불교권에서 살아 온 한국인만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에 이방선교를 위해 디아스포라 출신 헬라파 유대인 바나바와 바울을 사용하신 하나님이 같은 목적으로 우리를 그곳에 보내셨다면 서양선교사들이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찾아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협력이다. 앞으로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티베트복음화를 도울 수 있는 많은 연구 결과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 협력사역으로 티베트 복음화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글을 끝내면서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는 중국어로 번역된 것을 사용해서도 안 되고 비록 통용되지는 않는다 해도 그들의 언어로 쓰고 발음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독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고유명사의 경우 티베트 문자와 한자를 같이 표기하고 암도어 발음대로 한글로 표기하였다. 그래서 한자나 티베트 문자를 아는 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그런데 편집과정에서 font 지원 문제로 인해 티베트 문자를 삽입하지 못해 몇몇 고유명사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오기(誤記)가 있었고 여섯 편의 글에 일관성이 없게 나온 것도 있었다. 앞으로 중국어 음역이나 티베트어의 음역에서 문서 사역하는 단체에서 통일된 표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본다.
일년 이라는 연재기간을 허락하시고 긴 지면을 티베트의 역사를 소개하는 일에 할애 해준 <중국을주께로> 편집인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보잘것없는 글을 통해 아름다운 구호 ‘중국을 주께로’ 처럼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티베트를 주께로!’
유은식 | 전 중국 티베트 선교사, 현 산돌성결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