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와 소수인종 다음 용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① 용광로 ② 샐러드 보올(salad bowl) ③ 무지개 ④ 피자 정답은 미국의 다인종 다문화 사회의 특징을 뜻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용광로’는 온갖 것들을 녹여서 뜨거운 쇳물로 용해시키듯이 다양한 인종이 미국인이라는 이름으로 완벽한 하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샐러드 보올’은 야채나 과일 샐러드를 담는 그릇처럼 이민자나 인종 제각각의 문화적 특성은 살아있지만 미국이라는 샐러드드레싱에 의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무지개’는 다양한 인종의 조화의 미덕에 강조점이 있고, ‘피자’는 미국이라는 구운 빵 위에 서로 다른 인종과 민족이 토핑처럼 얹혀 져서 하나의 완성된 국가를 이룬다는 뜻이다. 수많은 인종간의 갈등을 경험한 미국 역사를 살펴볼 때 현재 미국은 ‘용광로’의 성격을 포기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미국의 정책은 샐러드 보올 이든 피자든 인종과 이민자 민족의 개별적 문화정체성을 살리는 가운데서 국가적 통합을 이루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 대중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는 어떨까? 스크린 속에서 과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샐러드처럼 다문화적 고유성들이 존중받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할리우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즉 투자한 돈 이상으로 이윤을 남기는 일이 중요할 뿐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 안에서 인종간의 조화를 이루는 일과 같은 사회적 가치쯤은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가지고 다인종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는 것은 독립영화나 단편영화 같은 소수의 사회활동가들이나 특별한 행사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이해 될 수 있을 뿐이다.
오히려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영화에 등장한 인종과 민족에 대한 왜곡이 사회와 대중의 현실과 시각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즉 미국사회에 소수인종과 문화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만큼 사회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영화에서 이것을 드러내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이다. 분명 어리석은 말이지만 미국의 평범한 백인영화 관객들과 미국주류문화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소수 이민자 관객이 아무런 생각 없이 영화를 단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한다면 이 말에 동조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비록 그것이 주제와 상관없고 의도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스크린을 통해 왜곡된 사실은 현실의 경험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인종차별을 겪는 아시아 이민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며 살아간다면, 영화 속에 등장한 자신들의 왜곡된 모습을 보아도 문제로 인식할 수 없으며 오히려 현실에서 당하는 불평등한 일이 합당하며 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종이나 문화적 차별에 대한 별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백인들은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행하는 인종이나 문화편견적인 행동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국사회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그대로 스크린 위에 투사되고 있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이 보다 중요하다. 왜곡의 문제를 고치려는 의도인가 아니면 그것을 즐기려는데 단지 방향이 맞춰져 있는가를 눈여겨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 등장하는 노골적이거나 아니면 숨겨진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해 보다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곡된 묘사의 대상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사람에 대한 그릇된 편견과 모욕을 주는 일 자체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반하는 일이며,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인 까닭이다(마5:22).
차이나타운과 할리우드 미국 주요 대도시마다 유명 관광지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국인 밀집 거주지 ‘차이나타운’은 미국 속의 중국이며,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가 중국인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즉 영화 속에 등장한 차이나타운은 곧 미국 대중사회를 향한 할리우드의 중국인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1974년도에 만든 할리우드의 걸작 영화 <차이나타운(Chinatown)>은 할리우드 시각에서 중국인의 이미지가 드러난 대표적인 영화다. 영화평론가들에 의해 세계 10대 영화로 선정될 만큼 작품적 가치는 높게 쳐주고 있지만 중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한 면들이 없지 않다.
영화 <차이나타운>은 잭 니콜슨과 페이 데나웨이 주연의 느와르필름이다. 느와르(noir)란 불어로 검은색을 지칭하며 영화학에서는 어둡고 부패하며 냉소적인 암흑가의 세계를 다룬 영화를 부르는 방식이다. 그래서 영화에 나타난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늘 어두운 밤이며, 영화의 결말 또한 비극적이다. 주인공인 사립탐정 기티스(잭 니콜슨)는 멀웨이의 부인으로부터 간통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던 중 익사한 멀웨이의 시체와 진짜 멀웨이 부인(페이 데나웨이)을 만나면서 살인과 거짓, 타락한 성적욕망의 세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 백인 남녀들이 보이는 부패한 실상을 하필이면 차이나타운이라는 배경에 맞춰야만 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영화에는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할리우드가 중국인에게 갖는 부정적 이미지가 영화의 배경에 매우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을 아니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서부의 차이나타운뿐만 아니라 동부 뉴욕의 차이나타운 또한 마찬가지다. <디어 헌터>로 유명한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1985년작 <이어 오브 더 드래곤(Year of the Dragon)은 뉴욕의 차이니즈 마피아를 소탕하려는 베트남 참전 용사 출신의 형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영화 제목인 드래곤(용)은 중국문화 속에서는 신성한 상징이지만 기독교 문화관인 서양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영화 속 백인형사에게 드래곤은 마약밀매를 통해 뉴욕의 차이나타운을 장악하려는 차이니즈마피아이며 동시에 반드시 미국의 사회적 안녕을 위해 싸워야할 악의 상징인 셈이다. 이렇듯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차이나타운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미국의 차이나타운이 겪어 온 역사의 연장일 수도 있다.
캘리포니아에 금이 발견된 이후 중국인들은 서부개척자들과 함께 서부에 발을 내딛었다. 1849년에는 불과 345명의 중국인이 도착했지만 1870년 한 해에만 무려 6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태평양을 건너올 만큼 그 숫자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했다. 골드러시가 끝난 뒤에는 대륙횡단철도를 놓는 일에 고용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도맡아 한 덕에 환영받았지만 문화 간의 이질성과 직업을 잃을지 모른다는 백인들의 위기의식은 곧 중국인들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법적제재를 가하기에 이르렀다. 1882년에는 10년간 중국인의 이민을 금지하는 이민법이 발효되기도 했고(Chinese Exclusion Act), 백인들과의 불화는 결국 자의반 타의반 중국인들끼리만 모여 사는 마을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차이나타운이란 중국 이민자 스스로가 자신의 거주공간을 게토(Ghetto)화 시켜서 중국민족 간의 사회적 유대감과 안정감을 확보하는 대신 미국 대중사회와는 거리를 두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러시아워’가 3편까지 간 까닭 그러나 할리우드는 역시 현실감각을 잃지 않는다. 차이나타운과 중국인들에 대한 역사적 편견과 상관없이 중국영화 관객들을 포함한 아시아시장을 공략하는데 있어서 중국 명배우를 기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성룡은 할리우드가 반기는 중국 최고의 문화상품이다. 쿵푸를 한다는 점에서는 1970년대의 이소룡과 비슷하고, 또한 무예의 달인인 이연걸을 연상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국 대중영화계가 선호한 중국배우는 역시 성룡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성룡은 공격성이 적은 코믹캐릭터로 인식되어 있다. 이소룡의 맨주먹과 쌍절곤이 총과 칼을 제압하는 것을 지켜본 미국인들은 그를 영웅시하는 한편 서부시대의 중국인들처럼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총을 사용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총이 등장해야 영화가 되는 상황에서 맨 손을 쓰는 이소룡의 등장은 신기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했지만 미국문화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감을 느꼈던 것이다(미국은 건국 당시부터 서부시대를 거쳐 지금 이라크에서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총의 문화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성룡의 이미지는 쿵푸를 하는 여느 중국배우와도 달랐다. 그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분명 상대방을 제압하는 힘과 기술을 선보이지만 그것은 잔혹한 폭력성을 갖고 있기 보다는 힘있는 남성 무용수가 보여주는 춤동작에 가깝다.
<러시아워> 시리즈에 나타난 성룡의 가장 큰 특징은 그에게는 미국인 친구가 항상 붙어있다는 점이다. 멋진 이소룡은 영화 속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이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화 속에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할 뿐 그와 함께 하는 미국인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이소룡의 무술은 더욱 빛났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의 문과 지갑을 동시에 여는 친밀감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워> 시리즈에서 성룡은 달랐다. <러시아워3>에서 성룡은 중국의 한 대사를 경호하는 이형사로 출연한다. 범죄소굴인 차이나타운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적 범죄조직인 삼합회의 악당들과 승부를 겨루는 정의의 편에 서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호감을 주며 3편에 이르는 제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미국인 친구와 늘 동행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1998년 1편 시절부터 호흡을 맞추어 온 형사 카터(크리스 터커)는 수다스러운 흑인 동료로 설정되어 있다. 말(영어)은 잘 못하지만 뛰어난 액션의 중국인과 말 많고 사고뭉치인 흑인 경찰 콤비는 할리우드 영화역사에도 처음 있는 일이다. 두 주인공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지만 이는 관객들에게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게 되며 서로에게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샐러드 보울’과 ‘무지개’적인 다문화공존의 가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는 법은 없다. 둘은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할 뿐이다. 즉 코믹한 흑인 경찰의 존재를 통해 미국관객들은 성룡의 액션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신의 문화권 안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 소수인종들의 버디무비(동료애를 보여주는 영화)가 미국에서 통할 것이가는 큰 의문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기획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워3>는 지난 8월 10일자 미국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놀랍게도 1위를 차지했으니 말이다. 이는 007시리즈를 능가하는 최고의 스파이 액션물이라는 찬사를 받은 <본 얼티메이텀>과 가장 대중적인 가족만화 <심슨 더 무비>를 제치고 달성한 것이라서 그 의미가 더 깊었다. <러시아워3>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인종과 국가 간의 편견들을 숨기지 않았지만 코믹과 액션으로 용해시켰다. 쿵푸와 차이니즈마피아로 인식되는 중국인의 이미지는 계속되고 있고, 한대사에게 총격을 가한 테러리스트는 이형사와 형제처럼 지내던 일본인으로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역사관계를 암시한다. 거기다 프랑스에서 만난 택시기사는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킨 미국에 대한 불만을 서슴없이 드러내어 미국과 프랑스간의 불편한 심리를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물론 프랑스 택시기사는 총격전과 자동차 추격신을 몸소 보임으로써 이 영화가 메이드 인 할리우드(미국)임을 상기시켰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중국인과 흑인 형사로 짜여 진 이 팀의 활약은 미국과 중국의 동반자 시대를 여는 정치적 의미가 들어있는 것일까? 이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함께 가는 사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계의 조직적 범죄에 대해서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영화의 내용처럼. 성룡의 아날로그적 액션과 2억불이 넘는 할리우드의 거대자본이 결합하여 화려한 볼거리가 담긴 영화가 탄생했듯이 중국과 미국은 서로에 대한 필요를 바탕으로 동반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강진구 | 크리스천문화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 한동대언론정보문화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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