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의 스승으로 존경받은 장거정
중국의 4대 명재상(名宰相)이라면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패자로 만든 관중(管仲),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諸葛亮), 송(宋)의 신종(神宗)을 도와 신법(新法)을 낸 왕안석(王安石), 그리고 명(明) 만력제(萬曆帝) 시대의 장거정을 든다.
장거정은 강력한 개혁정치로 쇠약해져가던 명조(明朝)에 생기를 회복하여 근 100여 년 동안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킨 명재상이다. 장거정(1525-1582)의 자(字)는 숙대(叔大), 호는 태악(太岳),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에서 태어났다. 장거정의 증조부가 장링의 랴오왕(遼王)부에서 호위(護衛)를 역임한 이후 그의 가문은 줄곧 장링에 거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글재주가 있었다. 그는 만 15세에 과거 시험의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21세에 진사가 되어 신동이라 불렸다. 정치,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위기의 조짐이 보이고 있던 당시, 그는 관료가 되어 낡은 병폐를 바로잡고자 헌신적으로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다.
그는 세종의 셋째 아들 주재후(朱載?)의 스승으로서 활동하였는데, 1566년에 주재후가 목종(穆宗, 隆慶帝, 1566-72 재위)으로 즉위하자, 곧바로 입각하여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동각대학사가 되어 『진육사소(陳六事疏)』라는 행정개혁에 관한 글을 지어 목종에게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공론을 줄일 것. 곧 모든 일에 헛된 말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도록 한다.
② 기강을 잡을 것. 곧 관직의 수여와 형벌을 공명정대하게 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③ 명령을 중시할 것. 곧 조정의 교지나 칙명이 잘 행해지도록 한다.
④ 명실상부할 것. 곧 인재를 신중히 헤아려 작위나 상을 내리고 이부에서는 관리를 성실히 고과하여 명성과 실제가 부합되도록 한다.
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것. 곧 나라의 풍속이 사치스럽고, 재부와 권력이 균등히 배분되지 않고 편중되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이러한 작태를 청사하도록 한다.
⑥ 군비를 바로 갖출 것. 곧 군사와 변방의 관리를 정선하고 훈련을 강화하며, 군의 기강과 군비 확충에 주력하면 국방은 저절로 공고해진다는 것이었다.
목종은 이것을 받아들여 실시하려 하였으나 곧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장거정의 개혁정치
목종의 뒤를 이은 사람이 신종(神宗, 萬曆帝:재위 1572-1620)이다. 신종은 10살 어린 나이로 하자 47세의 장거정이 황제의 스승이 되고, 더불어 어린 황제를 도와 정사를 담당하였다. 그는 신종의 신임을 얻어 10년 간 대학사로서 내각수보(內閣首輔)의 자리에서 일체의 정사를 위임받고 만력기에 어둡게 다가온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반 혁신 정치를 감행하였다. 이로써 그가 집권한 만력 초기 10년 간 상단한 정치적 성과를 달성하였다. 정치·사회적으로 어지러웠던 명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이 편안한 사회로 변모하였다. 장거정은 포부가 대단한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의 담력과 식견으로 일대 변혁을 주도함으로써 쇠락해 가는 대명 제국을 구하고자 했다.
그의 개혁정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거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내정 면에서 관리의 치적을 정돈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관리들의 고과(考課)를 평가하기 위한 ‘고성법(考成法)’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당시 조정은 뇌물이 성행하고 백성은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주된 이유가 ‘관리의 부패’라고 생각한 그는 각 아문(衙門)에 3개의 장부를 비치하여 단계적인 방식으로 관료조직을 통괄하는 비교적 엄밀한 통치 시스템을 적용한 것이다.
고성법의 핵심은 재무행정에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의 고과평가에는 세역 수취에 대한 성적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는 엄격한 관리 고과 평가 제도를 도입하여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이것은 정령(政令)을 원활하게 했을 뿐 아니라 각 부문의 사업효율을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관료에 대한 감찰 강화와 함께 행정부서의 정리를 단행하여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관리를 많이 줄였다. 또한 황하의 수리시설을 보수하고, 대운하의 하반을 준설함으로써 수송력을 향상시켜 수도(首都)의 식량문제를 개선하여 나갔다.
둘째, 대외적으로 적극적인 국방정책을 실시하였다. 우선 국방문제에서는 호시(互市:육상무역)를 재개하여 몽골인의 남침을 막았고, 동북지방에 이성량(李成梁)을 보내어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면서 동북의 방위를 공고히 하고, 또 왜구토벌에서 공을 세웠던 척계광을 서북 지방에 배치하여 베이징 북방의 방위를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서남지방 광시((廣西)의 야오족(搖族), 좡족(壯族)을 평정하는 등 융통성 있고 온화한 외교수단을 통해 주변의 소수민족을 안정시킴으로써 국방비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장거정은 재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특히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장교를 엄선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강병책, 만리장성의 보수, 몽고족 알탄한 과의 화의(和議) 등은 변경지역의 우환을 없애고, 국방비를 크게 절감시키는 데 주효하였다. 이것은 명의 중앙집권화로 인한 정치의 안정과 재정의 호전에 힘입은 것이었다.
셋째, 재정분야에 대한 개혁이다. 당시에는 조세와 요역을 회피하기 위해 지주에 의한 토지 은닉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는 가정제(嘉靖帝, 1521-1566)시대의 북로남왜 대한 막대한 군사비지출로 말미암아 국고가 극도로 고갈되어있었다. 따라서 왕조권력이 국고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숨겨진 토지를 적발하여 전국적인 토지면적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동시에 농민의 세금 부담을 균등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그는 1578년을 기하여 전국적으로 토지측량(丈量)과 호구조사를 실시했다. 1580년 그는 전국적으로 토지 측량을 단행하여 실제 납세 가능한 토지 700여만 경(頃)을 찾아내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의 경지 면적은 3할이 증가하였으며 이 시기는 명나라에서 재정이 가장 탄탄한 시기였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장거정이 추진한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1년, 그는 전국적으로 세제계혁(稅制改革)에 박차를 가해 전토, 부역 및 잡세를 합하여 은(銀)으로 납부하는 이른바 ‘일조편법’을 실시했다. 이것은 전토 면적에 따라 균등하게 납세토록 했으니, 이는 세제의 일대 변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장거정은 황제의 친척이나 측근, 횡포한 지주들의 토지겸병 행위에 대해 엄벌하였고 갖가지 세금을 합병함으로써 농민들의 불합리한 부담을 크게 줄였다. 강력한 개혁정책 실시 결과 사회적인 갈등이 현저히 완화되었다.
이리하여 만력이 즉위한 이후 1572년부터 1582년까지 10년 동안은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번영을 구가했다. 북방의 이민족들은 소란을 피우지 않았으며, 동남(東南)의 왜구 역시 종적을 감추었고, 토지 측량과 일조편법의 전국적인 확대로 말미암아 명조의 재정은 일거에 호전되었다. 정부의 창고에는 10년분의 미곡이 비축되었고, 국고의 잉여금도 상당액에 달했다고 한다. 국고 역시 날로 풍족해졌으니,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과를 얻게 된 것은 실로 장거정이 공적이 컸던 것이다.
장거정의 말로(末路)
장거정의 개혁정치로 인해 무종 이래 문란해 있던 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재정도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신종을 도와 재직한지 10년 만인 1582년 6월에 병사(病死)하고 만다. 그가 죽자 그를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장거정의 개혁정치와 그에 대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대파들은 장거정이 재상 재임 중 부친의 사망을 접하고도 복상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였다. 만력 5년(1577년) 가을, 그의 부친 사망 소식을 접하고도 귀향하지 않은 이른바 ‘탈정(奪情)’ 사건이었다.
당시 관습 상, 부모상을 당하면 관복을 벗고 귀향하여 ‘부모 3년 상’을 치러야 했다. 다만 예외가 있어 기간이 27개월로 단축될 수도 있었고, 만약 국가가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봉착했을 경우에는 황제가 나서서 복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는 있었다. 이를 일러 ‘탈정’이라 했으니, 극히 특수한 상황으로 쉽게 생기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장거정은 부친상을 당하였음에도 귀향하지 않고 조정에 남아 있었다. 당시 그는 당대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가 추진하던 개혁도 정점에 달해 있었기에 만일 그가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의 윤허를 받아 귀향하지 않고 탈정하고 궁정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부친상 중에 만력제의 혼례(婚禮)가 있어 그가 혼인식을 주관한 일도 쟁점이 되었다. 명 왕조의 예에 따르면 대신(大臣)이 부모상을 당해 근신하고 있을 경우, 황제가 입회하는 모든 길한 행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태후는 이러한 금기사항을 무시하고 장거정에게 잠시 관복을 갖춰 입고 만력의 혼인을 주관하도록 했다. 장거정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효를 도덕의 기준으로 삼고 예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대단한 불효로 여기지고 있었다. 그의 강경한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 즉 실직한 관리 및 조세포탈에 적발되었던 유력자들의 원한이 이 비난에 박차를 가했다. 더욱이 그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사제의 예의를 다하고 있었던 신종조차 그 태도를 바꿨다. 마침내 장거정은 타계한 이듬해에 시호 및 관위가 모두 박탈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가족들은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만력제의 제위 기간에는 누구도 감히 장거정의 신원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희종(熹宗, 天啓帝, 1605-1627) 연간이 되어서야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조금씩 장거정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천계(天啓) 2년인 1622년, 희종은 그의 원래 관직을 회복시키고 다시 장례식을 거행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장씨 가문은 일부의 재산도 다시 돌려받았다. 숭정(崇禎) 3년인 1630년, 예부시랑 나유의(羅喩義) 등이 재차 장거정의 신원을 주장하자, 의종(毅宗, 崇禎帝, 1611-1644))은 예부의 논의를 거쳐 빼앗았던?2명의 음관(蔭官)과 고명을 철회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숭정 13년인 1640년, 장거정의 증손자 장동창(張同敞)은 의종에게 장씨 가문에 무음(武蔭)과 조부 장경수의 관직을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의종은 장동민(張同敏)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하고, 장경수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장거정 사후 50년이 지난 뒤, 그의 명예 회복은 물론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다시 등용되었다. 이리하여 ?비로소 장거정은 억울한 누명을 벗고 명재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명 왕조는 이미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장거정 사후 명제국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장거정이 죽자 신종은 후궁에 틀어박혀 연락(宴樂)에 탐닉한 채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장거정시대의 정치적 여파로 말미암아 관료와 환관 사이에는 재차 파벌이 만들어졌고, 이 파벌 싸움으로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재정도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다. 은(銀) 경제의 영향으로 궁정과 도시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풍조가 유행했으며 반면 농촌은 피폐해져갔다. 그간 비축해 둔 재정은 지하궁전인 정릉(定陵)의 건설 등으로 말미암아 거의 탕진되었다. 베이징(北京)에서 발견 된 명십삼릉(明十三陵) 중 정릉은 신종의 즉위 후부터 시작하여 6년의 기간과 800만 냥이 소요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 예산의 2년분에 상당한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재정이 신종의 능묘를 짓는데 사용되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때에 만력삼대정(萬歷三大征)이라고 불리는 전란이 발생했다. 1592년 2월, 닝샤(寧夏)에서 몽고출신의 장군 보하이가 오르도스의 몽고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요동의 최강부대를 멀리서 동원하여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으며 이때 활약했던 장군이 이여송이었다. 같은 해 4월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즉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명조는 조선으로부터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대군을 출동시켰다. 이 전쟁은 결국 7년이란 장기간 동안 조선 전역을 황폐화시킨 채 끝났으나, 명조 역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었으며 재정 손실은 1천만 냥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채 끝나지 않은 1597년(만력 25년) 7월 보저우(播州)의 소수민족 추장인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진압에도 2년이란 세월과 대군이 동원되었다. 명조는 막대한 군사비 및 사치스러워진 궁정비용을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으로 세금을 무겁게 징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전쟁과 반란 진압으로 말미암아 요동방면의 방위체계가 약화되어 여진족의 대두를 조장하게 되었다.
장거정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기하다. 독단적인 전제정치가라고 비난의 소리도 있기는 하나, 중국인으로써 미국 국적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유명한 역사학자 레이황(黃仁宇)은 그의 저서 『만력 15년』에서 그의 엄격한 내치와 강력한 대외정책 및 경제정책으로 인해 이 기간에 명나라가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하면서 그의 정치적인 재능과 공덕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부국강병을 위해 혁신 정치를 추진하던 명대 최후의 개혁가 장거정의 죽음으로 명조는 사양길로 접어들고, 결국 중국의 역사는 명에서 청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전순동 | 본지 집필위원·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