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반환 10년의 희비와 애환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70년대,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야 지난 날 묻혀있던 복의 원천과 화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반환 10년은 그야말로 "불확실한 연대"였고, 홍콩과 중국대륙 및 전 세계가 마찰을 거쳐 하나 되는 10년이었다. 마치 안경을 바꾸면 걸을 때 약간 떠있는 듯하고 두통을 동반하지만 초점만 정확하게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문제의 깊은 뿌리를 이해하고 "기본법"을 준수하면 관리와 영국식민시기에 흡수된 많은 편견을 제거하며 홍콩만의 독특한 발전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일국양제"의 실험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나 홍콩인들은 신중하게 임하며 멀리 있는 일들까지 언급하고 있다. 요즘 많은 매체에서 홍콩반환 10주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국 전 수상은 1982년 일찍이 홍콩이 반환되면 "재난성 영향을 야기할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중국이 주권을 행사함으로 나타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발생한 적이 없다. 금융위기나 "사스"같은 위기의 순간에도 홍콩사회는 안정적이었으며 또한 "일국양제" 와 "기본법"의 규범 하에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하며 고도의 자치를 시행하고 있다. "马照跑舞照跳(말은 여전히 뛰고, 춤도 여전히 춘다.)" 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틀에 박힌 말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인다. 차라리 세인의 주목이 집중된 기회를 이용해 홍콩 상황을 정돈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세계 어느 지역, 국가, 대도시와 비교해서도 홍콩 자체가 가진 문제는 적은 편이다. 도시와 농촌이 없으며, 내륙과 연해지방의 차이가 적고, 종족, 집단, 가문, 종교에 심각한 갈등도 없다. 또한 일찌감치 도시화와 현대화의 기본건설을 완성하였다. 대체로 법치와 청렴이 잘 이뤄지는 지역이다. 또한, 중국주권 하의 자치특구로 돌아왔고, 홍콩은 싱가포르처럼 군비에 자신의 돈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동시에 상하이(上海)처럼 중앙정부에 세를 바칠 필요도 없다. 홍콩주재 군부대 소요비용도 홍콩에서 부담할 필요가 없다.
홍콩은 더욱 더 큰 금융센터가 되었고, 뉴욕, 런던과 같은 세계 경제의 요지가 되었다. 이외에도 뉴욕, 런던과 비슷하게 무역서비스업, 관광소비업, 지식창조산업 등이 존재한다.
싱가포르는 정책적으로 제조업을 국민생산의 일정비중을 두어야한다고 요구했을 때 홍콩은 뉴욕, 베를린처럼 제조업을 줄였고, 런던, 파리, 도쿄, 싱가포르처럼 고과학기술 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다만 대륙 특히 주강삼각주에 기대어 홍콩은 제조업 대신 물류업 같은 서비스업을 제공하였다.
생산업을 한 켠으로 미뤘다고 볼 수 있다. 홍콩의 조건(금융+무역서비스+지식창조산업)은 세계적으로도 소수의 도시만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홍콩에는 이 같은 좋은 조건이 있으나 많은 부분에서 잘못 평가되고 있다. 홍콩의 1인당 평균수입은 97년 반환 전 이미 유럽의 대국들을 초월하였지만, 환경보호, 에너지 절약, 사회보장방면에서 EU의 요구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중산층 빈부차 극심
홍콩 중산층의 수입이 96년 대비 10% 이상 낮아졌다. 최소 반 이상의 주민의 실제 수입이 줄어든 것이다. 월수입이 1만 달러/ 홍콩 달러(약 1,280 달러)에서 4만 달러/홍콩 달러인 가정은 96년에 61.2%이던 것이 06년에는 55%로 떨어졌고, 지금도 중산층이 계속 줄고 있는 형편이다. 최저 수입층의 하강폭 또한 더 커졌다. 현재 50만 호가 8천 달러 이하의 수입을 가지고 있고, 이 계층은 96년 13%이던 것이 05년에는 22%로 늘어났다. 당연히 상위층의 수입은 이전보다 늘어났다. 최근 재벌들의 이슈는 더 이상 어떤 여행상품을 구매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전용비행기를 구입하느냐이다.
97년 이전 홍콩은 발전하여 각 사람의 실제 수입은 증가하여 모두들 같이 부유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체 경제 호전의 혜택을 나누지 않아 다음 번 경제쇠퇴 시에 한 배를 탔다고 다시는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홍콩의 빈부 차 지수는 0.52로 세계적으로 높다. 일본, 한국, 대만, 심지어는 가장 비슷하게 발달한 싱가포르 같은 아시아 발달국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이것은 홍콩이 부끄러움을 느낄만 한 것으로 사회 구조와 주거정도 및 전체 경제발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급격한 변화로 홍콩의 경쟁력이 떨어져 밀려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1940년대 말 시작하여 세계경제는 호황을 누리며 홍콩도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세계라고 함은 사실 미국과 제 1세계국가를 의미하며 간단히 말하면 미국도 홍콩도 좋았고, 2차 세계대전 후 지속된 긴 호황기의 혜택을 홍콩도 함께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90년 대 후 세계경제는 지구촌화가 되었고 홍콩은 지구촌화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됨에 따라 홍콩과 대륙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현재 홍콩은 미국과 중국이 좋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홍콩은 그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외부의 큰 환경으로 홍콩의 주관적인 염원에 따라 혹은 내부세력이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좀 더 깊이 연구해보면 한 특수한 상황이 나타났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과 중국 내 상황이 좋아지면 오히려 홍콩에는 문제가 생긴다. 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그 예이다. 홍콩과 태국 등은 침체되었지만 미국과 중국은 침체되지 않았다. 금융위기 후 홍콩의 회복도 한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느렸고, 7년 간을 느리게 회복되어 갈 때 중국은 고속성장을 거듭했으며 홍콩은 몇 년간 침체를 거듭했다. 중국이 좋아지는 것과 홍콩 사이에는 긴 시간차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홍콩경제는 기본적으로 미국, 중국이 좋아지고 나빠짐에 따라 홍콩 독자적으로 좋아질 수는 없지만, 스스로 발전할 수는 없고 지속적으로 침체에 빠질 수는 있어 혼자 상황이 나빠질 수는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97년 이전 홍콩의 연평균 수입은 영국 보다 20%가 앞서 있었다. 10년 후 영국은 신공당 집권 하에서 홍콩보다 30%이상을 앞서게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홍콩특구의 경제는 반환 후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금융위기나 사스(SARS)위기 혹은 외부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홍콩 내부 체제와 정책 때문에 경제가 쇠퇴했고 회복과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문제를 만난 건 아니지만 피동적인 외부환경 혹은 중국 중앙정부의 특혜정책을 기다리거나 피동적으로 내부체제를 개혁하고 지도사상을 조정하였다.
여기에서 본인은 세 가지의 견해를 반환 10주년을 되짚어보는 논점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 홍콩내부의 좋고 나쁨은 대부분 7, 80년대에 심은 결과이고, 아주 작은 부분만이 반환 후에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문제는 7, 80년대의 경험으로 새롭게 귀결되어 처리되어야 한다.
둘째, 기본법은 특구에서 최상위 법으로 준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현재 홍콩이 해야 할 일은 홍콩인에게 나타나는 일에서 기본법의 요구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셋째, 10년 간 홍콩특구 정부는 건설적인 일을 하였는가? 일부 그렇긴 하지만 마치 새 안경을 착용했을 때의 부자연스러움과 고통이 있는 것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미 경제학자 칼 브레이스의 "불확정한 년대"에서 "불확정"이라는 단어를 중의적으로 해석했다. 즉 과거에 의심 없이 확신했던 것을 당면과제에 부딪혔을 때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출현해 해결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반환 10주년은 홍콩의 불확정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10년 간 홍콩의 문제는 대체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문제의 심층원인을 의식하게 되었다. 현재 이것을 계기로 시민, 특구정부 및 중국정부의 지혜가 필요하다. 필자가 중국, 대만에서 15년 간 거주하며 두 지역이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는가를 바라보며 홍콩의 이러한 내부문제는 다음 10년 내에 풀릴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진보한 70년 대
현재 상황에 불만인 홍콩인들도 60년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지금이 그 때보단 훨씬 낫기 때문이다. 70년대 초에서 80년대 초 사이의 홍콩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그 10년 간의 "진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 이 식민지였던 60년 대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부패가 일반적이었고, 공문서는 모두 영어였으며 아르바이트는 쉬지도 못했다. 당시 사회에는 고위층의 압제대신 그 생명을 줄 수 있는 영국 선교사 "시에시언(叶锡恩)"같은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했다.
70년대 식민지 정부는 변모하여 의식적으로 앞서 언급한 "선한 통치" 와 "현대화 기본건설"을 추진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비록 중요한 문제이지만, 여론, 민간항쟁, 진보인사들이 이러한 개혁에 어떻게 공헌했는지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격어보지 않은 자본주의 발전의 단계 혹은 식민정부의 동기를 추정하지 않고 행위와 성과만 보려고 한다. 노동법 상의 보수 및 연가를 예로 보면 당시 경영계와 친 북경인사는 대대적으로 반대하였고 그 외에 반부패는 경찰들의 대대적인 단속을 받게 되었다. 정치가 경제계까지 손을 뻗는 것으로 일부 경영계에 타격을 주었고 저항세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식민정부는 굽히지 않았다. 당시 노동자 안전법, 해고보상제, 공공원조 등의 정책이 일부 경제계의 반대를 받았고 영국의 비벤(费边)언론사는 76년 세계어디에서도 홍콩의 경제계와 같은 강한 반응은 없었음을 보도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식민정부가 중국특수 이익집단을 대했을 때 강한 자주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상인 "마이리하오(麦理浩, Murray Maclehose)"는 임기가 가장 길었던 총독인데, 71년 11월에서 82년 4월까지였다. 본래 외교관으로서 전임 총독처럼 식민정부의 관료가 아니었다. 외교관 출신인 그는 70년 대의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식민지를 유지하는 것이 그다지 영광스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는 식민지를 없애고 영국만 해도 복지사회를 구현하고 노동당이 집권하여 학자와 의견단체는 70년 대 제출한 보고서에서 식민정부는 홍콩에서 "깨끗하고 도덕적인 정치(善治)"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관료들도 영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콩의 노력은 당시엔 별 진전이 없었고, 인근 국가들보다 더 뒤쳐져 있었다. 7, 80년대 말 기독교 공업위원회는 여성들이 평등한 임금 및 연가를 누려야 함을 글을 통해 주장했고, 이 부분을 법령으로 제정한 것은 중국, 대만, 인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스리랑카 보다도 늦은 시기이다. 식민지의 개혁은 보편적인 개혁이나 청사진대로가 아니라 점진적이고 실용주의 심지어 기회주의가 함께 영향을 주는 것이다.
마이리하오의 첫 번째 정책은 공관, 교육과 사회복지에 우선을 두고 강조했지만, 오히려 경제침체를 만난 후 계획을 뒤로 미루고 수정하였다. 뒤 이은 경제 고속 성장은 마이리하오의 의욕을 증가시켰다. 당시 재정장관인 샤띵지(夏鼎基)는 "지지뿌깐위(积极不干预: 앞의 일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임기도 마이리하오와 비슷하여 1971년에서 81년까지 오른팔로 지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후에 어떤 사람이 "지지뿌깐위"하는 방임주의는 잘못 된 것이다. 만약 당시 마이리하오가 이후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이해를 가지고 "지지뿌깐위"를 대처했다면 그처럼 강한 정부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일본, 대만, 한국, 싱가포르의 공업정책을 배우지 않고 직접적으로 보완하거나 개별 산업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경제활동은 비교적 절제하여 재정에서 수입을 내보냈다. 바꾸어 말하면 "지지뿌깐위"는 경제범위에서만 사용하고 정부가 시장에서 민첩성을 잃은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정비하였다. 정부가 공공물품을 제공하는 것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깨끗한 정치는 설득력을 동반한다.
홍콩의 법치와 사법독립 체제는 일찌감치 발달하여 식민지의 특징이 되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법치는 정치를 깨끗케 하는 것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고 홍콩이 공인되는 가장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
홍콩에는 사전검열을 받는 언론사는 없다. 비록 67년 시위기간 좌파 잡지가 금지되어 87년에야 신문관리법이 폐지되었다. 또 74년 문화혁명에 대해 논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언론은 그런대로 자유로웠다고 볼 수 있다. 70년대엔 시민단체행동을 억압하는 3명 이상이 함께 있으면 안 되는 불법 집회죄, 노동자들은 정치적 용도의 회비를 내선 안 되고 외부 세력과 결탁을 금지하는 등의 식민지 악법도 있었지만, 인신자유와 언론, 모임탈퇴, 취업, 학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당시 화교 및 동남아 지역보다는 훨씬 조건이 나았다.
식민정부의 개혁은 마이리하오 전임인 따이린즈(戴麟趾)시기에 시작하여 가장 큰 힘을 사용하여 마이리하오재임기간에 결실을 맺었다. 마이리하오 정부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자주적으로 정권을 사용하면 관리 성적이 좋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익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특수이익집단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
80년대가 오늘을 결정했다
홍콩의 80년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로 새로운 발전 형태를 정립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단 한 번의 개혁으로 20년 간 홍콩의 현재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조업 중심의 지방 도시에서 금융과 서비스업 위주의 국제적인 도시로, 이민자 사회가 장기 거주자의 시민사회로 변모하였다. 또한 수입문화에 의존하던 것이 문화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문화센터가 되었으며, 정치면에서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80년대의 이러한 추세 및 중요한 정책결정은 오늘날 홍콩의 장․단점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중국 개혁개방 후 홍콩의 대형공장은 대륙으로 진출하였고, 제조업은 지주산업이 되지 않고 공장 노동자 수요는 급격히 하강했다.
홍콩은 국제금융 센터로 자리매김했을 뿐 아니라 세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손색이 없는 도시로 변모했다. 홍콩인의 수입은 대폭 성장했고 90년대 중반 1인당 연평균소득은 2만 5천 달러가 되었다. 개인의 생활의 질은 황금기라 불리울만 했고, 97년까지 그야말로 홍콩의 황금기라 할만 했다. 그러나 반면 제조업의 쇠퇴와 미신시장의 만능주의 심각한 경제편식의 도시가 되어 97년에는 빈부격차 등 양극화 현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부동산 가격이 투기바람을 일으켰다
84년 중영 양국의 협정을 통해 개인 토지구매 면적을 1인당 50㎢이하로 결정했으나, 실제 개인이 구매한 토지는 216㎢이었고 97년 부동산 가격은 84년의 14배로 급등하였다. 부동산 가격의 급등은 경쟁력에 손상을 주고 대출을 받은 사람은 큰 타격을 입었다. 부동산 투기바람은 홍콩의 창업을 위축시켰다.
부동산 가격상승은 재건축 시장을 자극하고 시내 전통적인 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식민 정부는 해안지역 개발에 착수함에 따라 큰 차익을 얻게 되었다. 50년 대 이후부터 진행된 중국인의 홍콩 이주가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며 더 확대되어 홍콩에는 홍콩인과 대륙에서 온 중국인, 합법, 불법 이민자의 경계가 뚜렷해진 채 7, 80년대의 급성장기를 맞이하였다.
84년에 체결한 중영연합성명이나 85년 착수해 90년 발표한 "기본법"의 큰 영향을 받았다. 84년 성명을 통해 홍콩의 중국반환 후 일국양제 체제를 갖추고 고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 경제사회면의 변화가 없을 것을 약속하는 것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성명발표 후 중국정부는 주도적으로 "기본법"작성에 관여하였고, 89년 초안을 마련하였다. 중국 정부의 정권 교체 후 약간의 개정을 거쳐 확정 발표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홍콩의 기본법은 정권이 홍콩인으로 바뀌는 것을 제외하곤 80년대 말 홍콩의 모든 특징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자본주의 홍콩의 장점을 그대로 보호,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홍콩의 방식을 유지하다
덩샤오핑(鄧小平)은 "50년 불변"의 원칙으로 80년대 홍콩 방식의 불변을 못 박았다. 중국은 제일 처음의 경제특구로 심천을 지정함에 따라 홍콩의 체제를 배우고자하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덩샤오핑은 "50년 불변"을 통해 홍콩인의 권익을 보장하는 전략을 구사했고, "기본법"을 창조성의 걸작이라 표현함으로 중국정부의 홍콩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홍콩인의 권익을 보호했다.
일부에서는 기본법 제정 이전 수상 등 내각구성을 먼저 할 것을 주장했고, 또 일부에서는 선거 혹은 민주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 두 의견을 모두 누르고 중국정부의 최종목표에 역행하지 않는 이상 수상과 내각기관의 선거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진행 속도에 대해서는 약간의 점진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97년 기본법(基本法)의 홍콩 민주주의를 위한 준비
홍콩의 민주주의는 논하고자 하면, 일제의 통치가 끝나고 「광복」후 처음으로 홍콩 총독을 맡은 량무치(楊慕琦)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후 시(市) 정국(政局) 의원을 직접 선출하게 되었고, 혁신회(革新會)와 공민회(公民會) 등의 준정당 조직이 정강파(政綱派) 회원의 선거 참여를 발표하였다. 이 밖에도 82년 성립된 구의회의 일부 의원들도 직접 선출하게 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84년의 정치제도 개혁백서(白皮書)를 통해 입법국의 직접 선출 도입을 결정하였고, 《중영연합성명(中英聯合聲明)》이 체결된 이후 홍콩에는 민주주의의 열기가 나타났는데, 매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보통 선거를 통해 특구 행정장관과 입법국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보통 선거를 지지하는 데모를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민주주의와 관련된 논술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요구가 극렬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에, 웨이이신(韋奕信) 홍콩 총독이 주도하는 식민지 정부는 87년과 88년에 정치 제도 녹서(綠皮書)와 백서(白皮書)를 발표하여 시민들의 민주주의 대한 요구를 완화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는 후에 고의로 여론을 왜곡한 것이라고 증명되었다.
보통선거 제도화 방향을 확립
기본법은 뒤이어 신중하게 반영하고 긍정하였다. 바로 이 같은 추세의 완화가 오히려 앞을 향해 나아가던 80년대 중후기 홍콩 민주화의 진행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이후 "기본법"관련문서Ⅱ에 와서야 비로소 반환 후 제 1회 입법회(立法會) 60석 가운데 20석에 대해 직선제를 실시하였고 제 2회 때는 24석에 대해 직선제를 실시하였으며 제 3회 때는 30석에 대해 직선제를 실시하여 점차적으로 전체에 대해 보통 선거를 실시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게 되었는데, 비록 일부 초조한 민주 인사들은 진도(進度)에 대해 불만을 갖기도 하였으나 민주주의와 보통선거는 점차적으로 제도화되는 방향으로 확립되었다.
89년 후반기 이후 홍콩인들의 직선제를 요구하는 고함소리는 더욱 강해졌다. 중국 측은 영국 측이 식민지의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에 작은 조정을 가하는 것을 동의하였는데, 바로 91년 입법국(立法局)의 60의석 가운데, 원래의 10석을 18석으로 증가시키고 공민 "한 사람의 한 표(一人一票)"로써 직접 선출하도록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 측 역시 기본법 안에 국가 안전에 관한 제 23조를 추가로 포함시켰다. 기타 대부분은 이미 초안을 세운 기본법 조문이 90년대 초 <전국인민대표대회(人大)>에서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본법"은 90년대 초 결정된 이후 97년 전까지 더 이상 어떠한 변화도 없었는데,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홍콩 총독을 맡은 펑띵캉(彭定康)이 90년대에 입법국의 민주주의 성분을 확대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정세가 어지러워지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헛된 일이 되었으며, 반환된 이후에는 모두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가장 중요한 제도의 창조성
"기본법"의 가장 중요한 제도적 창조성은 어떻게 특구의 행정장관이 구상되었는가에 있다. 이것은 홍콩이 반환되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식민지 총독은 영국 황제의 명을 받는 독재자인 것이다. 설령 세심하게 여론을 따져보고 좋은 정치를 위해 애써 노력하는 진보적인 독재자라 하더라고, 법리(法理)적으로 홍콩 총독은 홍콩 시민 누구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자의 시대는 홍콩에서 이미 영원히 지나갔으며, 더 이상 선택 사항이 되지 못하였다.
특구 행정장관은 홍콩사람 가운데 선출되어진 연후에 중앙에서 임명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출할 것인가? 기본법에서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선은 800인 선거 위원회에서 선출하고, 마지막에는 순차적으로 전 국민의 보통선거(普選)로까지 점차 발전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과도 단계에서의 특구 행정장관의 정통성은 상업계라는 좁은 울타리의 은상(恩賞)에 편중되었지만, 이후 정상 시기에서의 특구 행정장관의 정통성은 전 국민이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반환 이후 홍콩 정치 제도가 가장 크게 변한 점이다. 특구 행정장관은 결코 홍콩 총독이라는 직함만을 바꾼 것이 아니다.
이것의 탄생 방법은 중앙과 입법회(立法會), 공무원, 특수 이익집단의 권력 및 책임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모두 새로운 범주와 마찰을 통한 결합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확실히 일찍부터 반환 이후의 일부 불확실한 국면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입법회의 직선(直選)제와 기능 집단의 자선(自選)제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환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반환 이후 보통선거의 요소는 기본법에 따라 장차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갔다. 비록 구체적으로 조합하는 준비는 선택사항이 매우 많은 까닭에 쟁론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발전하는 발자취는 80년대 말에 배열되어 있다.
독재자는 자주성이 있으나 정당한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 좁은 울타리 안에 있는 특구 행정장관의 자주성과 정당한 정통성은 빈약하므로, 오직 보편적으로 선출한 지도자야말로 비교적 높은 자주성과 정당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보통선거는 행정장관의 주도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
누가 당신을 선출하여 나오도록 했다면 당신은 바로 그 누구에게 우호적일 것인데, 이는 대의제(代議制)의 법칙이다. 몇 백 명의 좁은 울타리에서 당신을 선출했다면 당신은 그 몇 백 명의 사람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특수 이익 집단에 대해 좋은 태도일 수밖에 없는데, 적어도 많은 시민들이 당신에게 가서 문책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특구 행정장관은 시민들이 직접 선출한 것이 아니어서 정통성과 도덕적 감제고지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임기 내에는 비교적 큰 자주성을 가지고 홍콩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밖에 성과가 있어야 하고 또한 입법회의 호응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입법회(立法會)의 권한 부여자는 특구 행정장관과 달라서 직선(直選) 의석인가 기능(攻能) 의석인가에 관계없이 그들은 각자 그들의 유권자들을 고려해야하는데, 특구 행정장관은 입법회 구성원의 「밥 주인(米飯班主)」이 아니므로 그들이 특구 행정장관을 굳이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논자는 여기길, 이 같은 「반민주(半民主)」행정 입법 배치가 곧 특구 정부가 10년 동안 논의했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기왕 기본법의 승인을 얻었고 또한 그것을 행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된 입법회(立法會)의 민주주의 국면이 뒤바뀔 수 없는 바에야, 유일한 출구는 기본법에 따라 가능한 한 빨리 보통 선거를 통해 특구 행정장관을 선출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로써 특구 정부의 자주성을 강화시킬 수 있고 좁은 울타리 안의 특수 이익집단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있으며, 동시에 인민 대다수의 승인을 옆에 끼고 입법회의 협력을 이끌어 냄으로써 특구 행정장관의 지배 역량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과격 인사를 배제하여 추천을 얻다
사법 독립을 포함한 홍콩의 법치는 훨씬 전에 이미 안정되었고 언론은 자유로우며, 중산계층의 역량이 강대한 시민사회이므로, 특구 행정장관이 독재자나 혹은 과격분자로 변할 가능성은 많지 않은데, 설령 변한다 해도 최소한 임기가 만료되면 끌어내릴 수가 있다.
기본법은 또 하나의 관문을 미리 준비하였는데, 소집단이 선출하든지 아니면 보통선거를 통하든지 간에 특구 행정장관 자리의 선거 경쟁자는 민주와 개방의 원칙에 근거하여 광범한 대표성을 지닌 추천위원회의 민주 절차에 따라 추천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과도하게 극단적인 인사들을 거의 배제하고 추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1. 보통선거를 통한 특구 행정장관은 자주성과 정통성 면에서 소집단에서 선출할 때보다 높을 것이다.
2. 보통선거를 통한 특구 행정장관이 법치(法治)를 초월한 독재자나 혹은 범법자로 변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3. 보통선거를 통한 특구 행정장관이 과격한 인사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기본법"의 틀 속에서, 보통선거를 통한 특구 행정장관은 유일한 마지막 선택 사항이면서 또한 제도를 바꿀 수 있는 비교적 타당한 지도자이다.
"기본법"의 특구 행정장관제에 관한 구상은 그 해의 여러 우려에 대한 타협과 초안을 잡은 자의 정치 인식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확실히 부족함이 있는 구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1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것의 장점이 점차 발전하고 있으며, 우려가 가져 온 과도한 반응을 감소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짬을 내어 문제를 정확히 보게 된다면 더욱 세밀하게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부족함이 있는 시스템은 결코 활동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점차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법은 중앙 정부와 특구 정부 및 모든 홍콩 시민들이 모두 반드시 한 마음 한 뜻을 모아야 하고 이것을 전부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지금 홍콩 시민들은 본분에 따라 일을 하며 기본법이 부여한 권리와 보장을 열심히 수행해야 하고, 특구 행정장관과 입법회의 전면적인 보통 선거를 실현함으로써 홍콩이 불확실한 과도기를 종결시키고 정상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소집단이 특구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이러한 과도기적 배치를 끝내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볼 때, 기본법을 지키고자 하면 홍콩은 기본법23조에 따라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비록 기본법에서는 언제 이 법을 제정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반환된 지 이미 10년이 되었으므로 언제까지나 미루어 둘 수는 없다. 입법 과정 중에 격렬한 논쟁이 있을 수도 있으나 악법의 통과는 반드시 저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목적은 좋은 법을 체결하는 것이지 법률을 제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난 번 특구 정부가 급작스럽게 법률을 제정하여 시민들의 심한 반등을 초래하였다. 다음번에 특구 정부가 23조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바람직한 입법 과정을 따르고 좋은 법학 의견을 참고해야 한다. 관(官)과 민(民)이 함께 기본법의 요구에도 부합하며 국가 안전과 홍콩 법치 자유의 전통을 두루 고려한 좋은 법을 만들게 된다면, 그 때가 되어 모든 시민들은 자연히 지지하게 될 것이다. 홍콩 시민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 좋지 않은 법의 제정이지 기본법23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23조와 보통선거라는 두 가지 큰 항목은 지금 이미 내용은 대체로 갖추어져 있으나 규모가 작은 건축 구조의 시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사악한 세력은 바로 사소한 부분에 있으며 지혜와 전술을 가지고 완성해 가는 것이 특별히 요구된다. 그러나 기본법을 공손히 받든다면, 홍콩은 결국 순차적으로 차츰 과도기를 넘어서게 되고 불확실한 계기를 종결시키게 될 것이다.
2047 미완의 실험 - 기본법은 홍콩이 2047년까지 불변이라고 밝히 규정
반환 후 10년 간, 홍콩 특구의 체제, 통치지도 사상 그리고 내부 문제는 많은 부분에서 80년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따라서 지난 10년 간은 반환 전 10년과의 단절이라기보다 오히려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中․英 공동성명"과 "기본법"의 구상과 제대로 부합한다. 80년대의 홍콩제도를 보존하여 1997년 이후 50년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양자(兩者)가 역점을 두고 있기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역경제에 변화가 일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80년대에 이룩한 성공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과거 20여 년 간의 경제 편식증과 청인췐(曾蔭權) 홍콩 특구 행정장관이 언급한 심층적인 문제가 잠복기를 거쳐 발병기에 이르렀을 수도 있고, 우리가 중국과 세계화의 새로운 환경에 부응하여 시대와 발맞추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어쩌면 우리는 애초에 홍콩의 성공적인 경험, 특히 정부가 담당해야 할 역할을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정부 관료와 경제 엘리트들이 이미 영국 식민지시대에 내재화한 수많은 편견들은 현재 홍콩 특구 정부의 지도사상에 여전히 잔재해 있으며, 이는 홍콩의 자기 정체성 이해를 왜곡시키고 또한 특구 정부가 홍콩에 부합한 발전모델을 도출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
매년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은 홍콩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경제지역이라고 발표하는데, 이에 대해 우리는 자기도취에 빠져 기뻐하며 대단한 일 인양 떠들어 댄다. 그런데 이 재단은미국의 전통가치와 강대한 국방을 추구하는 것을 조직의 목표로 하는 보수 단체이다. 이러한 일개 외국 단체의 칭찬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즐거워할 가치가 진정 있는 것일까? 이 재단은 한술 더 떠서 홍콩에 대해 경고를 한다. 만약 자유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종파의 경제 교조를 충실히 따르지 않는다면 홍콩을 끌어내리고 싱가포르에게 1등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다. 싱카폴은 여러 방면에서 홍콩과는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직접적인 경제 간섭으로 이름이 높고, 공업정책에서는 공유기업도 금기사항이 아니며, 세비는 홍콩보다 높고, 증권에 대한 감독은 홍콩의 개인 클럽식의 교역소보다 훨씬 엄격하다. 만약 싱가포르가 이런 상황인데도 1등을 할 수 있다면 도대체 헤리티지 재단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싱가포르가 2등에서 1등으로 올라선다면 홍콩이 싱가포르의 어떤 방면을 배워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누가 1등이 되든, 우리는 헤리티지 재단이 단지 미국의 편견이 반영된 이데올로기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미국의 경제와 정부 정책조차도 이 이데올로기의 기준에 따라 운영된 적이 없으며, 더욱이 홍콩의 이익을 위해서 고안된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이를 근거로 경박한 쇼를 하며 허장성세(虛張聲勢)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를 일과성 해프닝으로 여겨서도 안 될 것이다. 잘못하면 다른 사람이 속이지 않아도 스스로를 속이게 되어, 조직력을 갖춘 외국 세력에 기대어 자신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스스로 가야할 길을 가지 않으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게 되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은 지역문제이다. 지역 내이든, 지역 간이든 경쟁은 격렬할 것이며 홍콩은 이미 화남(華南)의 지역적 장점을 독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는, 지역 간 협조를 통해 동반성장을 도모하거나 아니면 옆집의 밥그릇을 빼앗아야만 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특구 정부는 현재까지 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대형 다리를 건설하여 주강(珠江) 삼각지의 서쪽과 동쪽 지역을 잇겠다는 대형 프로젝트를 예를 들어 지역 전체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가장 바람직한 교량 건설 지점은 주(珠)삼각의 중부 유역일 것이다. 즉 광둥 당국이 제안한 중산(中山) 동부에서 심천 서부를 가로 질러 철도 운수를 포함하는 심중(深中) 대교를 말한다. 완공시간이 단축되며 환경문제도 비교적 적고, 예상 비용은 홍콩․주(珠)․마카오 대교의 1/3에 불과하다. 게다가 홍콩, 주(珠), 마카오 대교는 차량 운행만 가능하고 철도 운수는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홍콩은 물류 독점을 탐내고 있다. 역대 특구 정부와 특수이익 집단의 조작으로, 현재 중앙 정부가 결정을 내리고 광둥성이 이를 받들어 심중 대교 안(案)은 거부되고 특구 정부의 치적 프로그램인 홍(港), 주(珠), 오(澳) 대교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자금 문제로 차일피일 미뤄지고는 있지만 일을 막기에는 각 분야 높은 분들의 체면 문제도 있을 것이고, 배후에서 이 사업으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이미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처럼 현 단계에서 지역 전체의 입장에서 바른 소리를 해댄 다면 홍콩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욕을 먹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진정으로 홍콩의 이익에 위배되는 것일까? 만약 대교건설이 성공한다면 많은 수의 차량이 이용하게 될 것이고 그중 일부분은 화물차가 될 것이며, 홍콩은 환경문제와 교통체증이라는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는 기존의 홍콩 특구 서부의 심각한 공기오염과 교통체증 문제를 악화시킬 것인데 이것이 어찌 홍콩 전체의 이익을 훼손치 않을 수 있을까? 모래보다 곱고 진흙보다 거친 침적토(silt)가 주삼각의 배수문제에 장애가 된다든지, 중화(中華)의 흰 돌고래의 생태권이 위협을 받게 된다든지 등등의 환경문제의 고려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도대체 홍,주,오 대교 프로젝트의 환경 및 교통 가능성 평가가 어떻게 통과되었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말은 여전히 뛰고, 춤도 여전히 춘다(馬照跑舞照跳)"
금년 6월 초순, 홍콩 법률협회는 결성 100주년을 기념하여 두 개의 행사를 거행했다. 100주년기념 경마대회와 100주년 기념 댄스파티로, 이에 대해 홍콩의 <문회보>(文匯報)는 "법률협회 경마와 댄스로 100주년을 기념하다."라는 기사제목을 실었다. 수많은 현지인들에게는 "말은 여전히 뛰고, 춤도 여전히 춘다."라는 말은 홍콩이 반환되고 난 후 평온한 시기에 가장 유행하던 표현이다. 대영제국기가 내려가고 대신 오성홍기와 자형화기(紫荊花旗, 홍콩특구의 구화)가 휘날리는 모습은 홍콩이 지난 10년 간 변함없는 모습을 증언하고 있으며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반환 10주년을 맞아 세계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 홍콩은 여전히 머나먼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과거 식민지였던 홍콩은 비록 작은 지역이지만 경영을 하기에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수많은 긴박한 일들이 홍콩을 기다리고 있다: 기본법의 시행, 행정장관과 국회의 보통선거 실현, 특구정부의 자주성과 정통성(legitimacy) 강화, 정부 관료와 경제 엘리트가 식민지시기에 흡수한 수많은 편견들의 제거, 홍콩 스스로의 방식과 문제의식 구축, 홍콩에 부합한 발전 모델 찾기 등, 홍콩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실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홍콩인의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아직 멀다.
출처/ 亞洲週刊 21권 24기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