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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28  통권 102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6974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비련의 여류시인 어현기(漁玄機)
값 진 보물은 구하기가 쉬우나,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이를 얻기는 이리도 어렵구나!


여류시인 어현기(漁玄機)

어현기(漁玄機:843-868)는 당(唐) 말기(末期)에 활동한 유명한 여류시인이다. 당대를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의 4시기로 시대를 구분하는데 중당의 여류시인 설도(薛濤)의 뒤를 이어 만당에는 어현기가 있다.
어현기는 본래 수도 장안(長安)에서 창기(娼妓)의 딸로 태어나 기녀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고, 시에도 능하였다. 5세 때 이미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 원미지(元微之) 등의 시를 암송했다. 13세에는 ‘어가소녀시(魚家少女詩)’를 지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15세 때는 당시의 호사가들이 그녀 시를 필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니 그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자(字)는 유미(幼微) 또는 혜란(惠蘭)으로 불리었으며, 현기라는 이름은 그녀가 나중에 도교사원 함의관(咸宜觀)에서 여도사로 활동할 당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민출신의 어현기와 관료 온정균
어현기가 장안의 관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수려한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시를 잘 지었기 때문에 많은 관료와 문인들이 그를 찾아와 교류하였고, 그로 인하여 명성이 장안에 자자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특히 당시 저명한 시인 온정균(溫庭筠:812-870, 본명은 온기(溫岐), 자(字)는 비경(飛卿))과의 교류가 많았다. 어현기가 온정균을 처음 만난 것은 15세였고, 온정균은 47세였다. 어현기는 온정균을 대시인으로서 존경하였고 온정균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과 시재를 칭찬하며 사랑하고 아꼈다. 그 결과 온정균은 만당 기녀시인 어현기와의 염문으로 유명하였고, 어현기도 당대 최고의 시인과 자연스럽게 교분을 가지며 많은 시를 쓰면서 지도를 받았다. 어현기가 온정균을 대상으로 쓴 연정의 시는 많이 남아 있으나, 온정균이 어현기를 상대로 하여 쓴 시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귀족 출신인 온정균이 기녀와의 관계를 은폐하려는 사대부적인 기질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온정균과의 교류가 그녀의 시재(詩才)를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그의 명성을 알리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억과의 만남
온정균의 친구가운데 이억(李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는 온정균보다 10살이 적었지만 글짓기를 좋아하는 문인관료였다. 홍문관(弘文館) 학사로 있던 이억은 온정균의 집에 놀러와 소문으로만 듣던 어현기의 시를 직접 접하고 크게 경탄하였다. 온정균은 3년 간 시를 가르쳐 온 어현기를 친구 이억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이억은 곧바로 선물을 들고 어현기를 찾아갔다. 어현기의 부모도 준수한 이억의 호의에 감동하였다. 당시 그녀는 18세, 꽃다운 나이였고 이억은 40세 전후의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 후 이억은 그녀가 있는 기루(妓樓)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녀를 자주 만나면서 자신의 별장에도 초대하여 함께 시를 지으며 교류하였다. 이억이 비단 옷 등 선물을 사서 보내면 어현기는 시를 써서 답례하기도 하면서 서로 사귀게 되었다. 얼마 후 승진하여 요직에 앉은 이억은 어현기의 몸값을 지불하고 아내로 맞이하였다. 정부인이 있던 이억은 그녀를 첩으로 맞이한 것이다. 어현기에게는 비록 정부인이 아닌 첩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억의 정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녀의 시기 질투는 실로 엄청났다. 어현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억은 어현기와 헤어지면서 도사 조동사(趙?師)에게 그녀를 부탁했다. 어현기가 이억과 헤어지게 된 것은 정부인의 질투도 있었지만 이억의 여러 집안 어른들이 기생출신의 천한 여자를 명문 집안에서 맞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도사가 된 어현기
그녀는 이억과 헤어지고 장안으로 돌아와 도교사원인 함의관(咸宜觀)에 들어가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도교적 색체를 띤 ‘현기(玄機)’라는 이름도 이때 얻어진 것이다. 도교가 성행하던 당대에는 많은 도관(道觀)이 곳곳에 세워졌고 남녀불문하고 출가하여 도사가 되는 일이 많았다. 궁정의 공주나 궁녀가 출가하여 여도사가 되는 예도 적지 않았다. 
당시 여도사들은 도교에서 성관계를 통하여 선인(仙人)의 도를 얻을 수 있다는 이른바 방중술(房中術)을 근거한 생활도 하고 있었다. 당초 도교에서는 성욕을 금지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기술을 터득하여 성관계를 하면 도리어 만병이 치유되고 수명이 연장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방중술이 선천적으로 체내에 있는 원정(元情:기초 물질)·원기(元氣:에너지)·원신(元神:제어하는 정신)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방중술의 주된 목적은 성관계를 통하여 환정보뇌(還精補腦:정기를 환원시켜 두뇌를 보강함)하는 데 있다고 보고 여성도 방중술에 능통한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방중술이라는 명목으로 남녀가 접촉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료나 문인들도 기방보다는 도관에 들러 여성들을 대하고 시문을 교류하는 것을 선호하여 여도사가 있는 도관은 문인들의 사교의 장이 되었다. 여도사인 어현기는 이런 도관에서 독특한 위치에서 있으면서 찾아오는 많은 문인관료를 만나 시문을 짓고 연정에 대한 감정도 살렸던 것이다.

 

출생 배경은 그녀의 문학세계를 더욱 발전시키고
그녀는 천한 창기의 출신이었지만 그것은 도리어 그녀의 시의 세계를 폭넓게 만들었다.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대부분 관료 집안 출신의 여성들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엄격한 유교적 교양을 익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유교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엄한 교육을 받았고 그 결과 시를 지어도 항상 일정한 틀 속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현기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는 창기의 딸로서 처음부터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랄 때도 그런 틀 속에 얽매기를 강요받지 않았다. 도리어 틀에서 뛰쳐나와 다른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두꺼운 벽을 가볍게 넘다들 수가 있었고 자유분방한 사고로 시를 지어 나갔기 때문에 다른 여류 시인과는 달리 특출한 존재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어현기는 장안뿐 아니라 한양(汉阳), 무창(武昌), 악천(鄂川), 구강(九江) 등지를 자유롭게 유람하면서 느낀 감정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 때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가 지은 시 50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전당시(全唐诗)』에 48수, 『북몽쇄언(北夢琐言)』,『당재자전(唐才子傳)』에 몇 수가 전해지고 있다.
이억에게 보낸 시 가운데 다름과 같은 시 구절이 있다.

 

蒐日遮羅袖(수일차라수) 늦잠자고 나 해 보기 부끄러워 명주 옷소매로 얼굴 가리고
愁春懶起粧(수춘나기장) 봄날 시름겨워 일어나 화장하는 일도 게을리 하고 있도다.
易求無價寶(이구무가보) 값 진 보물은 차라리 구하기 쉽고
難得有心郞(난득유심랑)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오히려 얻기가 어렵구나.
枕上潛垂淚(침상잠수루) 밤으로 침상머리에서 눈물 흘리고
花間暗斷腸(화간암단장) 낮에는 꽃밭에서 남몰래 애간장 태우도다.

 

옛 남편이었던 이억을 그리며 “값 진 보물은 차라리 구하기 쉽지만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오히려 얻기가 어렵다”고 개탄하면서 많은 남성들을 상대하지만 참된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26세의 짧은 인생 
이억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날개 꺾인 새의 신세가 되어 홀로 장안에 돌아온 그녀의 마음을 누가 알아 줄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장안의 함의관에서 수행을 쌓고 시를 지어 외로움을 잊으려 노력하였고, 많은 관료와 문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신세를 달래려 하였지만 결국은 방탕한 생활로 치닫고 말았다. 한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충격이 그녀의 감정과 영혼에 실로 엄청난 타격을 준 것이다. 실연의 상처로 인해 그녀는 광적으로 남자를 소유하려 했다.

그녀가 함의관에서 지내던 어느 날 진위(陳韪)라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어현기는 새로 만난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며 다시 행복을 얻으려고 꿈꾸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그 꿈도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그녀의 시녀 녹교(綠翹)와 진위가 정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이성을 잃게 되었다. 어현기는 녹교를 채찍으로 무참히 때려 죽게 만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놀란 그녀는 녹교의 시체를 함의관 후원에 아무도 모르게 묻었다. 어현기는 진위와 주변사람들에게 녹교가 짐을 싸서 함의관을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함의관에 찾아온 한 사람이 후원에서 바람을 쐬다가 땅을 판 흔적과 주변에 새끼 끈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시종에게 말했고 시종은 그것을 아졸로 있는 형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 아졸은 수년전 진위가 이른 새벽에 함의관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어현기에게 협박하여 돈을 얻어내려 다가 어현기가 웃어넘기면서 아무 반응이 없자 자존심이 상해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자이었다. 그는 동생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녹교가 실종되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함의관에 들어가 삽으로 땅을 파보았다. 바로 녹교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장안의 시장인 경조윤(京兆尹)으로 있던 온장(温璋)은 아졸이 호소한 내용을 근거로 조사에 나서 어현기를 취조하였다. 어현기도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자신의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였다. 사건 당사자인 진위도 불러 조사하였으나 그는 사정을 모른다하여 석방되었다.

어현기가 살인하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문은 즉시 온 장안에 퍼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억을 비롯하여 많은 조야(朝野)의 인사들은 그녀의 재주를 아까워하면서 구명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사형집행을 받고 26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유교적 풍토에서 ‘덕행이 우선이고, 문장은 말이다.’ 라는 본말사상(本末思想)에 입각하여 처리되어 덕행이 없는데 어찌 시나 문장만 좋다고 그를 추앙할 수 있느냐는 판단에서였던 것이다

 

기녀와 여도사가 지니는 문화사적 의의
기녀와 여도사들은 어느 시대나 시문, 음악, 기예 등에 접할 수 있는 위치에서 지배층과 접하면서 일정한 기예와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황제나 고관명사 시인들과 교류하면서 사회 문화를 지탱하는 기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기녀나 여도사들은 단순히 문화를 향수하고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흐름을 창출해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문화의 중계자와 발신자의 기능을 발휘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현기도 이런 기능을 담당한 당말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어현기는 26년 이라는 짧은 일생을, 그것도 살인의 죄명을 쓰고 세상을 떠난 비극은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중국 여류시인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녀의 주옥같은 작품성 때문이다. 당시 봉건사회에서 사상적으로도 그 엄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많은 여류시인의 폐쇄된 작품에 비하여 그녀의 솔직하고 대담한 묘사와 인간 본연의 감정이 표현된 그녀의 주옥같은 작품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실로 그녀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자연을 노래하고, 문인들과 세사(世事)를 논하던 진보적인 여성이요, 저명한 여류시인이었다. 그러나 실연의 상처로 인해 자신의 운명을 재촉하여 26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비련의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음은 마냥 아쉽기만 한 일이다.

 


전순동 교수 |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 본지 집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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