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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6.28  통권 102호  필자 : 유은식  |  조회 : 5112   프린트   이메일 
[선교나침반]
달라이라마, 그는 과연 티베트에서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지금 99호부터 티베트의 역사를 통해 그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과정과 그들과 뗄 수 없는 관계인 불교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주 특이한 종교와 정치체제의 중세적 결합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호에는 싸지아파로부터 승려가 정치 세력화하여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를 모두 통치하는 이른바 정교합일의 체제가 어떻게 굳어졌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나중에 등장한 겔루그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이때 이미 굳어진 활불(活佛)의 전세(转世)제도에 의해 티베트 전 지역은 라마라고 하는 특수한 계층들에 의해 종교와 정치, 경제가 다 잠식당한다. 그래서 달라이라마와 반챈라마(지난 호에는 중국어의 음역으로 빤찬라마라고 표기했음)를 정점으로 승려가 신이 되며 정치적인 통치권자도 되는 신권통치 국가가 된다. 이번 호에서는 겔루그파의 양대 활불제도인 달라이라마와 반챈라마에 대해 좀 더 알아보면서 티베트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한다. 

 

달라이라마와 구쉬리칸
쫑카빠가 1409년 가딴사(甘丹寺, 간덴)를 세우고 그의 제자들이 1418년 쌔라(色拉寺, 세라), 1416년 지뻥(哲蚌寺, 드레풍)을 세우며 겔루그파는 시작된다. 15세기 중엽 동몽골의 잔여세력이 칭하이호(靑海湖)에 와서 근처 티베트인들을 몰아내고 점령하였는데 1559년 몽골 투메트부족(중국어로는 土默特(투모터)의 알탄 칸이 칭하이성에 부대를 끌고 와서 이들을 몰아낸다. 1576년 당시 겔루그파의 대표였던 쏘남지암쵸(한국에 번역된 책에서 소남가쵸라고 부른다)와 알탄 칸이 치압치아(지금의 꽁허(共和)현)에서 만나는데 몽골족이 티베트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신 겔루그파는 몽골의 군사적 힘을 빌려 티베트 내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자 했다.

  여기서 알탄 칸은 쏘남지암쵸에게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주는데 '달라이'라는 것은 몽골어로 바다라는 뜻이다. 라마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밝힌 대로 고승이나 활불을 뜻한다. 그러니 '달라이라마'라는 말을 풀어보자면 '바다와 같은 큰 지혜를 지닌 라마'라는 뜻이 된다. 달라이라마는 몽골어와 같은 뜻의 티베트어 지암쵸(일반적으로 '가쵸'라고 번역됨)를 모든 달라이라마의 법명 끝에 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지암쵸라는 이름은 지금 일반인들도 이름 끝에 종종 사용한다. 티베트어 교수가 내게 지어 준 티베트어 이름도 끝에 지암쵸가 붙여 있다. 쏘남지암쵸는 이 큰 이름을 자신만 받기가 송구하여 자신의 스승을 2대로, 그 스승의 스승을 1대로 하고 자신을 3대 달라이라마로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달라이라마가 지금까지 14대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쏘남지암쵸의 뒤를 이은 4대 달라이라마는 몽골족인데 이런 정치적 거래를 한 역사적 배경과 연관이 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겔루그파가 티베트의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1636년 우루무치 일대에 있었던 서몽골 호쇼트 부족의 한 족장 구쉬리칸(固始汗)이 칭하이호에 와서 이곳의 몽골족을 몰아내었고 당시 겔루그파는 까마까쥐(噶玛噶举)파와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다. 겔루그파는 이 몽골 세력을 끌어 들여 1637년 구쉬리칸은 암도, 캄, 윗쩡 지역에서 까마까쥐파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그 뒤로 이 호쇼트 부족의 후손들이 암도지역에 거주하게 되는데 지금껏 칭하이성에 거주하는 8만 명의 몽골족이 이들이 후예들이다. 

구쉬리칸은 1641년 라싸로 진입해서 모든 반대파들을 몰아내고 1642년 4월 5일 겔루그파가 드디어 티베트정치의 중앙무대에 등장한다. 이때가 5대 달라이라마 때이다. 후대 사람들은 그래서 5대 달라이라마를 위대한 5대라고 부른다. 이 겔루그파 정권을 가딴 푸졍정권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달라이라마는 종교의 지도자요 왕으로서 윗쩡과 암도, 캄과 아리 등 지역에 이르기까지 티베트 지역을 통일하여 다스리게 되었다. 이렇게 달라이 정권은 구쉬리칸의 군사능력으로 적수를 물리치고 정권을 쟁취했다. 구쉬리칸은 달라이라마를 매우 숭배하고 존경해서 신처럼 모셨다고 하지만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구쉬리칸이 티베트 내정에 간섭을 하게 되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당시 행정사무를 보는 정부수뇌(이를 중국어음역으로 띠쓰(第司)라고 함)를 두었는데 처음 몇 사람은 구쉬리칸이 임명했을 정도로 몽골 호쇼트 부족은 겔루그파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655년 구쉬리칸이 죽고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4대 띠쓰부터 5대 달라이라마가 임명하게 된다. 1679년 5대 띠쓰로 27살밖에 안 된 썽지지암쵸(상게가쵸라고 쓰고 있다)를 임명하고 몽골 호쇼트의 권력을 제한하고 띠쓰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여러 조치들을 취한다.  

이런 권력 다툼의 현상은 애초에 알탄 칸과 쏘남지암쵸의 결탁, 구쉬리칸과 5대 달라이라마와의 결탁에서 예견된 것이었다. 자신의 백성들을 통치할 권리를 외세를 등에 업고 얻은 권력들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안팎으로 정쟁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3년 뒤인 1682년 5대 달라이라마가 죽었을 때 당시 썽지지암쵸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이런 티베트와 호쇼트 몽골족 간의 첨예한 대립관계 사이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5대 달라이라마가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호쇼트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을 생각해서 15년간 이 사실을 숨겼다. 어쩔 수 없이 1697년 이 사실을 밝히고 1705년 그는 호쇼트의 라짱 칸에 의해 피살되었고 티베트에서 호쇼트의 지위는 더 확고해졌다. 그 뒤로 청나라도 개입하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달라이라마의 등극
이쯤에서 달라이라마를 뽑는 과정을 한번 보자. 티베트인들은 한 활불(지난 호 참고)이 죽으면 그 영혼이 그 뒤에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로 들어간다고 본다. 이렇게 함으로 각 사원마다 지주의 계승문제를 해결하였다. 이것이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티베트불교를 더욱 신비스럽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있다. 활불로 알려진 이들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면 먼저 달라이라마의 선택 경우는 섭정이 생기고 다른 라마들의 경우는 달라이라마가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딴, 쌔라, 지뻥 등 3대 사원의 라마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어린아이를 찾으러 갈 방향과 지역에 대해 점을 친다. 

라싸의 동남쪽에 위치한 거룩한 호수로 알려진 라모라쵸(拉姆纳错, 암도음역으로 샤무쵸라고 하는데 '거룩한 어머니'라는 뜻)로 가서 기도하며 어린이가 태어난 동네와 집에 대해 환상을 구하고 특징을 찾는다. 점을 치면서 호수가 가르쳐 준 대로 위원회의 대표들이 찾으러 나선다. 그리고 비슷한 곳을 찾으면 아이가 출생할 때 무슨 징조가 나타났었는지 알아보고 어린아이의 신체나 지혜 등에서 특출 난 점들을 찾는다. 여러 명의 후보자들이 나오면 전대(前代)의 활불이 사용하던 물건과 다른 물건들을 섞어 놓고 유물을 분별해내는지 실험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달라이라마나 3대 사원의 활불들이 결정한다. 달라이라마의 경우는 섭정정부가, 다른 라마들의 경우는 달라이라마의 인가를 받아 공포하고 수계를 한 후 법명을 주고 등극을 한다. 

이런 식으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모든 활불들을 찾아 계승하였는데 1793년에 만주족의 청나라 건륭황제가 금으로 된 병을 주고 그 안에 후보 어린이 이름과 생일을 써 넣고 활불이 7일을 기도한 후 추첨하듯 뽑아서 결정하라고 하였다. 이것을󰡐금병추첨제󰡑라고 한다. 그것도 모든 활불이 아니라 몇 중요한 활불에 대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아 활불을 통제, 조종하려는 의도라고 장족통사(藏族通史)를 지은 더롱(德荣)은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10, 11, 12대 달라이라마와 8대, 9대 반챈라마가 이런 식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사원에 1명 이상의 활불이 있는데 승려가 몇 백 명인 중간규모의 사원에는 3~10명 정도의 활불이 있고, 승려가 1,000명 이상 되는 대 사원에는 10명에서 50명까지의 활불들이 있다.
 
반챈라마
겔루그파에서 가장 큰 활불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진 달라이라마이고 다음은 가딴쳐빠 인데 더롱(德荣)은 이 활불을 겔루그파의 교주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 다음이 아미타불의 화신이라 하는 쟈선룬뿌사의 최대 활불인 반챈라마이다. 반챈라마가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4대 달라이라마 시절 티베트가 정치적으로 불안할 때 쟈선룬뿌사의 주지가 티베트지역의 형세를 안정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가 4대 달라이라마가 죽고 5대 달라이라마가 어릴 때 겔루그파의 교무를 사실상 주재하였다. 그래서 서몽골 호쇼트가 티베트를 통제한 후 그에게 '빤찬보커뚜어(중국어음역)'라는 명칭을 주었다. '빤'은 범어(梵语) '반'의 중국어음역으로서 '학자'를,  '찬'은 티베트어 '챈'의 중국어음역으로서 '크다'는 뜻을 나타냄으로 '빤찬(반챈)'은 대학자의 뜻이다.  '보커뚜어'는 몽골어로서 예지가 있는 영웅에게 주는 존칭이다. 중국인들은 보커뚜어라는 말을 빼고 빤찬이란 중국어 음역 뒤에 라마를 붙여서 빤찬라마(班禅喇嘛)라고 한다. 그가 4대 빤찬라마가 되고 자신의 스승들을 1, 2, 3세로 추인하였다. 1713년 청 왕조는 5대 '빤찬'에게 '빤찬어얼더니'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어얼더니'는 만주어로서 '진귀한 보배'라는 뜻이다. 이것은 티베트어 반챈어런뿌채(진귀한 보배 같은 대학자)를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 '빤찬라마'라는 중국어음역을 버리고󰡐반챈라마󰡑라는 티베트어 음역을 사용하고 있다. 

달라이라마는 1578년부터 현재 제14대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4대가 몽고 투메트족에서 나왔고 7, 9, 10, 11대가 캄에서, 나머지는 윗쩡에서 나왔다. 현재의 달라이라마 14대는 암도 지역 첫 달라이라마인 셈이다. 반챈라마는 짜선룬뿌사가 있는 시가체나 그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고 10대에서 암도 출신이 처음 나왔다. 캄 출신은 한 사람도 없다. 

14대 달라이라마는 1934년 칭하이성 핑안(平安)현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이름은 라무떵주(拉木登珠)이다. 1933년 13대 달라이라마가 원적한 후 당시 섭정 러쩐(熱振)활불이 파견한 고승들이 1937년 칭하이에 와서 2년 동안 찾아다니다가 라무떵주를 발견하였고 당시 마뿌팡(马步芳) 정권(국공내전 혼란기 칭하이 일대를 통치하던 회족정권)의 방해 가운데 1939년 7월 15일 칭하이를 출발하여 10월 7일 라싸로 들어와 1940년 2월 22일 달라이라마의 자리에 올랐다. 러쩐이 그에게 흣딴쩐지암쵸라는 법명을 주었다.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지금껏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반챈라마는 1645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10대 반챈라마는 1938년 칭하이성의 쉰화(循化)현에서 태어났다. 1937년 9대 반챈라마가 죽은 후 칭하이에서만 후보자 십 수 명을 발견하였고 여러 실험과 점을 거쳐 결정하고 1943년 타얼쓰(塔尔寺)로 이주한 후 라졍곤빠(拉卜楞寺, 라뿌렁쓰)에서 계를 받았다. 당시 티베트에서는 이 새 반챈을 티베트로 데려 가려고 하였으나 티베트과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가지 못하다가 1949년 국민당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새 반챈으로 선포되었고 타얼사에서 등극식을 가졌다. 당대의 두 라마는 모두 칭하이 사람이다. 즉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맞은 격동의 50년대 티베트의 중요 활불의 자리에 오른 두 사람이 다 칭하이성 암도 출신이다. 이것은 티베트 하면 지금 중국 행정 구역의 시짱(西藏)자치구만 생각하는 많은 외국인들로 하여금 티베트의 영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반챈라마는 달라이라마가 망명한 이후 중국정부에 의해 티베트 통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중국 불교협회 부회장, 정치협상회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나중에는 권력을 사용하여 중앙정부의 자금을 티베트로 유입하여 교육사업 등에 많은 투자를 끌어내는데 공헌하였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가 1989년 1월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그를 이용하여 망명 중인 달라이라마를 제외하고 그와 함께 티베트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중국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자연히 11대 반챈라마를 정하는 문제로 티베트망명정부와 중국 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그의 사후 중국정부는 1995년 후보자 28명을 찾았다고 발표했는데 그 해 3월 14일 달라이라마가 먼저 인도에서 찾아낸 6세 된 데둔쵸키니마를 11대 반챈라마로 발표하자 중국 정부는 불법임을 발표하고 같은 해 11월 10일 다른 빤찬을 찾았다고 발표하여 12월 8일 시가체(日喀則)의 짜선룬뿌사에서 등극식을 했다. 한편 달라이라마가 선정한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중국에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11대 반챈라마가 두 사람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샤머니즘인가? 종교인가?
달라이라마의 전세제도가 이제는 중국정부에 의해 이용당할 처지에 있다는 것을 경험한 14대 달라이라마는 얼마 전 '내가 죽으면 15대를 세우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고육지책에서 나온 선언이라고 보여 진다. 그의 말대로 지켜질 지 의문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라마의 전세제도나 티베트불교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낮은 등급의 라마의 전세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아가 활불전세제도가 전면 부정될지도 모른다. 라마가 전세하지 않고도 티베트불교는 유지될 수 있을까? 

사실 아직까지 티베트 사람들이 달라이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를 하나의 신으로 모시고 사는지, 도대체 어떤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들과 만나면서 느낀 것들을 근거로 논하자면, 종교는 삶이지 철학이나 논리는 아니다. 촌에서 만나는 아주머니들은 이 부분에 무슨 논리를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냥 조상 대대로 그래 왔으니까 그 앞에 절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 엄격히 말하면 달라이라마나 반챈라마에게가 아닌 단순히 탑을 돌며 절할 뿐이다. 향불을 피우며 여신 죨마를 찾을 뿐이다. 이런저런 귀신을 찾을 뿐이다. 즉 그들의 생활로 들어가면 티베트불교는 샤머니즘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렇다면 달라이라마가 어떻게 되든 일반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지금의 티베트 정체성을 이끌어 가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이다. 현 달라이라마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만약 15대 달라이라마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들에게는 신이 너무 많다. 이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달라이라마가 티베트를 이끌어 가는 절대적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와 관계없이 티베트불교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유지되어 갈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티베트에서 그들과 살면서, 그들의 종교행위를 보면서 느끼고 내린 결론이다.


지금도 사실 달라이라마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일단 티베트 사람들이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또 중국을 대하는 입장에 있어서 달라이라마가 유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강경파들이 달라이라마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과거에도 달라이라마가 절대적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쪽에서는 늘 반대파들이 있었던 것이다. 또 티베트 안에 겔루그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이 20%가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달라이라마가 겔루그파 신도들에 비해 영향력이 크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정치적, 종파적 이유들로 인해 점차 달라이라마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으로 본다. 

반챈은 말할 것도 없다. 10대 반챈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리워한다. 그의 종교적 영향력 보다는 그가 중국 공산화 이후 나름대로 자신의 중국정부 내에서의 지위를 적절히 이용해서 중앙정부로부터 티베트에 자금을 끌어들인 공로 때문으로 보여 진다. 지금도 시닝에 있는 칭하이성 정부 직원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반챈라마의 친척들, 식구들이 살고 있다. 계급에 따라 아파트 평수를 결정하여 제공하는 중국사회에서 그들은 가장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 단지 안에서 자주 만나는 그들은 중국의 돈 많은 관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 내에서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공산정권의 전략이겠지만 반챈은 더 이상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적 무게를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 중앙의 자금을 끌어들여 학교를 지어 주고, 마을을 부유하게 해 준 CEO정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나마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도 아니고 그의 뒤를 이었다는 11대 반챈은 두 명이나 나왔고 중국 정부가 인정한 반챈은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티베트인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원에 가면 여전히 10대 반챈의 사진만 걸려 있을 뿐이다. 나이가 어려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성인이 된다 해도 정부의 의도대로 티베트 사람들 마음속에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두 라마의 영향력이 모두 사라질 지도 모른다.  

이 두 라마의 영향력이 약화된다면 티베트불교는 더욱 샤머니즘의 형태로 변화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다가 티베트가 더욱 외부에 개방되면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젊은 지식인층으로부터 개혁의 소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글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물으며 시작하였다. 자국민 통치권을 장악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정치적 인물로 시작해서 민족을 종교의 우상으로 묶으려는 집단의 도구로, 전세제도를 통해 신적 존재의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은 달라이라마가 민족과 고향, 자신의 정치, 종교적 무대 라싸(拉薩)를 떠난 특이한 상황에 있다. 나아가 11대 반챈라마의 선발문제를 통해 위기를 느낀 14대 달라이라마는 정치적 이유로 스스로 달라이라마 제도를 포기하려는 중요 국면에 있다. 그가 이미 70을 넘겼기에 머지않은 장래에 티베트불교는 어떤 형태로든 큰 소용돌이를 겪을 것이다. 여기에 중국정부가 어떤 역할을 할지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티베트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도록 섭리하실 것을 기도한다.

 






유은식/ 전 중국 티베트 선교사, 현 산돌성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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