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주」를 알게 된지도 벌써 10년 이상이 지났다. 그리고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중국을주께로(이하 중주)」는 오랜만에 만나도 결코 서먹함이 없는 그런 친구가 되었다. 죽마고우처럼 ……
언제였던가! 누군가가 「중주」를 건네주었다. 뒤 표지였던 것 같은데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중주」를 처음 본 장면으로 기억된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때 나 역시 중국을 품고 기도하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로 틈틈이 중국어문선교회를 방문했다.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가면 기분이 좋았다.
「중주」정기구독을 했던 적도 있었다. 직장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왔을 때 책상머리에 놓여있는 「중주」가 눈에 띠였다. 이불 위에 몸을 던지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 보면 어느새 피로가 달아날 뿐만 아니라 비전이 다시 살아났다. '그렇구나. 중국의 형제들이 이렇게 주님을 믿게 되고, 핍박을 당하여도 여전히 그분을 의지하는구나!'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그는 중국에 가기 전부터 현지적응을 위해 일부러 딱딱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는데, 나는 어떻게 준비하여야 할까? 주님 제 길을 인도하소서'
그러다가 세월이 흘렀다. 「중주」를 까맣게 잊고 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서 다시 만난 「중주」, 너무나 반가워서 그 자리에서 사고 말았다. 「중주」도 내가 보고 싶었을 테다. 미안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친구한테도 읽어보라고 주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어느덧 주님이 주신 비전대로 중국에 왔고, 그분의 인도하심으로 중주와 함께 했던 배필을 아내로 맞게 되었다.
어떤 글을 쓸 때 나는 쉽게 생각이 떠오르고 곧바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대신 아내는 내가 쓴 글을 꼼꼼히 교정한다. 띄어쓰기, 문법적으로 잘못된 문장, 독자가 읽을 때 잘 이해되지 않을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다. 교정을 본 후에 그 글을 보면 역시 좋다. 단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내용이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여보, 나 그 시점에서 옥상에 올라가지 않고 평지 조금 높은 곳에 있었어" 하면, "그래요?" 그래도 ‘옥상에 올라갔다’라고 하는 게 독자의 이해 면에서는 쉽고, 또 본문의 내용을 크게 해치지 않아요. 정 이상하면 다시 바꿔요.그래서 아내의 교정 후 다시 내가 필체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나면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아내가 교정을 보는 동안 내가 아이를 돌보면서 지쳐간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쯤이면 끝났겠지'라고 하면, 아내는 아직 절반도 못했단다."좀 빨리 하면 안 돼?"라고 투덜대지만 속으로는"직업병이군!"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어본다. 지난 시간 아내가 「중주」를 위해 밤을 새며 고생했을 일이 눈앞에 선하다.
지금도 우리는 「중주」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늦은 밤, 홀로 사무실에 남아 반복되는 글자의 홍수 속에 피곤함과 적막함, 그리고 때로는 외로움을 느낄 편집진들, 그것도 모르고 "아직 안됐어?"라는 질문 속에 기다리고 있을 독자들, 바쁜 일정 중에 밤을 새우며 원고마감 기한을 맞추고자 애쓴 필자들, 이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얻은 유익한 정보와 영감으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현장의 사역자들, 이익이 남는 장사도 아니지만 천국의 보화를 위해서 하나 둘씩 자신의 귀한 것을 팔아 그 땅을 샀던 사람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나 역시「중주」를 알게 되었고 중국을 향한 소망과 비전을 갖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이 중국의 상황도 변하고, 「중주」의 역할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장터'로서, 그리고 '언덕'으로서의 역할이다. 「중주」는 중국선교에 자신을 드린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는 터전이다. 국내외에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중국을 주께로 드리는' 이 한 목적을 위해 서로의 생각과 삶을 나누는 '장터'이다. 그리고 이제는 '중국선교'와 더불어 '선교중국'으로 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무엇인가 비비고 일어서는 특징이 있다.「중주」는 그런 언덕으로 있어왔다. 논밭에서 힘써 일하다 다시 올라와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언덕', 밭에서는 보이지 않던 저 멀리 건너편까지 전망할 수 있는 '언덕', 시대의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의 방향을 감지할 만한 '언덕', 심지어는 설령 「중주」에 실린 내용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내용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언덕이길 원한다. 앞으로도 「중주」가 계속하여 중국선교의 '언덕'이 되길 바란다.
격려와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받으면서도 해가 거듭할수록 많은 독자들이 생기고 주님의 비전이 나눠지는 그런 장터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다 보면 나처럼 「중주」와의 벗됨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
주사랑 | 중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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