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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28  통권 100호  필자 : 조재은  |  조회 : 3158   프린트   이메일 
[중국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 현 위의 인생 -


현악기의 줄은 한 줄씩 떨어져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두 줄이 붙어 있으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현 위의 인생'이란 제목을 문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은 하나의 현 위를 걷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옆줄과는 영원히 합해질 수 없는 현악기의 줄 같은 인생길을 인간은 영원히 홀로 걸어야 한다. 외줄에서 떨어질까 평생 고심하며 비틀거리며 사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줄 타는 사람을 보면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벌리거나 긴 막대를 가지고 중심을 잡는다. 외줄과 중심 잡은 막대-위에서 보면 십자가의 모양을 이룬다. 떨어지지 않고 외줄의 인생길을 안전하게 걸어가는 방법은 십자가의 길에서만 가능하다. 
‘현 위의 인생'은 눈 먼 두 사람이 눈을 뜨기 위해 천 번째 현의 줄이 끊어지도록 연주하며 일생을 보낸 사부와 제자의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눈 먼 스승과 제자의 인생을 대비하면서 중국의 변화하는 정신적 두 세대를 보여준다. 이상과 현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간적 한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상화시키며 보았다.   

사부, 노인의 시대
영화는 노인이 어렸을 적, 그의 스승이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천 개의 현을 끊으면 악기 속의 울림통이 열리고, 그 안에는 네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너의 눈을 뜨게 하는 처방전이 있다."는 유언은 소년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희망의 말이었다. 그 이후 60년 동안 눈을 뜨리라는 집념을 지니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머리에 서리가 내린 노인이다. 그의 절실한 희망은 현을 연주할 때마다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가 갈등을 멈추고, 싸움을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노인은 사람들로부터 "성자"로 추앙받으면서 노인처럼 앞을 볼 수 없는 제자 시두와 함께 지팡이를 짚고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갈등의 땅, 반목의 장소로 떠돌아다닌다. 노인의 일생은 천 번의 현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존재했다.  

노인이 시장거리를 지날 때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묻는다. “저 노인이 누구냐?"사람들은 대답하기를, "저 노인을 모르느냐?,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냐?"고 오히려 질문을 던진 사람에게 묻는다. 이 대화를 통해 노인은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는 현자, 성자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매한 이상과 강한 집념으로 혼을 담아 연주하는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위안과 안식과 평화를 주던 노인은 어느 날 드디어 천 번째의 현을 끊게 된다. 기쁨과 흥분으로 열려진 현 속에 들어있던 작은 통을 들고 한달음에 약방으로 달려간다. 60여 년을 기다려 이제 자신의 눈을 뜨게 하는 처방전이 있는 울림통을 내밀고, 그 안에 있는 처방전을 약방 주인에게 주는 순간 그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노인은 듣고 만다. 

시간이 순간 멈추고 지구가 멈춘 것 같은 절망과 허탈함으로 노인이 약방을 나와 사람으로 붐비는 시장을 지날 때, 지나가던 아기는 함박웃음을 던지고 곧 뒤 따라 어느 노인 하나가 우는 장면이 있다. 스쳐지나가는 두 사람을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가 깊다. 지나가는 아기의 웃음과 노인의 울음이 겹쳐지는 것은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인생에서는 때로는 희망이 절망이 되고 이상이 허상이었을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해준다.   
노인이 자신의 평생을 걸었던 현 속의 처방전 그러나 궁극에는 백지였던 처방전은 첸 카이거가 문화혁명에 걸었던 이상이 허상임을 깨달았던 것이 화면에 표출된 것은 아닐지…. 

모든 예술은 작가의 경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중국 영화 이야기」에 의하면, 첸 카이거 감독의 아버지는 영화감독이었고 우파로 몰려 가족들은 곤경을 겪었다. 첸 카이거는 우파라는 오명을 씻고자 문화혁명에 가담했지만 자신이 원했던 예술적 사회의 이상향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점은 현 위의 인생에서 현을 타는 노인에게서 발견된다. 천 번째 현이 끊어지면 눈을 뜨리라는 꿈,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허상’으로 밝혀졌던 노인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볼 수 있다.

노인은 더 이상 갈등을 풀고, 반목을 잠재우고, 평화를 주는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 그의 마음에 희망이 떠났으므로 평온은 사라졌다. 현을 타던 그의 손에는 이제 절망과 허탈감만이 남아있다. 그는 이제 현자도 성자도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싸우던 현장에서도 평화를 부르는 음악을 연주하는 대신 노인은 소리치며 돌을 던진다. 평화의 현을 뜯던 손에는 분노의 돌을 잡았다. 한없는 추락이다. 소망이 사라진 그의 얼굴에 오직 욕망과 분노의 모습만 있다.

황폐해진 노인은 예전부터 자주 가던 강가의 국수집을 찾는다. 그 곳은 마치 부처의 설법을 은유적으로 압축해 놓은 듯 한곳으로 국수집 옆에는 거대한 강물이 세찬 물결을 일며 끊임없이 흐르는 곳이다. 흐르는 강물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그리고 기쁨과 슬픔 등 영겁의 삶을 품고 흘러간다. 예전과는 판이하게 황폐해진 사부의 모습을 보면서 시중들던 여자가 묻는다. “당신이 예전의 그 사람인가?"라고 그리고는 슬픔과 절망감에 가득 차 있는 사부의 모습에 눈물 흘린다. 

그 곳의 주인인 지혜로운 고승에게 노인은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나는 성자가 아니라 장님에 불과하네." 고승은 웃으며 말하기를 "당신이 누구이든 인생은 연극입니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는 연극을 끝마쳐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노인이 다시 묻는다. "지금은 어떠한가?"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승은 대답한다.  비록 평생을 걸었던 이상과 희망이 흘러가는 강물 속에 물거품처럼 사라졌지만 첸 카이거 감독은 강물 위에 커다랗게 뜬 무지개를 보여줌으로써 이상이 허상으로 변해온 시대를 살았던 자신과 사람들을 위로한다. 이 위로와 희망은 사부의 제자 시두의 인간적인 욕망과 한계를 보여주며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시두, 제자의 시대
눈 먼 노인을 사부로 모시고 따라다니는 소년 시두 역시 장님이다. 눈은 멀었어도 장기의 훈수를 둘 정도로 지혜롭다. 시두는 자신을 성자화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밝게 드러낸다. 그는 자기 또래의 소녀 란슈와 사랑을 한다. 사부는 장님으로 태어난 것을 운명으로 알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허상인 천 번째 현이 끊기는 것을 바라지만 시두는 이런 헛된 꿈을 꾸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드린다. 시두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운명을 거부한다. 

시두가 그의 여자 친구 란슈와 문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눌 때 란슈가 문 위에 매달아 놓은 해바라기 씨를 시두의 머리에 뿌리는 장면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해바라기의 속성, 모든 식물이 향일성이지만 특히 해바라기는 해만을 향해서 그 얼굴을 향하고 있다.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자라나는 해바라기의 씨앗들을 란슈는 시두의 머리 위에 마치 세례를 주듯이 뿌려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태양빛을 보지 못 했던 시두는 란슈가 머리 위에 뿌려준 해바라기 씨앗들, 그 빛을 손으로 만지고 느낀다.    

노인 사부가 죽자 동네 사람들은 소년 시두를 지도자처럼 붉은 의자에 앉히고 어깨에 메고 간다. 그 모습은 어린아이를 달라이라마로 만들고 받들며 모시는 모습과 흡사하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나타나지 않는 고도를 두 사람이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하듯이 영화에서 동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적인 존재, 성자를 자신들이 만들어 의자에 앉힌 것이다. 
하지만 란슈가 뿌려주었던 해바라기 씨앗에서 이미 인간의 사랑과 존재, 욕망이 주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시두는 그 의자에서 내려와 스스로 ‘석화되어있는’ 허상을 간직한 성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현의 울림통 속에 스승이 준 처방전 대신 란슈가 떠나기 전 남기고 간 편지를 곱게 접어 넣고, 란슈가 좋아했던 나비연을 날린다.

복음의 시대
노인이 과거에 타던 현의 울림통 속에는 빈 종이가 들어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도, 본능도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이상만을 좇던 지나간 세월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었다. 시두의 현 속에는 란슈의 편지가 들어있고, 시두가 연주하는 음악에는 란슈가 남기고 간 고귀한 사랑이 들어있다. 황무지 같던 중국 땅에 시두로 인해 인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이 퍼졌다. 그 음악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사랑을 알려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란슈가 시두를 떠난 것 같은 불완전한 인간관계를 전할 뿐이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었다.

영원한 생명을 전해 줄 노래는 무엇인가?     
세월이 지날수록 귀하고, 들을수록 아름다운 노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 땅 전체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는 그 날을 위해 현의 울림통 속에 누군가 말씀이 들어있는 편지를 넣어야만 한다. 인내가 필요하고 고통이 기다린다 해도 현실의 천 번째 현은 이제 복음으로 끊어져야 한다.  


조재은 | 수필가, 「현대수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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