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는 전통적으로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는 말이 통용되어 왔다.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는 뜻으로 이는 곧 농업과 수공업이 상호 결합된 가족단위의 자급자족 생산구조 하에서 농촌 경제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하여 여성들은 가정에서 길쌈 등 가사 일에만 얽매이게 되었다. 게다가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희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황도파(黄道婆, 1245 - 1306)는『중국고대과학가전기(中國古代科學家傳記(上下), 1992,1993)』에 실린 중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이다.
황도파의 성장과정 상하이(上海)에 가면 “황 할머니! 황 할머니! 우리에게 실타는 것 가르쳐 주고 베 짜는 것도 가르쳐 주세요. 하루에 실 두통 내고 베 두필 짜도록 말이에요."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방직기술 혁신가 황도파의 뛰어난 방직기술을 칭송하는 노래이다. 그러나 황도파의 정식 이름은 알 수 없고 그의 생몰 연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지금의 상하이시의 서남쪽의 교외에 당시 쑹장(松江)의 우니징(烏泥涇)이라는 마을이 그녀의 고향이라는 것만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말년에 방직기술을 개발하여 경제 발전에 공을 세워 그녀를 ‘황도파'라 불렀는데, '황도파'라는 말은 '황 할머니'라는 말이다.
본래 황도파는 12-3세 때에 생활이 어려워 다른 집의 양녀(민며느리)로 들어가 생활하였다. 옛날 중국에서는 흔히 ‘동양식(童養媳)’이라 하여 남의 집 여자 아이를 어렸을 때부터 데려다 양녀로 삼아 양육하고 나중에 성장하면 며느리로 삼는 일종의 ‘민며느리제’ 풍습이 있었는데 그녀도 다른 집의 민며느리로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양녀로 들어간 집에서는 하루 종일 밭 일, 베 짜는 일을 쉴 틈 없이 해야 했다. 그렇지만 식구들은 그녀가 게으름을 피운다며 심하게 때리고 광에 가두고 잠도 재우지 않았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그녀는 결국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와 도교 사원에 피신하였다. 이 때문에 그녀는 ‘황도고(黃道姑, 황도 아줌마)’ 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사원에서 숨어 지내고 있던 그녀는 언제 어떻게 양가집에 발각되어 붙잡혀 갈 지 몰라 불안하여 멀리 도망가고자 하였다. 마침 황포강가에 나가 정박해 있던 배에 몸을 숨겼는데 그 배가 이른 곳이 하이난따오(海南島)였으며 이 일로 그녀는 하이난따오의 남단 야저우(崖州)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방직기술을 익히고 야저우에는 소수민족인 리(黎)족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남송(南宋)시기 조여적(趙汝適)의 지리서『제번지(諸蕃志, 1225))』에 의하면 “리족의 부인들은 양잠은 하지 않고 오직 솜이불, 명주, 여막(黎幕)만을 짜는 일에 종사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송대 방작(房勺)이 지은『박대편(泊宅編)』에도 “민광(闽廣: 지금의 푸젠성(福建)과 광둥성(廣東) 일대에는 방적이 크게 성행하였다.” 고 말하고 있듯이 하이난따오의 리족들은 방직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로인해 하이난따오 일대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은 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리족은 단단하고 두꺼운 두라면(兜羅綿, 버마지방의 ‘두라’ 라 하는 살구씨로 만든 다소 질이 떨어지는 면의 일종), 황리포(黃梨布, 파인애플 잎사귀로 짠 천) 등의 천을 짜서 거기에 여러 가지 색깔을 넣었는데 이것은 전국각지로 팔려나갔다.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면직물은 공납품으로써 남송의 수도인 린안(臨安: 지금의 항저우(杭州))에 들어왔는데 이러한 면포가 20여 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내지는 목화재배가 이루어지고는 있었으나 방직기술이 낙후해 하이난따오의 제품의 질에 비하여 크게 뒤져 있었다. 황도파는 하이난따오에 도착한 후 현지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리족의 선진 방직기술을 부지런히 익혀 유능한 방직기술자가 되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하이난따오에서 20여 년의 생활을 하던 그녀는 고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저녁 노을에 아련히 떠오르는 전원이 생각나곤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1295-6년경 씨 빼는 도구, 솜을 내는데 사용되는 솜활 등 리족의 우수한 기술과 도구를 손수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고향인 우니징에 돌아왔을 당시엔 목면 재배가 성행하고 있었지만 생산기술과 도구는 낙후된 상태였다.
그녀는 배워 온 방직기술을 고향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스스로 면방직 기구들을 개발해 나갔다. 그녀가 기술을 전수한 13세기 후반까지는 베 짜는 공정 중 목화씨를 빼내는 일부터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잘 마른 씨라 하더라도 목화씨가 목면 내부에 딱 달라붙어 있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직접 손으로 일일이 씨를 빼내거나 쇠막대기로 밀어서 빼내기도 하였지만 효율성이 낮았다. 이런 때에 황도파는 선진 기술을 전하면서 발로 밟아 돌아가게 한 씨아(攪車, 踏車, 土法轮花机, 轮棉车: 목화씨를 뽑아내는 기구) 틀 안에 두 개의 축을 갖춘 씨 빼는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틀 안에는 위쪽으로 직경이 작은 축이, 아래로는 비교적 굵은 축이 있어 이것들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도록 장치되어 있다. 씨아 틀 사이에 목화를 넣고 발로 밟아 돌리면 양축이 서로 엇갈려 돌아감에 따라 솜은 앞으로 빠져 나오고 씨는 뒤쪽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결국 황도파의 조면기(繰綿機, 씨 빼는 기계)는 방직공구의 제일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솜활(무명활, 彈綿弓), 물레 등 직기의 도구를 개조하였다. 씨아를 통해 씨가 빠진 솜은 솜활로 타는데 이 솜활은 참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럼 만들었다. 활 끝의 진동에 따라 찌꺼기는 떨어지고 솜은 뭉게뭉게 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고안한 방차(紡车, 물레)는 단목으로 된 방추를 사용하였다. 그녀는 원래 방추가 하나인 방차(물레)를 개량하여 3개의 방추를 이용한 방차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방직기의 커다란 진전이었고 수동 방직기의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개조한 이들 선진 방직공구는 원말 면직물의 생산을 증대시켰다. 당시 쑹장 지역에 면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집이 천여 호에 이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방직업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생산되는 면포는 전국으로 팔려나갔고, ‘쑹장면포 천하제일’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황도파 묘소와 기념관 역사상 중국 사람들은 여러 신(神)을 섬겨왔다. 상업신으로는 관우(關羽), 주(酒) 신은 두강(杜康), 목공신은 노반(魯班), 잠(蠶) 신은 마두랑(馬頭娘, 山海經의 西陵氏, 嫘祖), 옥(獄) 신은 고도(皋陶) 등이 있는데 황도파는 방직신으로 섬겨지고 있다. 1334년에는 정식으로 사당까지 세웠다. 현재 상하이시 난취(南區)에는 그녀를 모시는 ‘선면사(先棉祠)’가 세워져 있다. 또한 상하이 식물원 내에도 그녀를 기리기 위한 사당을 만들어 놓았다. 사당에는 황도파와 관련된 자료와 20세기 초 상하이의 면방직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녀의 조상(彫像)도 세워져 있다.
상하이시 화징(华泾)에는 황도파 묘소와 기념관이 있다. 이 묘는 몇 차례 방치되어 오다가 1957년 상하이 인민정부에 의해 보수되었다. 그 후 1962년 중수하고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한백옥(汉白玉)의 석비를 세웠다. 1987년에는 묘지 옆에 원명(元明)시기의 건축양식으로 된 ‘황도파기념관’ 을 세우고 이 일대를 상하이시급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기념관에는『중국동사(中國通史)』저자로 유명한 주곡성(周谷城)이 쓴 “衣被天下”(천하제일의 의복과 침구)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념관 앞에 2.2m의 생동감 있는 황도파 조상도 세워져 있다. 약 300평 규모의 기념관에는 3개의 소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주 전시실에는 황도파와 관련된 사진, 그림, 여러 유물 등을 진열하여 놓음으로써 그의 생활과 중국 방직사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다른 두개의 전시실에는 방직용 도구와 300여 점의 면방직품을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 진열된 많은 전시품들은 <상하이 문물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장쑤(江蘇)성, 저장(浙江)성 등지에서 수집한 것들로 대부분 명청(明 淸)시기부터 보존되어 내려온 진품들이기에 방문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 해 12월에는 황도파 노년기의 모습을 그린 화상(畵像)이 발견되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황도파가 하이난따오에서 상하이로 와 활동하던 시기의 것이라 크게 의미를 부여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황도파가 끼친 영향 및 의의 황도파는 하이난따오의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씨아, 솜활 등 방직 기구를 개발하였고 아름다운 색깔을 넣어 옷감 짜는 법을 창안해 내었다. 황도파의 방직 기구 개선과 기술 개발은 쑹장 지역의 방직업을 발전시켰고 나아가 중국의 사회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명말 청조 중국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청말(淸末), 민국초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하이 일대가 크게 번영하고 중국 제일의 상업지역이 된 것도 황도파의 공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사적인 의미에서도 면화는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1793년에 엘리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가 목화 씨 빼는 기구인 조면기(繰綿機, cotton gin, gin은 engine의 줄인 말로 ‘목화 엔진’이라는 뜻)를 발명함으로써 미국의 면직물 산업을 혁명적으로 발전시켜 미국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황도파는 이보다 이미 500년이나 앞서 씨 빼는 도구를 제작하여 활용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363년에 문익점(文益漸 1331-1400)이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대 속에 목화씨 몇 개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고 물레를 만들어 면방직의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대략 황도파가 중국에서 면방직을 시작한 지 반세기 뒤의 일이다. 황도파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과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그녀를 기념한 우표를 발행한 적이 있다. 1980년 11월에도 과학자를 그린 우표 4종이 발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인물이 황도파였다. 물론 황도파 외에 여성으로서 기념우표에 그려진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가 혁명가였다. 황도파는 유일한 여성 과학자로서, 종이를 발명한 채륜(蔡倫), 대수학자 조충지(祖冲之) 등과 나란히 과학자로서 그 위업을 보였던 것이다. 실로 그녀는 미국의 휘트니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목화씨 빼는 기구를 고안해 내었고 중국사에서 보기 드문 방직기술의 혁신가요, 최초의 여성 과학자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하겠다.
전순동 | 본지 집필위원,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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