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미비한 영향력 송첸감포가 죽자 불교는 곧바로 티베트의 전통종교인 본교(本敎)의 반격을 받는다. 본교도들과 귀족집단이 외래종교인 불교가 천재와 인재를 불러 들였다는 구실을 삼아 불교를 반대한 것이다. 710년 당나라의 금성공주가 티베트로 시집올 때 승려와 불경이 같이 들어와서 절을 짓게 되면서 다시 기회를 맞지만 잠시 후 다시 본교의 공격으로 좌절을 맞는다.
왕이 된 쳐쏭대짠(赤松德贊, 742-797년)이 어린 틈을 타 본교도인 부왕의 신하 마샹쫑빠지에(玛尙仲巴杰)가 정권을 잡고 왕에게 제의하기를 선대의 몇 왕들이 단명하고 나라에 역병이 돌았던 것은 불교를 봉행했기 때문이라며 본교를 따름으로 이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교를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석가모니 상을 땅 속에 파묻고 사원들을 모두 폐쇄하고 외국의 승려들을 쫓아내고 조캉사원을 도살장으로 만들었다. 쳐쏭대짠이 13세에 왕이 되었으니 755년 이후의 일이다.
쳐쏭대짠이 성년이 되어 선대왕들의 문서기록을 보고 불교가 왕실과 국가에 유리하다고 판단, 불교를 진흥시키기로 결심하고 몇 불교도인 귀족들과 비밀리에 협의하여 인도의 불교 고승 지후(寂护)를 데려온다. 때마침 연이어 계속된 천재와 기근, 온역 등의 현상을 마샹쫑빠지에 등 본교를 믿는 대신들은 인도의 승려가 오니 본교의 신이 화가 나서 벌을 내린 것이라 하여 돌려보낼 것을 왕에게 요구하였다. 이 때 지후는 자신의 매부(妹夫)인 파드마삼바바가 세상의 귀신들을 항복시킬 법력이 있다며 왕에게 데려 오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사실은 파드마삼바바가 밀종의 대가여서 주술을 할 줄 알았는데 그 주술로 본교도들을 이겨 보려고 계획한 것이다.
두 사람이 티베트에 들어와서 삼예곤빠(桑耶寺)를 세우고자 할 때 본교도들인 대신들이 반대하자 외국에서 온 승려들이 두 종교간 교리에 대한 변론을 해서 만약 본교도들이 이기면 자기들은 다 교향으로 돌아가고, 불교가 이기면 티베트 지역에서 불교를 전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759년 왕이 직접 인도하여 변론을 하였는데 본교가 지게 되어 왕은 모든 본교도들을 지금의 칭하이성(靑海省)이나 아리(阿里) 지역으로 유배를 보낸다. 그리고 모든 본교경전을 모아 물에 던지거나 삼예곤빠의 탑 밑에 눌러 놓고 모든 백성과 신하들은 불교만 믿을 것을 명령하였다. 이어 중국의 불교와 인도의 불교 사이에 공개토론을 3년간 했는데 중국의 불교가 지자 왕은 중국의 불교를 금지시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교를 들여 온 송첸감포 시대 후 10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왕이 본교를 믿는 대신들과 종교싸움을 통한 권력다툼을 할 정도로 불교 세력은 미미했고 특히나 왕실 외에는 민간인들에게는 불교가 영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들조차도 대단한 신앙심이 있었다기보다 귀족 세력들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를 이용하는 정도였다고 보여 진다. 또한 사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불상만 있고 승려가 상주하지 않는 작은 절이었고 승려라 해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민간에게 불교가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왕실이 귀족세력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밖에는 무슨 역할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파드마삼바바, 불교의 교리를 전하다 파드마삼바바는 우리나라에는 정신세계사에서 번역된「티베트 사자의 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인도사람으로서 지금의 캐시미르 고원에 해당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밀종의 대가이며 주술가였다. 파드마삼바바는 본교의 형식을 빌려 불교의 교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티베트의 전통종교에 불교를 접목시켰다. 즉 본교에도 있는 귀신을 쫓아내는 등의 미신인 무술(巫術)을 이용함으로 불교에 대한 생소한 감을 없애고 본교의 귀신사상에 불교의 신령세계를 접목시켰다. 이래서 불교가 방해 없이 티베트 지역에 들어올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티베트의 독특한 불교가 생성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779년에는 왕의 지지 하에 티베트 최초의 사원(먼저 세운 것들은 겨우 불상만 있는 작은 절에 불과함) 삼예곤빠(桑耶寺)를 세운다. 대웅전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티베트식, 2층은 중국식, 3층은 인도식으로 지었다. 이때부터 티베트에도 출가한 승려제도가 시작되었다. 소위 불, 법, 승 삼보를 다 갖춘 최초의 사원이 이 때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사원이 있다 해도 승려가 없었고 제대로 된 사원제도나 승려제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송첸감포로부터 150년 세월이 지나도록 불교는 이런 상황에 있었으니 송첸감포가 티베트불교에 무슨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파드마삼바바는 25명의 제자들에게 밀종을 전수시켰다. 또한 티베트의 일부 지방신들을 수호신의 역할을 하도록 불교신앙에 끌어 들이기도 했다(「티베트 사자의 서」, 190쪽). 이것이 후에 니엉와파로 계승된다. 그러니까 본교에서도 통하는 불교의 주술적 요소를 더 강조하고 티베트 사람들이 믿어 왔던 지방 신들을 인정하게 되니 이때부터 불교가 일반 백성들에게도 자연스레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파드마삼바바가 사람이 티베트의 나쁜 귀신들을 온화하고 선량하며 사람 돕기를 즐겨 하도록 변화 시켰다고 믿는다. 또한 대부분 가정마다 파드마삼바바의 그림이 있는데 그 덕분에 사악한 마귀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산신에 제사할 때 그의 이름을 불러서 지방의 신령이 그 이름 앞에 지방 신령들이 떨게 한다. 평상시에도 그의 불경을 주문처럼 외우며 다닌다. 그리고 그의 책들(예를 들면 「티베트사자의 서」) 가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그가 무소불능하다고 믿어서 그를 향하여 기도하고 복과 보호를 빈다. 그만큼 지금의 티베트 불교 형성에 파드마삼바바가 미친 영향은 크다.
그래서 티베트 불교에는 철학적인 현종보다는 주술적인 밀종의 영향이 더 크고 겔루그파는 현종을 더 중시한다 해도 민간인들에게는 주술적인 요소가 더 영향력을 미치는 형태의 불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쫄마'라는 여신이라든가 각종 수호신과 '랍찌'같은 산신 제사 형태가 여전히 일상신앙생활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사원에 가면 석가모니 상은 찾기 힘들고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각종 보살이나 지방신들이 더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게 된 결정적 요인이다. 티베트인들의 밭과 가장 잘 어울리는 씨를 심었으니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티베트 불교를 형성하였고 이제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교의 부흥과 쇠락의 반복 이렇게 불교가 정식으로 발을 내딛고 전파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본교의 세력이 강했다. 일부 귀족과 지방 세력들은 여전히 본교를 지지하고 있었다. 불교는 그 뒤로 한 번 더 지지기반을 잃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그의 뒤를 이은 짠푸(티베트의 왕)들은 더 강력한 방법을 동원해서 불교를 부흥시키면서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하여 츠더쏭짠(赤德松贊, 798-815) 때에는 승려들로 하여금 국정에도 참여토록 권위를 주었다. 그를 이은 츠주더짠(赤祖德贊)은 평민 7가구가 승려 한 사람을 공양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고 악의를 갖고 손가락으로 승려를 지적하는 자의 손가락을 자른다든가, 악의를 갖고 승려를 본 자의 눈을 파낸다는 등의 법률의 제정하였다. 또한 군정권을 최고 승려관리에게 주어서 승려가 새로운 특권계층이 되었으며 불교가 본교를 대신해 티베트의 국교의 위치에 있게 하였다.
이런 정책은 평민들의 분개와 귀족들의 불만을 일으키게 하여서 이들이 연합하여 838년 그를 죽이고 얼렁따르마(郞达玛)를 짠푸로 옹립하였다. 그는 짠푸로 오르자마자 철저히 불교를 궤멸시키고 본교를 부흥시키고자 보복을 감행하였다. 사원을 봉쇄시키고 철거하며 불경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켰다. 불교는 이 타격으로 티베트에서 거의 멸절되었다. 그런데 얼렁따르마 재위 4년간 가뭄 등의 자연재해와 돌림병의 만연 등으로 사회생산이 파괴되어 두 종교가 같이 쇠락하게 되고 투판(티베트)왕조의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 온 뒤로 왕족 세력이 득세하면 불교가 힘을 얻고 귀족집단이 득세하면 본교가 득세하는 대결 구도가 200여 년 이어진 것이다. 사실 외래종교는 정치집단에 의해 아무리 영향을 준다 해도 풀뿌리 백성들이 그 종교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민족에게 뿌리를 내리느냐의 여부가 달려 있다. 이 불교가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송첸감포와 관계없이 본교의 주술적인 색채와 유사한 밀교가 들어와서 소위 토착화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티베트불교 안에는 본교나 샤머니즘, 밀교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다. 송첸감포가 불교를 들여오기는 했지만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밀종을 통한 불교의 티베트토착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지금 불교와 관련하여 그에 대해 전혀 다른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가 티베트에 영향을 끼쳤다는 말을 할 때에 파드마삼바바와 그를 데려 온 지후(寂护)를 통한 토착화 과정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쇠락했던 불교는 978년에 다시 부흥기를 맞게 된다. 얼렁따르마가 불교를 궤멸시키고 있을 당시 세 명의 승려가 지금의 아리지역과 신장 그리고 나중에는 지금의 칭하이 북부인 안뚜어(安多,암도)에 와서 화롱(化隆)현에 은거한다. 이래서 티베트지역뿐 아니라 아리와 칭하이에도 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투판왕조의 붕괴이후 13세기에 통일이 될 때까지 왕실의 자손들이 각 지역에서 분할 할거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통치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 종교를 필요로 하게 되어 10세기 후반기에 봉건주들의 지지 하에 불교는 다시 일어서게 된다. 970년 전후에 산남 지역의 봉건주인 쌈예곤빠의 주지가 사람을 칭하이에 보내어 불교를 배우고 경전을 가져오게 한다. 얼렁따르마를 피해 칭하이로 도망 온 승려들에 의해 칭하이에서 불교가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지금의 캐시미르 지역과 인도에 사람들을 보내어서 불교를 배우게 하거나 승려들을 초빙해와 사원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게 하였다. 특히 인도의 고승 아띠시아(阿底峽)는 아리지역에 3년, 윗쪙(卫藏)지역에서 9년 동안 불교를 가르치면서 불교를 부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티베트 불교의 확장 11세기가 되면 불교는 티베트인들이 사는 지역에서 상당한 규모가 되어 있었다. 이미 본교의 종교의식, 특히 승려제도 등의 영항을 받고 토착화되어 있었고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등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즉 승속일체(僧俗一體), 정교합일(政敎合一)의 국면이었다. 사원은 각 지역에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점차 불교는 민중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기층민이 불교를 믿게 된 후 승려가 기층민의 지지아래 권력을 쥐게 되었고 봉건통치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승려귀족집단이 생겨나게 되며 그 권력을 이용하여 더욱 불교를 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 비로소 불교가 완전히 본교를 누르게 되었다.
또 밀종(密宗)이 신속하게 발전하였다. 사람들의 생활이 곤핍해지고 사회혼란이 가중되자 철학사상을 내세우고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 열반이나 극락의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이 더 믿지 않게 되고 밀종이 보편적으로 퍼지게 되었다. 또한 정교합일의 제도가 정착되는 과도기였다.
불교가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면서 니엉와파에 이어 다양한 종파가 생겨나게 된다. 1073년 싸지아라는 곳에 싸지아사를 세우면서 싸지아파가 생겨났다. 14세기 티베트지역에서 교파 간 투쟁이 극렬했을 때 다시 많은 승려들이 칭하이에 왔고 그때 랩꽁(同仁)에 롱우(隆務)사를 세웠다. 이 사원은 17세기에 겔루그(格魯, 꺼루)파로 개종하였다. 싸지아파는 현종과 밀종을 겸해서 수행하다가 나중에는 밀종에만 전무하게 되었다.
4대조 싸빤(薩班,1182-1251) 때에 세력이 크게 진흥되었다. 그는 교주일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권력을 통제하는 봉건주였다. 이런 정교합일의 특징이 몽고족의 통치자의 눈에 들어 1247년 싸빤은 징기스칸의 손자와 지금의 깐쑤(甘肅)성 우웨이(武威)에서 만나 협상을 통해 티베트지방을 몽고에 귀속시켰고 대신 싸지아파는 다른 파를 제압하고 교파를 발전시켰다. 그 후 쿠빌라이는 1253년에 당시 19세의 싸지아파의 5대조 빠쓰빠(1235-1280)를 만나고 깊은 인상과 감화를 받았다. 1260년 원의 황제가 된 그는 빠쓰빠를 불러 국사(國師, 나중에 제사(帝師)로 불림)로 삼고 제국내의 모든 종교에 대한 감독권을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오면 불교는 이제 정치세력화하여서 티베트 안에 확고한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11세기에 생긴 까쥐(噶擧)파에서는 가장 먼저 활불(活佛)의 세습 제도를 만들었다. 인도승려 아띠시아(982-1054)가 아리와 윗쩡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밀종보다 현종을 강조하는 까땅(噶當)파를 만든다. 15세기 후 쫑카빠는 이 까땅파의 교리를 기초로 겔루그파를 창립하였으며, 그 후 이 파의 사원들이 겔루그파로 개종하여 지금은 거의 없다.
13세기 초의 불교는 부패하였고 규율이 문란했으며 민심을 잃어 쇠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통치계급은 자기들이 통제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새로운 교파가 나와서 자신들의 통치를 돕기를 바라고, 백성들은 새로운 교파가 나와서 교계를 정돈하고 승려세계를 정리해 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 조건하에 쫑카빠(宗喀巴, 1357-1419)가 1409년에 라싸에서 큰 법회를 열었는데 이를 통해 그는 티베트불교의 저명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새 교파를 창립할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법회 후 라싸 동북 30km지역에 깐딴(甘丹)사를 세우면서 겔루그파를 세우고 종교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그는 승려들이 계율을 엄히 지키며, 아내를 취하지 말고 술을 마시거나 살생하는 것을 금하고 사원내의 조직을 엄격히 하며 고행을 주장하였다. 현종과 밀종을 겸하여 수행하되 현종을 먼저 수행하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통치자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가 창시한 겔루그파는 가장 늦게 출현했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할 뿐 아니라 이전에 있던 모든 교파를 대신하여 가장 큰 교파가 되었다. 이들은 승려들이 황색의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하여 황교라고도 불린다. 후에 이 겔루그파는 달라이 라마를 수장으로 하는 정권이 되어 백성과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요 신으로서 티베트를 다스리게 된다.
그 뒤로 이 독특한 티베트 불교는 이웃의 네팔, 시킴, 부탄과 캐시미르의 라다크, 몽골 등에 전해지고 확산된다. 현대에 들어와 티베트인들 중 소수는 유럽과 미국에 정착하며 서방세계에 그들의 종교를 전할 기회를 가졌다. 1963년 첫 번째 유럽 티베트불교 명상센터가 스코틀랜드에, 1979년에는 프랑스와 스웨덴에 생겼다. 또한 최근에는 서양의 영적 공허함에 허덕이는 일부 사람들 가운데 티베트불교를 동양의 신비사상으로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에 의해 서양에 티베트 불교가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는 현 중국의 영토에 복속된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문화대혁명의 핍박 이후 티베트불교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파괴된 사원들이 다시 세워지고 떠났던 승려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티베트족뿐 아니라 윈난(雲南)의 모쑤어족(摩梭族), 푸미족(普米族), 나시족(納西族), 누족(怒族), 위꾸족(裕固族), 투족(土族), 네이멍구(內蒙古)의 멍구족(蒙古族) 등이 티베트불교를 믿고 있다. 또한 칭하이성이나 깐쑤성 등에서는 한족들 중에서도 티베트불교 신봉자들이 있다. 워낙 미신이 강한 한족들이 복을 받는 길이라는 생각에 티베트불교 사원에 시주하며 라마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시주를 받는 유명한 라마(활불) 중에는 시닝 같은 도시에 아파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와 정착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불교는 본교와의 투쟁을 통해 티베트에 어떻게 정착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싸움을 거쳤다. 또한 그 과정에서 중국의 불교를 버리고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으니 문성공주나 금성공주의 영향을 강조할 수 없다. 파드마삼바바의 영향으로 인도의 주술적인 밀종을 선택함으로 티베트 정착에 성공한다. 그래서 나중에 뿌리가 흔들릴 만한 얼렁따르마 사건을 맞이했음에도 티베트 지역에서 살아남게 된다. 나중에 흩어진 왕실들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다시 불교가 일어나는데 이때부터는 민간에게 깊은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불교가 정교합일로서 하나의 통치세력이 되고 그 사원경제체제 속에서 티베트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는 불교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지금 우리가 보는 독특한 티베트불교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티베트불교가 정치세력이 된 파스파 정권과 신적 요소가 가미된 달라이라마 정권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이런 것을 통해 독특한 티베트불교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어떻게 우리가 이들에게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유은식/ 전 중국 티베트 선교사, 현 산돌성결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