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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20  통권 94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6900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상(商)·주(周)의 교체 -목야전투(牧野戰鬪)-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나라를 망친 주왕(紂王)

상(商, BC1700-1050, 과거에는 은<殷>이라 하였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상이라 함)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은 하(夏)의 걸왕(桀王)과 더불어 ‘하걸은주’, 줄여서 ‘걸주’라 하여 중국 전형적인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사기』에는 걸왕의 악역무도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다만 덕을 닦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을 해쳤기 때문에 백성이 그에 견디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주왕의 포학에 대해서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주왕은 왕의 자질과 언변이 뛰어났고, 머리가 명석하여 어떤 일을 듣거나 보기만 하면 그 진상을 바로 기민하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고, 체력도 뛰어나 맹수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주왕은 이렇게 뛰어난 자질을 덕을 쌓는데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하였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도취에 빠졌으며 그렇기에 충신이 간하는 말 따위는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드러내기 좋아하여 평소에 입는 옷에 각종 옥석과 보물들로 장식 했다. 왕궁의 문을 옥으로 만드는가 하면 궁원(宮苑)안에 높이가 20m나 되는 녹대(鹿臺)를 세워 화려하게 치장해 둠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였다. 그가 세운 녹대는 하의 걸왕의 요대(瑤臺)보다 훨씬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술과 고기를 좋아하며 향락을 즐겼다. 왕궁에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마련해 귀족들과 함께 밤낮 주색과 열락에 빠졌다. 연못에 물을 퍼내고 그 밑바닥과 주위를 돌로 쌓은 다음, 그 곳에 술을 가득 채워 마음 내키는 대로마시고, 안주는 뜰의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불고기를 마음껏 먹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주지는 배를 띄울 수 있을 만큼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주왕은 달기(妲己)라는 여인을 총애했다. 총애가 아니라 아주 흠뻑 빠져 이로 인해 나라를 망친 것이다. 달기는 유소씨(有蘇氏)의 딸로서 일찍이 주왕이 유소씨를 토벌할 때 유소씨가 전리품으로 주왕에게 바친 미녀다. 그녀는 절세미인이었지만 좀처럼 보기 드문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달기를 얻은 그날부터 주왕은 완전히 그 요염한 자태에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했다. 주왕은 달기가 주문하는 갖가지 잔혹한 행위를 다 들어주었는데, 예컨대 ‘포락(炮烙)의 형’과 같은 잔혹한 형벌을 제정하여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처벌하게 하였다. 포락의 형이란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숯불을 피워 놓고 구리 기둥위로 죄인들을 걸어가게 하는 형벌이었다. 무사히 그 구리 기둥을 끝까지 걸어가면 상으로서 죄를 면해 주고, 떨어지면 그 밑의 불구덩이에서 타 죽게 한 혹형이었다. 불바다 위에 걸쳐진 구리기둥은 미끄러지기 쉽게 기름을 칠해 놓았다. 너무나 미끄럽게 칠하거나 불 가까이 놓아 뜨겁고 미끄러워 한 두 발자국 가다 쉽게 밑으로 굴러 떨어지면 흥미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적당한 간격을 두어 설치하였다고 한다.

불속에 떨어져 죽느냐? 기름 기둥을 무사히 건너서 사느냐 하는 절박한 갈림길에서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엉금엉금 구리 기둥 위를 기어가는 죄수들의 모습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잔인무도한 극치였다. 실 날만큼의 한 가닥 희망을 안고 한발 두발 걸어가다가 앞으로 두세 발만 걸으면 죄를 용서 받고 살 수 있는 목숨을 건 찰나에서 기진맥진 불 위에 떨어져 비명을 지르고 뿌지직 살이 타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쾌감을 만끽하는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와 같은 잔인무도한 형벌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주왕의 이런 잔인한 행동을 말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복형인 미자계(微子啓)가 충고하였다. 그러나 주왕은 이와 같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미자계는 화를 면하기 위해 몰래 멀리 떠나 숨어 버렸다. 주왕의 삼촌 비간(比干)도 좋은 말로 주왕을 설득해 보았으나 주왕은 비간을 죽이고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 감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주왕의 당형제인 기자(箕子)도 주왕에게 선의의 충고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든 것을 체념하고 거짓 미치광이가 되어 노복(奴僕)이 되었으나 끝내 주왕에게 발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어느 누구도 감히 주왕에게 충고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병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는가 하면, 조정에 나와도 입을 다물기가 일쑤였으며 어떤 대신들은 궁정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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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무능과 폭정에 백성들의 생활은 갈수록 고달프기만 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강요했고, 고기를 조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숲에 들어가 사냥을 하게 했다. 집집마다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이를 참지 못한 백성들은 지치고 병든 몸을 안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목야의 전투-주의 무왕이 상의 주왕을 치다
주왕의 광기에 가까운 만행에 상 왕조의 조정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이 때 서쪽의 주(周)의 무왕(武王)은 강태공의 보필을 받으며 상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무왕은 먼저 각 마을과 소국에 동지를 보내 황하 유역의 맹진(孟津)에서 회의를 열고 어지러워진 천하를 수습할 방법을 찾았다. 약 800명이 모였는데, 이들 절대 다수가 군사를 일으키어 상의 주왕을 토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의 무왕은 전차 300대, 3000명의 선봉대, 4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읍지 풍읍(豊邑)을 출발하여 상왕조의 도성인 조가(朝歌)를 향해 쳐들어갔다. 무왕의 군대는 사기충천한 가운데 동진하여 황하를 건너 상의 교외인 목야(牧野, 오늘날 허난(河南)성 훠자(獲嘉)縣 통멍(同盟)산)에 이르러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음락에 빠져 있던 주왕(紂王)은 주나라 군대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대를 모았다. 그러나 당시 상의 군대는 동남지바에서 동이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달려 올 수가 없었다. 주왕은 하는 수 없이 노예와 포로들을 군대에 편입시켜 70만 대군의 병력을 동원하여 목야로 나가 무왕 군대에 맞섰다. 이로써 그 유명한 ‘목야의 전투’(BC. 1050년 경)가 벌어졌다.

목야의 전투는 고대 중국의 역사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병력으로 따지자면, 주왕 군대는 무왕군대보다 많았으나 주왕의 압정에 고통을 받고 있던 군사들은 전의를 잃고 도리어 무왕의 승리를 편들고 있었기에 전세는 무왕에게 유리하게 기울어갔다. 

주왕은 수도로 돌아와 백성들로부터 거둔 재보가 그득 쌓여 있는 녹대(鹿臺)라는 높은 누각에 올라가 천지(天智)라는 이름의 옥을 비롯하여 많은 옥을 몸에 감고 불에 몸을 던져 분사하였다. 그런데 옥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시체는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뒤 쫓고 있던 무왕은 녹대에 이르러 전차 위에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발을 쏘고, 전차에서 내려 검으로 목을 벤 후, 마지막으로 황금으로 장식한 큰 도끼(鉞)로 주왕의 목을 쳐 잘라 내었다. 그리고 주왕의 목을 깃발 꼭대기에 달아매었다. 이어서 주왕의 두 애첩에게도 검은 색 도끼로 목을 잘라 기봉에 달아매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어 제물을 마련하고 제단을 쌓아 무왕이 천명을 받아 은을 멸하고 천자가 되었다는 축문을 낭독하여 혁명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탕왕 이후 600여년 계속된 상왕조는 멸망하고 주가 천명을 얻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허난성 신샹시(新鄕市) 훠자현에 가면 우왕통멍산(武王同盟山)이 있는데, 그곳은 무왕이 상의 주왕을 멸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거기에는 목야 전투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제후연무장(諸侯演武場)’, ‘제후정(諸侯井)’, ‘주무왕음마지(周武王飮馬池)’, ‘강태공교열대(姜太公校閱台)’ 등은 당시의 목야전투의 양상을 잘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상·주 두 왕조의 교체를 말해주는 목야전투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확실히 잘 알 수 없다. 아마 한대에 전해 오면서 내용이 차차 과장되었으리라고 생각되나 사실 여부를 떠나 몇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다.

불변에 대한 염원 - 옥 신앙
그 중 하나는 주왕이 분사하였을 때, 옥을 몸에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불 속에서도 그의 육체가 타지 않고 남았다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생각나는 것은 허베이(河北)성 만청(滿城)현 이나 산둥(山東)성 쉬저우(徐州)시 에서 발견된 금루옥의(金縷玉衣)나 은루옥의(銀縷玉衣)이다.

옥은 신선사상에 따라 그것을 소지하면 악귀를 물리친다고 전해져 왔다. 그리고 옥은 사람이 죽어도 시신을 썩지 않게 하는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에도 옥은 자체에서 발산하는 파동이 우리 인체에 골고루 침투하여 혈액 순환을 좋게 하고, 조직을 생성한다 하여 건강용 보석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고대 중국에서도 옥만이 가질 수 있는 특이한 효과가 인정되었던 것이다.

옥의(玉衣)는 옥갑(玉匣)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자의 신분에 따라 옥 조각을 이을 때 각각 금·은·동 실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당시에는 옥으로 만든 옷을 입히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1968년에 허베이성 만청현에 있는 중산정왕(中山靖王) 부부의 묘에서 금실로 엮은 옥의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출토된 2겹의 금루옥의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중산정왕 유승(劉勝)의 옥의는 2,498개의 옥 조각이 금실로, 유승의 처가 입은 옥의는 2,160개의 옥 조각을 금실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각각의 옥 조각들은 모두 정밀하게 설계·가공되었으며, 여기에 구멍을 뚫고 금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게 연결시켰다. 이것은 당시 수공예의 수준을 알려줄 뿐 아니라 옥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고, 옥 조각을 금실이나 은실로 이어 유체를 영구보존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실로 상·주 시대는 매미, 물고기, 새, 돼지, 혹은 무기의 본을 뜬 옥 조각품이 유행하였다. 호신용 부적으로, 왕과 제후들 사이에 서약으로, 또는 신분의 증표로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옥에 맹세문을 적어 부장물과 함께 무덤에 넣기도 하였다. 옥이 이렇게 존중되어진 것은 색이나 광택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옥이 불변하는 보석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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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옥이 중국에서는 흔하지 않아 매우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주로 황실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자연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그래서 왕이 사용하는 의자를 옥좌(玉座),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귀한 아들은 옥동자(玉童子)라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전차 중심의 군대와 사용된 무기
다음으로 들 것은 당시의 군대 편성에 전차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왕의  병력을 나타내는 데에 전차 4,000대가 출현하고 있듯이 상·주 시대의 군대의 중핵은 전차부대였다. 더욱이 무왕이 전차 위에서 주왕을 향하여 활을 쏘았는데 상·주시대의 전차부대는 모두 활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발굴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투용의 큰 검은 상 왕조나 서주 초기에는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에 작은 칼(小刀)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데, 이것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 병사들은 창(戈)을 소지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서주의 분묘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무기이다.

또한 무왕은 도끼(鉞)를 사용하여 주왕의 목을 베었는데, 이것은 왕이 죄인을 단죄할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무왕은 하늘에 대신하여 폭군인 주왕의 목을 도끼로 잘라 사람들에게 보였던 것이다.

상·주 혁명과 천명사상
상·주의 교체는 무력에 의한 방벌(放伐)로써, 정통적인 왕조 교체나 왕위 계승의 이상형으로 여겨지는 선양(禪讓)과는 구별된다. 그렇기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력으로 주왕을 정벌하러 나가는 무왕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무력 정벌을 반대했던 그들은 전형적인 충신의 모형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다. 그들은 형제간으로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는데, 고죽군은 기대되는 막내아들인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가 죽은 뒤 숙제는 이것이 예법에 어긋난다 하여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나라를 떠나 서백(西伯) 문왕(文王, 무왕의 아버지)의 명성을 듣고 주나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문왕이 죽고 아들인 무왕이 문왕의 위패(位牌)를 수레에 싣고 상의 주왕을 정벌하러 가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죽어 장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효(孝)’가 아니며, 신하로서 주군을 치는 것은 ‘인(仁)’이 아니다”고 하며 무왕이 타고 있던 전차의 말 목덜미에 매달려 강력히 말렸지만 무왕은 듣지 않고 출정하여 목야 전투에서 주왕을 멸하고 천하를 지배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주의 봉록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 지금의 산시성 융지현)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 굶어 죽었다는 고사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렇듯 무력으로 주군을 치는 것은 방벌이라 하여 배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왕이 비록 비정통적인 방법을 통하여 상 왕조를 타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상 왕조에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명(命)이 떠났기 때문에 이를 바꾼다(革).”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즉 상과 주의 교체 곧 혁명의 이념적인 정당성을 ‘천명(天命)’으로 보장하려는 것이다.

실은 상왕조가 멸망한 것은 주왕의 개인적인 부도덕이나 실정도 작용을 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당시 사회에 만연된 오랜 전쟁(외환)으로 인한 시달림과 피폐, 인심의 이반을 가져온 지배층 내부의 부패 등 말기적 사회상에 의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는 이것을 주왕 개인의 폭정과 부덕함에 연유한 것으로 보는 유교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시경(詩經)』은 무왕의 아버지인 서백(文王)이 하늘(天)로부터 포악한 상의 주왕을 멸하라는 ‘천명’을 받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문왕은 인덕(仁德)을 쌓고, 인재를 널리 구하는데 힘을 섰는데, 특히 태공망 여상(呂尙)도 이 무렵 위수 가에서 맞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포악하고 부덕한 상의 주왕과 덕을 쌓은 문왕을 대비시킴으로써 주왕조 등장의 정당성을 천명으로 설명하였다.

사실상 상 왕조를 타도한 사람은 무력을 사용한 무왕임에 반하여, 천명을 받은 것은 문왕으로 설정함으로써 상·주의 교체를 천명으로 해석하려 하였던 것이다.

주 왕실의 천명사상은 상·주의 무력적 왕조교체를 합리화시키고 상왕조의 유민을 제어하는 데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주대의 천자로서의 절대성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이것은 유가 정치 사상가들에 의하여 더욱 미화되어 평가되었던 것이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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