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자발적인 해외 근무 직원이 된다는 것은 조선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러한 외지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람을 선정할 때는 각 경우마다 담당 위원회가 선교지에 있는 선택 가능한 사역자들을 조사하여 그 선교과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곽안련(郭安連·Charles Allen Clark, 1878∼1961년) 선교사가 한국 크리스천의 중국 선교사 선발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는 선교적 열정이 깊이 서려 있는 듯하다.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 30분,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시작된 한국장로교회 제1회 총회의 첫 번째 안건은 바로 황해노회의 선교사 파송 청원이었다. 고난 중에 있었지만 우리 민족은 선교를 최고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타민족을 위한 거룩한 헌신은 자민족 복음화를 넘어서는 결단이었다. 1902년 12월 22일 미국 하와이에 홍승하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 뒤 1907년 장로교회 독노회를 설립하고 탐라(제주도), 일본 도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동포와 유학생 선교를 위해 목회자들을 지속적으로 파송했다. 황해노회는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 선정을 책임졌다. 아울러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받아들이면 선교사 재정까지 담당하겠다고 강조했다.
당시 황해노회원으로 총회에 참석한 이는 한위렴(韓韋廉·William Blair Hunt, 1869∼1953년), 사우업(史佑業·Charles Edwin Sharp, 1870∼1952년), 공위량(孔偉亮·William Charles Kerr, 1875∼1951년) 선교사와 우종서, 김익두, 최병은, 박태로, 이원민 목사, 장로 18명 등이었다. 한위렴 선교사는 이에 앞서 1912년 6월 30일 제2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당시 성도 1,000여 명의 재령읍교회 위임목사로 시무 중이던 박태로를 눈여겨봤다. 박 목사는 선교사 중심으로 운영되던 교회에서 첫 번째 위임목사가 된 조선인이었다. 물론 선교사의 영향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박 목사가 재령읍교회 위임목사였지만 한위렴 선교사와 동사(同事)목회를 했다.
장로교 총회는 선교사 파송과 함께 1년 중 한 주일을 특별히 정해 각 교회에서 기도와 헌금을 할 것도 결의했다. 현재 한국교회 안의 선교주일 헌신예배가 1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가 컸기 때문에 시선을 외부로 돌린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정적으로 풍족해서도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저금통을 깨고 선교헌금을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 중에는 총회 부총회장, 서기 등 교단 정치 거물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총회 전도국은 창립총회의 헌의위원이자 전도국 위원인 한위렴 선교사와 협의하고 그에게 적합한 선교지를 물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는 중국을 방문, 선교가 가능한 지역을 타진했다. 이를 위해 중국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중국 주재 미국 선교사들과 심도 있게 논의했다.
1912년 12월 5일 소래(松川)교회에서 열린 제3회 황해노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회 서기였던 박태로 목사에게 총회 해외선교의 중책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중국에 선교사로 나갈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재령읍교회 위임목사가 된 지 6개월도 안 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건만 박 목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재령읍교회 성도들은 박 목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게 너무나도 섭섭해 한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는 후문이다. 당시 대형교회 목사이자 영향력 있는 노회 임원인 박 목사는 총회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과연 지금 한국교회는 ‘최고의 에이스’를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또 목회자들이 박 목사와 똑같은 제안을 받는다면 그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박 목사가 중국으로 떠날 때 나이는 42살이었다. 박 목사로 시작된 우리 민족의 산둥(山東)성 선교 역사는 적지 않은 곡절과 대가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1957년 방지일(1911∼2014년) 목사가 중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추방된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방 목사가 부친 방효원(1886∼1953년) 목사에 이어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을 때가 26살이었다.
한국선교연구원(KRIM)의 조사, 발표한 최신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171개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국 국적의 장기 선교사는 2만 1,621명이다. 이 중 29세 이하 선교사 비율은 0.46%. 30대는 6.05%이다. 즉 20∼30대 선교사 비율은 7%(6.5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0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50대 이상 선교사는 69.25%이다. 즉 10년 이내 현재 한국인 선교사들의 약 60% 이상이 은퇴 연령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약 50∼60%가 교회학교가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면 향후 20대 선교사들이 지금보다 더 증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을 하면 젊은 세대를 선교에 참여시킬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10대에서 40대까지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세대다. 특히 10대는 스마트폰을 물고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디지털 미디어에 매우 친숙하다. 이 같은 트렌드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거의 동일하게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초연결 시대, AI 시대에서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선교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즉, 이들에게 디지털 미디어선교 비전을 심어준다면 선교사 동원과 사역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한국교회의 함께하는 디지털 미디어선교는 교회의 전통적인 선교 방식과 선교사 충원 방식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각 나라의 차세대에게 자민족을 복음화할 수 있도록 비전과 열정과 더불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선교의 효율성은 강력하다. 첫째,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생전에 약 50년간, 약 2억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1년 만에 약 1억 명이 관람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미니시리즈로 제작돼 2013년 3월 3일부터 31일까지 방영된 ‘더 바이블(The Bible)’도 1억 명 이상이 시청해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셋째, 누가복음을 기초로 1979년에 제작된 ‘예수(The Jesus)’라는 영화는 2,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 더빙돼 올해까지 전 세계에서 50억 명에게 복음을 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던 수억 명이 주님께 돌아왔다는 평가가 있다. 넷째, 이슬람권 선교방송인 SAT7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창궐한 2021년에 남녀노소를 위해 온라인 아랍어 교육 콘텐츠 중심 SAT-7 ACADEMY를 운영했다. “Dr Bee”, “Expert Advice”, “The Coach”, “Fitness craze”, “Keys for raising my children”, “Creative Arts”, “Follow up” 등을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5∼12세 난민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소셜미디어 교육플랫폼 “My School”을 통해 아랍어, 수학, 과학, 영어, 불어 등을 연령대별, 20분 분량의 프로그램으로 제공했다. 목회자, 선교사, 성도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의 콘텐츠가 좀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도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10대 이하가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사망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바레인, 시리아, 이란 등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세대 구분 없이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들이 더욱 늘어가고 있다. 이들에게 가장 손쉽게, 가장 빨리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은 미디어다. 디지털 미디어선교란 개인, 공동체, 교회 등이 기독교 복음과 가치, 일반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기독교 영역과 용어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않고 기존 미디어(위성, TV, 라디오)와 뉴미디어(소셜미디어, 스마트폰) 등 모든 미디어 수단과 어(문)법을 활용해 “모든 곳(사람)에서 모든 곳(사람)까지” 전달하고 응답하는 선교 방식을 일컫는다. 이는 전통적인 교회 개척과 제자훈련, 교육선교, NGO선교, 이주민선교, 난민선교, 디아스포라선교, 전문인선교 등 모든 선교영역을 포괄할 수 있는 통전적인 사역이다. 특히 신앙과 신학을 교회, 신학교, 기독교인 가정 등 기존 기독교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공적·사적 영역에서 소통, 감동, 위로, 공감, 공유, 공생의 후생가치를 실현해 나가도록 촉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 세계는 젊은 선교사, 사역자,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한국 청년들은 과거 세대와 달리 국제화해 있다. 매우 미디어 친화적이다. 장기적으로 해외에서 사역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정 기간 선교지가 필요한 부문에 헌신할 수 있는 순수성과 열정, 기능이 없지 않다. 국내에는 다문화 가정뿐 아니라 이주민이 적지 않아서 이들에게 보다 다가갈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문제는 젊은이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발상전환적인 접근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모델, 믿고 함께 갈 동료나 선배들이 있느냐이다. 선교에 있어 목회자인지 일반 성도인지 구분은 필요하지 않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르신인지 장년인지 청년인지 청소년인지 어린이인지 나누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 선교자원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안다면 지금 있는 곳에서 작은 실천부터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곧 선교적인 몸부림일 것이다. ▩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 왕빈 | 중국 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