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20대 후반부터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던 길, 평생을 같이 갈 것 같았던 믿음의 동역자들을 떠나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상황. 모(母)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금까지 왔는데, 결국은 선교단체를 떠나야만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홍콩 현지신학교의 수업은 광동어와 영어로 진행되었고 한국인 중국선교사들, 제3세계 교회지도자들, 선교사 출신의 신학교 교수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나의 시야를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홍콩 현지학생들과의 만남도 중국선교 사역과 동역자들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신학교 3년이 다가오면서 비자 만료 시기도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홍콩에 계속 머무르려는 마음이 있던 차에, 신학교와 협력하는 홍콩선교단체에서 비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홍콩에서 지속적으로 선교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홍콩에서 비자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던 선교단체에서 한국교회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서류들을 요구했다. 당시 홍콩 체류 시에 필요한 상당한 액수의 후원작정서가 비자를 신청할 때 필요했다. 홍콩선교단체에서는 파송교회인 한국교회가 이 후원작정서를 행정적으로 처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왠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비자발급을 받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거절했다.
해외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한국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누군가 ‘선교사로 나가기까지 국내에서 필요한 훈련의 시간이 10년’ 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장기선교사로 출발하면서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으니 일들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은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끊임이 없는 영적 전쟁터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계속해서 비자를 연장해서 선교지에서 버틸까” 하는 생존 문제로 허덕였다.
그러던 중, 중국인에 대한 나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면서 여러 모로 도움을 주셨던 한 대만선교사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중국으로 가면 사역중국어를 배울 수 없으니, 대만에서 사역중국어를 배우고, 대만교회에서 사역도 하면 좋겠다고. 같은 중화권에서의 이동이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대만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것저것 대만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한 결과 문제가 발견됐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큰 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3개월간만 지켜보자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매일 밤 교회로 달려가서 철야기도를 했다. 곧장 대만으로 출국하려는 계획들이 틀어지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3개월을 보냈다. 드디어 재검결과가 나왔다. 종양의 흔적이 깨끗하게 없어졌단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셨음을 감사하면서도 대만에 가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두려움이 마음 한가운데 있었다. 소속선교단체가 없이 한국교회의 파송을 받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컸다.
대만은 내게 낯선 곳이 아니었다. 대륙의 문이 열리기 전인 1991년부터 대만으로 단기선교를 갔었기 때문이었다. 대만을 통해 대륙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눈물로 기도한 기도들이 쌓인 곳이었다. 집집마다 조상신을 모시고 곳곳에 도·불교의 사원들로 넘쳐나는 대만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였다. 홍콩보다 어찌 보면 더 심각한 우상숭배와 두려움에 떨며 묶여있는 것 같은 대만 사람들, 교회 바로 옆에 동네 사원이 있고, 가게마다 향 냄새로 가득하다. 또한 이곳의 장례 문화는 대부분 최소 7일에서 상주가 정하는 대로 길게는 한 달 동안 치르는데 이때가 평생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때라고 한다. 교회에 나오셨던 한 집사님의 아버님께서는 자손들로부터 제사상을 받겠다고 교회를 떠나셨다. 채식주의인 승려들이 갈 수 있는 채식 뷔페도 많았다. 일반 상점뿐 아니라 병원에서도 매달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온 도시에서 행해졌다. ‘대만 문화’는 우상숭배와 관련된 행사들이 정부지원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만의 수도인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대만인교회에서 중·고등부 사역을 맡았다. 그 교회의 목사님께서는 해외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으시다면서 한국에서 선교사로 온 내가 부럽다고 말씀하셨다. 본인은 아직 해외선교사로 나갈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고 하시면서 나를 격려해주셨다. 나는 대륙선교를 위해 먼저 2년 정도 중국어를 배울 계획이라고 말씀드렸다. 사모님께서도 한국 순복음교회 성도들의 열심을 사모하셨고, 성도들 또한 한국인선교사에 대해 호감이 많았다. 목사님과 영어 사용이 가능한 청년들을 제외하고는 더 많은 성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대만 외국인학교의 영어 교사가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만난 기쁨은 한국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그런데 중국인을 사랑하여 대만에 온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뭘까? 내 스스로도 이상했다. 예전에 태국으로 단기선교를 갔을 때, 태국어만 할 줄 아는 전도사님 가정에 영어를 쓰는 태국인을 만났을 때도 이 같은 심정이었다.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쁨이랄까! 언어소통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한국식 예의’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호칭과 직분에 대한 예의를 중요시 하는 한국인들에게 대만교회가 사용하는 호칭에 익숙해 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일흔이 다 되신 어르신들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호칭을 생략한 채 중국어로 내 이름만을 불렀다. 얼굴엔 드러나지 않았겠지만 왠지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나에게 예의 없이 이름만을 부르다니! 한국에서는 직분에 따라 호칭을 달리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는데. 그렇게 해야 한다는 ‘한국식 예의’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의사소통의 문제로 대만목사님과 오해가 생겼다. 내가 이사하는 문제로 교인들에게 미리 무엇인가 도움을 요청했다고 목사님께서 오해를 하셨다. 이런 사소한 일은 또 다른 일들과 겹쳐져 교회를 떠나야 하는 위기의 순간까지 이르렀다. 한국선교사에 대한 영적인 기대감이 다른 요구들과 함께 분쟁의 요소가 되었다. 대만 목사님은 한국교회에서 파송했지만 대만교회 이름으로 파송장을 보내야 한다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요구하셨다. 대만 성도들과의 교제도 조심스러워 위축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륙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2년 동안은 대만에 있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2년이 지났는데도 왜 중국선교를 안 가냐며 불편해했다는 것이었다. 그 불편한 심기를 2년이 지난 후에 털어놓는 바람에 새삼 당황하고 놀랐다. 중국어에 “메이원티(没问题)”가 말처럼 괜찮은 게 아니었다, 마음속에 묻어뒀던 케케묵은 감정을 세월이 지났어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대만에서의 나의 첫 사역지인 이 교회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된 것을 알았기에 떠날 준비를 했다.
나도 견뎌낼 수 있을까
마침 파송교회도 한국 교단 선교부의 선교훈련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취해왔다. 새로운 선교단체 교단 선교부에 소속되어 다시 대만에 돌아왔다. 대만에서의 첫 2년은 다른 한국선교사들과 교류 없이 지냈다. 당시 한국선교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너무 조심하였기에 한국어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선교지에서 관계에 묶이다 보니 족쇄를 찬 듯이 자유롭지 못했다. 혼자 영적 전쟁터에 서 있는 느낌이란, 우상숭배가 심한 대만에서 영적 공격은 엄청났다. 어떤 선교사는 마음의 병이 심하게 들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견뎌낼 수 있을까?’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도로 돌파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눈치를 보는 연약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교단 선교부에 들어가니 선배 선교사들과의 교류가 있어서인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 목사님들 사이에서 여자 선교사들님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단기선교 때와 같이 교회에서 한국어와 피아노 가르치는 일들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갑갑했다.
성령님이 하신 일들을 체험했던 내게 방언을 금하는 교단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 힘들었다.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하지만 내게 주신 사역과 은사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러한 때에 한국에서 가깝게 알고 지내던 목사님께서 대만교회화의 연합집회를 위해 대만에 오셨다.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던 한국과 대만의 신학교협력 사역이 연결되었다. 그러면서 대만의 한 목사님께서 나를 대만교회로 초청하셨다. 대만의 부흥을 위해 예전에 속해 있던 선교단체와 협력했던 대만교회의 지도자를 한국 목사님을 통해 다시 만났다. 중국어 통역을 위해 한국교회와 대만교회의 다리 역할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외국인이 좋아 영어를 혼자 공부했고 발음도 좋다고 미국인 영어 선생이 격려해주었다. 그런 생각으로 중국어를 시작했는데, 나이 마흔이 넘어 배우는 중국어는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바로 졸업하고 온 청년들과는 듣는 귀부터 다른 것 같았다. 언어학교를 마치자 대만신학교에 사역중국어 과정이 개설되었다. 엄격한 신학교 규율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만교회 미래의 사역자들을 훈련하는 곳이기에 소중한 만남의 장소였다. 한국선교사들의 헌신과 열정에 도전도 받았다. 그러나 대만에서 손님인 한국인이 너무 큰 목소리를 낸 것 아닌지, 세계에서 미국을 이어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한국교회이지만 선교지에서 늘 가르치는 자세는 아니었나, 한국에서 배웠던 것 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 본다. “나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반(半)은 중국인이라는 말이 듣기 좋았다. 하나님께서 중국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또한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을 통해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협력자로 함께 세움을 받은 것이다.
현지인과의 선교협력이라고는 하였지만 대만에서의 6년 반이라는 시간은 기대했던 것만큼의 사역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대륙엘 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왔나” 싶었다. 해외선교지에서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중국 본토로 들어갔던 선교사들의 입국이 거부되면서 대만으로 중국선교사들이 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대륙으로 들어가기에는 점점 어려운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평생 학생비자로 선교지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이전과 같은 고민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대만에서는 종교 비자를 받을 수 있지만 내가 속한 교단에서는 여성 목사를 허용하지 않기에 목사선교사만이 할 수 있는 선교사 비자신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미 6년이 넘게 학생비자를 받았기에 더 이상 학생 자격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는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됩니다.
♣ 김그레이스 | 전 중국선교사, 중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