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평가할 때 9ㆍ11 이전과 9ㆍ11 이후로 나누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 사건으로 세계 정치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CIA에서는 아프간 포로를 조사하는 데 있어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며, 그렇게 미리 예측과 대처를 하지 못한 것, 특히 다양한 지역의 언어 전문가를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하니 선교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선교는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그에 따라 한국 선교, 한국 선교사는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근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꽃을 피우는 선교

파송 선교사 1만 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 선교는 그동안 꽃을 피우는 선교였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선교 파송국각가 된지 채 20년도 안 되어, 그 많은 숫자와 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서구 선교사들이 이루지 못한 많은 역사를 선교 현장에서 이루어내고 있으니 그 또한 대단한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꽃을 피우는 선교를 지향해 왔고 실제로 많은 꽃을 피우고 있다. 따라서 꽃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혹 그 꽃이 쉽게 지더라도 다시 다른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지는 꽃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도 꽃을 피워야 하는 부담감으로 ‘물질’과 같은 비료를 듬뿍 주어 일단 꽃을 피우고 보아야 하는 환경에 있었다.

9ㆍ11 사건은 우리의 이러한 방향을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꽃을 피우는 일은 누군가 토양이 되어 주어야 가능하며 그 토양이 존재할 때만 계속 피워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 토양을 담당하던 서구 선교가 당장은 아니더라도 급격히 토양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점에 오게 되었다. ‘누가 그 토양의 자리를 대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이다.

 

꽃에서 나무로

이제 우리는 꽃과 같은 선교사에서 나무와 같은 선교사로의 변화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남아 있는 선교지의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기 어렵기 때문이고 혹 피웠다 해도 곧 시들어 버리는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집트의 시내 광야를 횡단할 때 한 나무를 보았다. 당시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묵상하고 있었는데, 조각목이라는 단어가 영 마음에 걸렸다. ‘이 광야에서 어떻게 나무를 구했는가?’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한참 후에 의문이 풀렸는데 그것은 바로 그 광야에 아카시아 계통의 조각목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 저기 한 그루씩 떨어져 물 없는 땅, 내리쬐는 강한 햇빛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틀어진 나무였다. 그 조각목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막을 만드실 때 사용하신 나무였다. 21세기 선교지는 점점 그 애굽의 시내광야와 같은 복음의 불모지, 물이 없고 빛마저 강한 지역들이 남겨져 있다. 선교사는 곧 시들어 버리는 꽃이 아니라, 그리고 많은 물과 같은 풍족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 백향목이 아니라, 그러한 고난을 감수해 내는 조각목 같은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묵묵히 그 고난을 감내하여 마침내 성막을 만드는 자리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그런 나무들 말이다. 옛말에 못된 나무가 숲을 지킨다고 했던가….

 

비료를 줄이고 자연 농법으로

스티븐 코비는 <원칙 중심의 리더십>이란 책에서 리더십을 농사에 비유한 바 있다. 농사에 대한 이해가 나라와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최근 감명 깊게 읽은 한 농업에 관한 책에서 선교 토양에 관한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벼농사에서 모판을 만드는데, 씨앗을 물에 담가둠으로써 뿌리를 내려야 할 시기에 먼저 싹을 틔우게 되고, 싹을 틔운 후 내리는 뿌리는 자생력이 약해 병충해에 쉽게 죽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농약물에 담가야 하는 악순환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벼는 비료와 농약을 필요로 하게 되고 따라서 토양도 망가지는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농업을 20여 년 간 연구해 온 이영문 씨는 모판을 만들지 않고 바로 파종하는 이른바 ‘태평농법’(이영문, 모든 것은 흙 속에 있다, 양문)을 개발하여 농약과 비료를 주지 않고 자연의 생태계를 이용한 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선교에 있어 선교사 자신이나 현지 공동체가 시간을 두고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이른바 ‘직파 방식’을 포기하고, 농약과 비료로 보살펴(?) 줌으로써 허약한 구조를 만들고 게다가 그 허약한 공동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악순환을 거듭하여 결국 선교라는 토양을 망가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고오 있지 않나 생각된다.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우리 한국 선교사가 다음 주자들(중국, 인도, 남미, 인도네시아 등)을 위해 선교의 토양 역할을 하는 선교 구조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아이를 기숙사 학교에 5년 동안 보내야만 했었는데, 그 어려움을 함께 감당해 준 선생님은 바로 그 학교에서 우리 대신 부모 역할을 해 준 호수 선교사였다. 그 분은 20대 처녀의 몸으로 그곳에 와서 40여 년 간 선교사 자녀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역할을 하며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그런 토양의 자리를 이제 누가 지켜 줄 것인가? 한국 교회와 선교사에게 그런 토양의 역할을 요구하면 우리는 꽃의 자리에서 내려와 그렇게 토양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성숙과 관련된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현지 공동체들로 하여금 토양을 바르게 형성하는 시각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비료에 의존하지 말고 싹을 틔우기 전에 먼저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비바람이 와도 쓰러지지 않는 그런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가 말한 ‘농사에 비유된 리더십’을 그렇게 이해하고 싶다.

 

이야기에 관심 있는 선교사

마지막으로 21세기의 선교사는 구석구석을 살필 줄 아는 선교사, 말하자면 ‘문화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요구되는 미전도 종족 선교란, 그 말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어 장벽을 만나기 전까지 문화와 언어를 함께 이해하는 동질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그것은 획일화가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어느 가을, 마당을 열심히 쓴 아들이 아버지께 고하는데 그 아버지는 계속 고개를 저으며 다시 쓸라고 했다. 아들은 구석구석 반듯하게 쓸어 다시 고하는데 여전히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더 이상 쓸 곳이 없습니다.”라고 아들이 말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어리석다 꾸짖고는, 단풍이 곱게 든 나무를 흔들어 낙염을 적당히 마당에 흩어 놓고 “마당은 이렇게 쓰는 것이니라.”고 했다 한다.(박인성, 디자인, 세상을 비추는 거울 p 20-21, 디자인하우스)

가을에는 가을에 맞는 마당 쓸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종족마다의 이야기에 민감하고 그 이야기를 주님의 이야기로 전환해 갈 수 있는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던 날 각자의 입에 각 종족의 이야기(언어)로 말씀하게 하신 것처럼….

무리에 둘러싸여 소란스러운 행진 가운데 계시던 어느 날(눅8:42～48), 예수님은 중동의 그 통 넓은 옷을 입으셨음에도 ‘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가를 만진 그 하나의 ‘이야기’를 그냥 흘려 보내지 않으시고 그 연약한 (사회적으로)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으셨다. 각 종족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언어가 그렇고 문화가 그렇고 그들의 역사가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들어 주고 가슴으로 대답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필요하다. 21세기 세상은 거대한 통합으로 가고 있는 듯하지만, 이 작은 구석구석을 감수성을 가지고 들여다 볼 줄 아는 그런 선교사들이 필요한 세기이다.

권성찬 | 선교사, GBT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