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선교의 선구자인 윌리엄 캐리의 1793년 인도선교를 시작으로, 서양에서는 점진적으로 해외선교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1807년 모리슨이 중국에 도착한 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의지로 중국 땅에서 힘든 개척사역을 전개해갔다.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중국에 복음이 전해진 지 곧 2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2백년간 수많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 이바지한 공헌으로 중국은 교회의 뿌리를 견고히 심고 아름다운 기초를 세울 수 있었다.
CIM(중국내지선교회)을 전신으로 하는 OMF 한국지부는 최근 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대회를 열었고, 허드슨 테일러의 5대손인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4세가 방한하여 경향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이를 통해 허드슨 테일러 일가의 중국선교사역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과 공헌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영국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허드슨 테일러의 증조부 제임스 테일러와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로부터 그들 자신이 일생동안 주님을 섬겼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대에 자손들 또한 대대로 주님을 섬겨오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부친은 약사, 어머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본래 그의 아버지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뜻이 있어서, 중국을 소재로 한 잡지만 보면, 구입하여 수집하였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의 집에는 중국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자료를 통해, 매달 예수님을 모른채 세상을 떠나는 중국인이 수백만 명에 이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 통계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중국지도에 무릎을 꿇고 매일 매일 중국에 보내주실 것을 주님께 간구했다.
중국에 가기 전, 음악에 재능있는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그는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함께 동역할 수 있다면 참 아름다운 사역이 되겠다는 상상을 하였다. 여자친구의 부친도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딸이 중국에 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결혼에 대한 큰 시련을 맞이하여 마음에 갈등이 매우 심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은 마지막 여자친구는 보낼 수 있지만, 중국은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내린 한 사람의 결정이 그 후 중국 땅에 큰 축복이 될 줄은 당시로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교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준비”라고 하겠다. 허드슨 테일러의 증손자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3세(戴紹曾, 中華福音神學院 제1대 원장) 목사는 일찍이 선교사에게 필수적이고 가장 기본 되는 세 가지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성경, 교리, 교회진리, 교회역사 등을 포함한 신학적 교리와 선교대상국가에 대한 역사?문화?생활습관 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언어훈련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 가기 전 이러한 준비 외에 믿음과 지식적으로도 상당한 훈련과 학습의 시간을 보냈다. 이를 통해 중국에서 오랫동안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시골 오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식 복장을 하여 먼저 외관상의 장벽을 허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바울이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고백과 같은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의 어느 주일에 중국내지의 필요에 대한 비젼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내지의 생활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도시와 격차가 심한 곳이라 더욱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1865년부터 1905년까지 40년간 중국내지회(CIM)를 창립하고 내지사역에 집중했을 뿐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중국의 내지 각 성에서 주의 복음을 전하도록 돕는 사역을 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서 허버트 허드슨 테일러(戴存仁)와 형제들 存義?存禮?存智?存信을 낳았다. 그 중 存仁과 存義 형제는 중국에서 복음사역에 동참하였다. 허드슨 테일러의 손자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2세(戴永冕)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돌도 못 채우고 중국에 건너왔다. 그 또한 일생을 중국선교를 위해 헌신했다.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2세는 중국의 전란기와 일본침략시기인 격동의 시기에 중국인과 함께 동고동락했을 뿐 아니라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으며 아울러 허난(河南) 카이펑(開封)과 서북지역에 개봉성경학원(開封聖經學院)과 서북성경학원(西北聖經學院)을 세웠다. 중국을 위해 수많은 전도인을 배양했고, 중국대륙의 공산화이후 타이완으로 건너와 성광신학원(聖光神學院)을 창립하여, 은퇴하기까지 타이완을 떠나지 않고 일생동안 중화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4대손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3세(戴紹曾)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타이완의 중화복음신학원(中華福音神學院)에서 였다. 당시 그는 華神(中華福音神學院의 약자) 초대원장으로 섬기고 있던 때이다. 그와의 만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표준의 중국어(Mandarin, 國語, 普通話)를 나보다 훨씬 잘 구사했다는 점이다.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의 이방인이 이렇게 정확하고도 듣기 좋게 우리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3세 목사 또한 일찍이 1959년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2세가 사역보고차 본국으로 귀국한 기간에 성광신학원의 부원장을 맡았고, 다음 해에 성광신학원의 원장으로 피선되어 1970년까지 담임하였다.
제5대손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4세(戴繼忠) 목사는 타이완에서 태어났고 타이완에서 성장하여 타이완여자와 결혼하였다. 그는 어려서 매우 반항적이고 부모님과 엇나가는 시기가 있었고, 18세가 되면 부모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교회로부터의 속박을 벗어날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계획이 하늘의 계획만 못하다(人算不如天算)’는 말처럼 하나님은 탕자로 하여금 다시 한번 허드슨 테일러 일가의 대를 이은 중국선교 대열로 돌아와 주님을 섬기는 사역자의 길을 걷게 하셨다.
여기까지 써 내려오니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남긴 불후의 명언이 떠오른다. 『내게 만일 일천 파운드의 영국 돈이 있다면 중국인을 위해 모두 사용하겠고, 내게 만일 일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하나도 남김없이 중국을 위해 내어줄 것이다.』 이 정신이 허드슨 테일러 가문에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남긴 이 명언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주께서 중국을 뜨겁게 사랑하여 중국에 헌신한 선교사들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용감하게 계속 중국선교 사역에 전진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유전명/ 중국복음선교회, CMI 한국지부 대표, 방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