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사람 테일러 중국인들은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1832-1905)를 선교사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 요크셔 반즐리(Barnsley)에서 태어났을 뿐 17세 때(1849년) 중국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한 후 전 생애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C.E.S.(China Evangelization Society)선교회의 파송선교사로 여학교 교사였던 마리아 다이어(Maria Dyer, 1837-1870)와 1858년 결혼하였으나, 그녀가 먼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제니 폴딩(Jenny Faulding, 1843-1904)과 재혼(1871년)하였다. 그녀는 1866년 C.I.M.(China Inland Mission)소속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테일러가 부재중일 때에는 중국 내 선교부를 섬기며 여자로서는 최초로 중국 내지 깊숙이 들어가 사역한 여성이기도 하다. 폴딩 역시 테일러보다 먼저(1904년) 중국 땅에서 죽어 장사되었다.
테일러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히 1905년 중국 창사(?沙,湖南省)에서 죽기까지 언제나 아침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허드슨 테일러가 아침 동산에서 무릎을 꿇지 않으면 중국대륙에는 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과연 중국인들이 외국에서 온 선교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중국인을 위하여 기도한 위대한 중국인이었다. 그의 무릎과 아침 동산의 기도는 중국 대륙에 분명한 새로운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1949년 이후 모든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추방되고, 표면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중국에서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한 번 떠오른 이 태양은 어두운 구름 뒤편에서 여전히 중국을 향하여 새로운 햇살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선교학자 허버트 케인(J. Herbert Kane) 또한 ??그는 믿음과 기도로써 지속적으로 진취적인 기상을 세워나간 영적인 거장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이 꿈꾸지 못했던 중국 내륙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 선교를 위하여 일한 것 외에도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중국을 알리고 중국을 위한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의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그는 사역 종반기라고 할 수 있는 1888년과 1890년에도 미국과 호주를 방문하여 각각 북미지역 선교본부와 호주지역 선교본부를 창설하는 등 중국을 위한 선교 운동을 세계로 확산시키기도 하였다.
사역을 위한 준비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캐리(William Carrey, 1761-1834)나 학원을 개설하고, 극작가의 꿈을 키우다가 회심하여 선교사로 헌신한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 등과 같이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장성한 후에 소명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와 달리 테일러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부모들이 그를 중국선교사로 서원하였고, 테일러 역시 17세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복음적인 소책자를 읽고 회심한 후 중국선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확신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테일러는 18세 때(1850년 3월)부터 '이삭을 줍는 사람(the Gleaner in the Mission field)'이라는 잡지를 창간호부터 구독한다. 이 잡지는 ??중국협회??라는 곳에서 발행하였는데, 1852년 5월에 사역을 확장하면서 ??중국선교회??(China Evangelization Society)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훗날 테일러가 바로 이 선교회의 후원으로 중국선교사로 나가게 된다.
중요한 일화가 있다. 18세 때부터 선교지를 구독하는 테일러에게 반즐리조합교회 목사는
"선교지에 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테일러는 자신 있게 대답한다.
"두제자와 칠십 문도처럼 주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조합교회 목사는 테일러를 타일렀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림없단다. 아마 네가 좀 더 자라게 되어 지금보다 더 똑똑해지면 잘 알게 될 거야."
훗날 테일러는 고백한다. "나는 결코 더 이상 똑똑해지지 않았다. 주님의 방법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으로, 성경 말씀대로의 선교를 고집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나아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결혼이냐? 중국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그는 마리안느 보건이라는 음악교사와 약혼을 하였는데, 문제는 그녀가 중국으로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중국을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것은 그에게 정말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한 동안 테일러로 하여금 큰 실의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결국 그의 약혼은 파기되었다.
그는 중국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로 헐(Hull)대학과 런던 대학에서 의학과 약학을 공부하였고, 런던의 빈민가에서 마른 빵과 사과만 먹으면서 자신을 연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중국에 갔을 때 의지하고 믿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며, 이런 믿음의 자세는 후에 그의 전략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라틴어와 히브리어, 헬라어를 터득한 그는 중국어로 된 누가복음으로 중국어를 공부하였다.
새로운 선교회의 필요 테일러는 1853년에 C.E.S.의 후원으로 중국으로 떠난다. 그 당시 이 선교회를 이끄는 사람은 독일인 카알 구츨라프(Karl Gutzlaff)였다. 구츨라프는 황해안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선교하는 중에 앰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하여 최초로 주기도문을 한국어로 번역케 하였고, 배안에 있던 감자('마령서'라는 이름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를 심게 함으로 우리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선교사이지만, 아편전쟁을 종결짓는 난징조약의 통역으로 중국인들에게는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츨라프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다. 구츨라프의 용기, 성품, 모험심, 중국 관습에 대한 적응성, 선교 원칙과 방법까지도 테일러에게는 모두 공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훗날 테일러는 자신이' 중국선교의 아버지'라면 구츨라프는 '중국선교의 비조(鼻祖)'임에 틀림없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테일러의 초창기 사역은 주로 닝보(?波)와 상하이(上海)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고통은 보통이 아니었다. 1854년(22세)과 1855년에 3천여 부의 성경을 배에다 싣고 양자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그 곳의 중국인들이 테일러의 복장을 보고 이상히 여기자 그는 곧바로 중국식의 변발과 복장을 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많은 동료선교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이라는 놀림까지 받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된 테일러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1857년 5월 C.E.S.를 사임하고 1865년 6월 25일 C.I.M.(중국내지선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오직 하나님의 공급만을 의지하며 목회와 병원 사역에 전념하다가 과중한 업무로 인한 피로와 병으로 영국으로 가서(1860년) 6년을 머물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자신의 병을 치료받으며, 의사(조산원)의 자격을 취득하고, 닝보(?波)의 방언으로 된 신약성경과 「China‘s Spiritual Need & Claims」(중국의 영적인 필요와 요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 후 ’중국내지선교회‘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하고 24명의 동역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된다. 그 응답으로 1866년 5월, 16명의 선교 동역자들과 함께 래머뮤어(Lammermuir)호를 타고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 16명을 래머뮤어팀이라 불렀다.
테일러의 생애와 사역은 언제나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 5년이다. 1866년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항저우(杭州)에서 사역을 하던 중 래머뮤어팀의 반발과 불평은 그의 사역을 매우 힘들게 했다. 그리고 1867년 8월 사랑하던 딸 그레이시를 폐렴으로, 1870년 2월에는 다섯 살 난 아들 사무엘을 결핵성장염으로, 같은 해 9월 태어난 지 20일 밖에 안 된 아들 노엘과 13일 후에 사랑하는 아내마저 32세의 나이로 먼저 떠나보내는 큰 슬픔을 겪었다. 이런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1868년의 반외세 폭동으로, 이 사건은 영국에서까지도 그를 비난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누가 안식을 말했던가?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아버지의 일을 하는 나에게 땅 위에 그 무슨 안식이 있으랴? 이 땅에 나를 보내시고 이 땅에서 그 날을 기다리게 하시며 그 때까지 당신의 일을 맡겨주신 그 분! 그분은 내게 은혜 또한 후히 주시리. 일할 수 있는 은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안식의 은혜는 아니니 안식은 하늘에나 있는 것을…
하나님의 때 1871년 제니 폴딩과 재혼한 테일러는 1875년 18명의 선교 개척자들에게 중국의 9개 내륙지방을 뚫고 들어가도록 요청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물론 기도의 응답으로 이 일은 실행되어졌다. 1885년 케임브리지의 7인이 중국에 도착한 이후에도 무려 100인의 새 선교사를 요청하며 기도하였고, 1887년에 이 기도 역시 응답받았다.
1900년의 의화단사건으로 58명의 C.I.M.선교사와 21명의 어린이가 피살되는 일이 있었다. 풀러신학교의 아더 글래서(Arthur F. Glasser)교수의 평가대로 ??교만하지 않고 열심이 있었으며, 편협하지 않고 성경적이었으며, 피상적이지 않고 보편적이었으며, 이기적이지 않고 카리스마적이었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 해에 케임브리지의 7인 중 한 명인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테일러는 1904년 아내 제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장례를 마친 후, 1905년 열한 번째의 중국 여행과 C.I.M 내륙 기지 일곱 군데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3일 여섯 개의 선교회에서 온 선교사들과의 리셉션을 마치고 마지막 손님까지 배웅 한 뒤에 자신의 침대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직 믿음(Faith Mission)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테일러와 중국내지선교회의 선교방법이다. 중국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며, 복음의 불모지를 향하여 내륙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랄프 윈터교수의 지적처럼 '해안선교시대에서 내지선교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사역은 연합운동이었으며 관대하였다.
그리고 초교파적이며 자국인 지도자들을 양육하는데 힘을 썼다. 물론 후에 선교역사가인 라투렛으로부터' 내지선교회가 중국 전 지역에 복음을 퍼뜨리는 일에 전력한 것도 사실이고 중국인들을 복음의 조력자로 활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중국인 목회자를 훈련시켜 세우는 일에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지만 언제나 그의 선교는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번역, 출판, 의료선교는 물론 여성선교사의 중요성을 인정하였고, 중국인과 똑같이 생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운 동정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며, 일체의 모금 운동을 사양하고 하나님의 축복하심만을 의뢰하였다는 것이다.
1888년 9월 테일러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시카고 YMCA강당에서 무디선생의 주재로 큰 집회가 열렸다. 부흥사 무디는 즉석에서 헌금 순서를 강행하였고 이를 테일러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일러는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다른 방법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테일러에게 무디는 "아무튼 이런 좋은 헌금을 거절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라고 하면서 테일러의 '믿음선교(Faith Mission)' 앞에 손을 들고 말았다.
1949년 이후 C.I.M.은 다른 선교회와 함께 중국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1964년 100년 동안 사용해 오던 명칭을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바꾸었다. 여전히 O.M.F.는 아시아 선교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와 C.I.M. 사역의 선교 정신에 입각한 ??믿음선교??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손윤탁/ 중곡동교회 담임목사, CUM자문위원 |